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61화 (261/441)

# 261

힐통령 261화

87장 기묘한 파티(3)

“우선 한 명은 구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정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그 흥겨운 기분이 이어진 건 오피스텔의 입구에 들어서기 직전까지였다.

“이제 세 명만 더 구하면 되는데…….”

휴대폰의 연락처를 열어본 정우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엄마] [아빠] [누나]

[정민수] [설은영] [유하린]

[미네르바] [김인하 PD]

“끄응.”

가족을 제외하면 고작 다섯 명만이 등록되어 있는 초라한 연락처.

한숨을 내쉰 정우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설은영.’

항상 보이던 그녀의 경호원들이 어쩐 일인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빠르게 수습하고 평소의 도도함을 뿜어냈다.

정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건 처음이네요.”

“그러네요.”

살짝 차갑게 대꾸한 설은영이 팔짱을 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지금 나한테 말 걸지 마!

‘아, 삐졌네.’

자신이 자탄 레이드 때 워리어스와 손 잡았던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섭섭함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걸 풀어야 되나.’

잠시 이어진 고민 끝에 결론이 내려졌다.

‘어쩔 수 없지. 그녀가 날 이래저래 신경 써주고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더불어 그녀는 자신의 연락처에 기재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우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 입을 열었다.

“오늘 옷 예쁘게 입으셨네요.”

“……?”

정우의 뜬금없는 칭찬에 설은영이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고마워요.”

현재 그녀가 입고있는 옷은 사람들이 흔히 아는 명품 브랜드가 아니었다.

하지만 옷과 악세서리의 디자인이나 재질만 봐도, 백화점에 굴러다닐 물건은 아니었다.

“음…….”

정우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야기를 뭐 어떻게 꺼내야 하지?’

22년 동안 연애 한 번 못 해본 남자가 삐진 여자의 마음을 푸는 방법을 알 리 없었다.

결국 그가 꺼낸 말은 단순했다.

“혹시 내일 모레 시간 있으세요?”

“내일 모레요? 잠시만요.”

돌직구는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다.

그야 설은영 역시 연애와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휴대폰의 스케줄 표를 확인하던 설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길드 회의가 끝나면 곧장 오곤 백작과 점심 만찬을 즐긴 뒤, 영주 저택으로 돌아와 보유 영지들의 당일 보고서를 확인한 후에 사냥터로 가요.”

“…….”

누가 거대 길드 마스터 아니랄까봐, 하루 스케줄이 빡빡하기 그지없다.

‘다른 건 몰라도, 오곤 백작과의 만찬이라면 미루기 힘들겠네.’

설은영이 아무리 세계적인 길드의 마스터고, 보유한 영지 개수가 많아도 상대는 백작이다.

미드 온라인에서 백작과 남작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굳이 따지자면 남작이 된 그녀의 위치는 땅이 아닌 남산 타워 정도 높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아, 별 건 아니고…… 제가 이번에 방송에 출연하게 됐는데,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이 던전이 다섯 명 이상만 진입할 수 있는 던전이라서요.”

“다섯 명이요?”

“네.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가주실 수 있나 여쭤볼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스케줄을 들어보니 안 될 것 같네요.”

“괜찮아요. 시간 돼요.”

설은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하지만 오곤 백작과의 점심 만찬은…….”

“하루 당겨서 내일 만나면 돼요.”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도록 만들어야죠.”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내 자리, 비워둬요.”

설은영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끼고있던 팔짱이 살짝 느슨해졌다는 것일까.

띠링.

“그럼 내일 모레 약속 장소에서 뵙겠습니다.”

“그래요.”

‘이제 두 명 구했네.’

생각보다 진전이 좋다.

집으로 들어온 정우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날리며 연락처를 빤히 쳐다봤다.

‘미네르바는…… 필요 없겠지.’

성녀 클래스인 미네르바를 영입한다면 분명 파티원의 전력이 크게 강화될 것이다.

물론, 카이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내가 힐러인데 굳이 힐러를 또 구할 필요는 없으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딜과 탱, 힐, 심지어는 원거리 딜러의 역할까지 담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던전은 좋든 싫든 혼자 입장할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러니 이왕 같이 가는거, 파티원들을 최대한 쓸모있게 사용하기라도 해야 덜 억울하지.’

파티원 후보에서 미네르바를 과감하게 빼버린 정우는 휴대폰을 귀에 가져댔다.

신호음이 가기를 잠시,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정우냐?]

“어.”

[우리 공사가 다망하신 랭커께서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그럼 끊을까?”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전화를 주시었는지요.]

상대는 자신의 연락처에 실린 인물 중 실없는 농담을 서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친구.

휘몰이 길드의 탱커인 정민수였다.

정우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 예능 프로 나간다.”

[헐, 네가? 무슨 예능? 혹시 복면 랭커?]

“아니. 새로 편성한다던데.”

[대박. 그래서 그거 자랑하러 전화하셨어?]

“자랑은 무슨. 내일 모레 시간 괜찮냐.”

[내일 모레? 딱히 계획은 없는데. 왜?]

“방송에 나갈 던전 공략할 생각인데, 같이 갈래?”

[음…… 혹시나 싶어서 말하지만, 너랑 나랑 레벨 차이가 꽤 난다?]

“너 지금 레벨 몇인데?”

[나 287.]

그 정도 수준이면 모든 유저들을 통틀어서도 상위권에 랭크될만한 수준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랭커 끝자락에 턱걸이로 간신히 들 수 있을만한 정도의 레벨.

“낮네.”

[……인마, 네가 비정상적으로 높은거거든? 너 아니면 나도 어디가서 안 꿇려. 절대 주눅 안 든다고.]

“진짜야?”

[당연하지.]

“그 마음 변치않길 바란다. 이틀 뒤에 보자.”

한정우는 이틀 뒤 민수가 지을 표정을 상상하며 낮게 웃었다.

“이제 나까지 포함해서 네 명.”

마지막 한 명을 구해야 할 차례.

하지만 별다른 인맥이 없는 정우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애초에 한정적이었다.

‘아쉬운대로 미네르바라도…….’

정우가 국제 전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든 순간.

그의 휴대폰이 세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은 정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

“허억, 허억. 죽는 줄 알았네.”

이틀 뒤, 이타카 밀림의 약속 장소에 도착한 민수, 발터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정우 다음으로 도착한 그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역시 내가 가장 빨리 왔구만.”

“난 안 보이냐.”

“뭐래, 파티장이 가장 빨리 오는건 당연한거지. 손님 초대했는데 집 주인 없는 경우 봤어?”

“…….”

옛날부터 말빨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던 녀석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카이가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올 때가 되었는데…….”

“아, 그러고보니 다섯 명 이상이 되어야 입장할 수 있다고 했나? 정말 개떡 같은 조건이네.”

“그 개떡 같은 조건 덕분에 네가 나랑 같이 던전도 가는거다.”

“내가 그만큼 개떡을 좋아한다는 소리지, 헤헤.”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전환한 발터는 바위 하나를 깔고 편안하게 앉았다.

입고있는 장비만 보면 전형적인 탱커, 그 자체였다.

‘자식, 돈 많이 버나본데.’

친구의 장비를 살펴보던 카이가 조용히 웃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니크 등급 아이템을 장비하는건, 웬만큼 벌이가 좋지 않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까.

카이의 시선을 느꼈는지, 발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장비 때깔 죽이지? 말했잖아. 너 아니면 나도 어디가서 안 꿇린다고.”

“너 랭킹 낮잖아.”

“젠장, 너랑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거지. 나도 제법 먹혀주거든?”

궁시렁거리던 발터는 애꿎은 방패를 쿵쿵 두들겼다.

“그나저나 다른 파티원들은 왜 안와? 빠져가지고.”

“저기 한 명 오는 것 같네.”

“뭐? 어디?”

“아직 네 눈에는 안 보이겠다.”

중얼거리는 카이의 눈동자가 녹색빛으로 물들었다.

[매의 목격자 칭호가 활성화 중입니다.]

[시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그렇게 상승한 시력은 레인저 클래스 유저와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 뛰어난 시야에 잡힌 것은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흑색의 전사였다.

‘하린 씨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카이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바덴 성에서 봤을 때보다 움직임이 훨씬 더 좋아졌어.’

고작 달리는 것만 보고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타카 밀림에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도 장애물이었지만, 자연환경이 더 큰 적이었으니까.

특히 걷기만 해도 발이 푹푹 빠지는 지독한 늪은 외부인의 침입 자체를 거부했다.

팟, 파밧.

하지만 유하린은 그런 늪지대를 평지마냥 달려오는 중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발은 늪에 빠지지 않았고, 마치 단단한 바위라도 밟듯 거침없이 박찼다.

“아, 저기 오네.”

약간의 시간이 흘러서야 유하린을 발견한 발터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가까워지는 유하린의 모습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발터가 입을 열었다.

“친구야. 저 유저의 장비를 보니 불현듯 한 사람이 생각나는구나.”

“누가 생각나는데?”

“유하린.”

“맞췄어. 그래도 이 거리에서 용케 알아봤네.”

카이가 살짝 놀랐다는 목소리로 말하자, 발터가 기겁을 했다.

“지, 진짜 유하린이라고?”

“어.”

“이 미친놈아! 그런건 진작 말해줬어야지!”

갑자기 호들갑을 떨어대는 친구를 쳐다본 카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제냐니? 유하린은 미드 온라인 가입자 10억 명 중에서 무려 2등이라고!”

“난 1등인데.”

“…….”

카이의 대답에 한 방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은 발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건…… 그렇지.”

“그럼 이제 안 떨리지?”

“응. 겁나 고마워서 미치겠다. 젠장.”

사소한 해프닝이 끝났을 때, 유하린이 카이 앞에 도착했다.

“늦은 건 아니죠?”

“예. 저희가 일찍 온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발터를 슬쩍 쳐다본 유하린이 카이에게 물었다.

“저분은……?”

“나중에 전부 모이면 한 번에 설명하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유하린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곱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쳐다보는 발터의 심정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이 녀석, 대체 뭐야?’

천하의 유하린을 무슨 강아지 다루듯 다루다니.

발터는 자랑을 하기 위해 꺼내놓았던 방패를 슬며시 등 뒤에 매달았다.

“크흠.”

어차피 상대는 랭킹 1위, 2위의 괴물들이다.

자신이 꿇릴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설마 나머지 파티원이 랭킹 3위, 4위는 아니겠지.’

자신이 이 파티의 쭈구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슬며시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이 알기로 카이는 랭킹 3, 4위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저기 한 사람 더 온다.”

“……음?”

이곳까지 오려고 개고생을 했던 발터가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저게.’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이는 굳이 발이 푹푹 빠지는 땅을 이용하지 않았다.

파삭, 파사삭.

이타카 밀림에 빼곡히 들어서있는 나뭇가지들을 밟으면서 다가올 뿐.

말로 하면 쉽지만, 해보라고 하면 랭커조차 쉽게 해내지 못하는 행위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속력으로 달리며 원하는 색깔의 돌만 밟는 것보다도 난이도가 높았으니까.

심지어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게끔 발에 싣는 체중을 조절하는 테크닉까지 겸비해야 했다.

“후우.”

바닥에 안전하게 내려선 여인, 설은영이 파티원의 면면을 확인했다.

“또 뵙네요. 유하린 씨.”

끄덕끄덕.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움을 표하는 유하린.

설은영의 시선이 발터에게 향했을 때, 그는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랭킹 1위와 2위에 이어서…… 21위가 포함된 파티라니.’

앞선 두 사람이 워낙 괴물이라 그렇지, 랭킹 21위인 설은영의 수준도 결코 낮지는 않았다.

발터는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있던 투구를 슬그머니 머리에 덮어썼다.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쳐놨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 집에 가고 싶다.’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 파티원이 도착했다.

“음? 저 사람은 장비부터가 좀…… 허접해보이는데?”

죽어있던 발터의 표정이 확 살아났다.

그는 카이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물었다.

“누구야? 처음 보는 유저인데…… 랭커는 아니지? 막 갑자기 랭커 27위! 이러는 거 아니지?”

“아니. 저 사람은 랭커 아니야. 너보다 레벨도 낮아.”

“오, 신이시여!”

드디어 체면을 세우게 된 발터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다. 나도 이제 어깨 좀 펼 수 있겠어.”

그러자 카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깨를 펴? 너 저 사람한테 잘 보여야 될 텐데.”

“뭐? 내가 왜?”

“그야…….”

카이는 양팔을 벌린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금발의 곱슬머리 남자를 쳐다봤다.

“저 사람이 이번 방송을 찍을 카메라맨이거든.”

동시에 세계적인 감독이자 편집자.

“헤이, 브로!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

마이클 레이놀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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