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힐통령 263화
88장 타락의 성지(2)
플레이어에게 던전의 존재란 날카로운 가시가 돋은 장미와 같다.
공략에 성공하면 달콤한 보상을 쟁취할 수 있지만, 실수로 가시에 찔리기라도하면 단순히 피가 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타락의 성지는 수많은 가시가 돋아있는 꽃이었다.
“여긴 하루이틀 돈다고 공략될 던전이 아닌 것 같은데……?”
심지어 가시가 즐비하게 박힌 줄기만이 눈에 들어올 뿐.
그 위에 달려있을 꽃잎은 무슨색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아. 가자고.”
“그런데 내가 정말 탱커할 수 있을까? 여기 출현하는 몬스터 레벨이 몇일지도 모르잖아.”
“괜찮아. 한 번 해보고 안되겠으면 버프 줄게.”
“성기사가 버프를 줘봤자…… 아.”
말을 하던 발터가 입을 다물었다.
카이가 비르 평야에서 아군에게 걸어줬던 광역 버프가 떠올랐으니까.
“비르 평야에서 썼던 광역 버프, 그거 지금 걸어주면 안 돼?”
“그거 비싼 거야. 나중에 때 되면 걸어줄게.”
발터의 요청을 가볍게 무시한 카이는 포지션을 정해주었다.
“발터가 선두에서 탱킹, 유하린 씨는 왼쪽 윙어를, 설은영 씨는 오른쪽 윙어를 맡아주세요. 마이클은 내 옆에 서고.”
윙어(Winger).
축구에 존재하는 포지션 중 하나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탱커보다 살짝 뒤에 위치하는 그들은 언제든지 공격에 가담할 수 있고, 탱커가 위험에 빠지면 탱킹까지 맡아야하는 포지션을 의미했다.
당연히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포지션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도 수많은 길드들은 쓸만한 윙어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자금을 억 단위로 투자했으니까.
‘하지만 이 파티에는 있어.’
그 난해한 포지션을 소화해줄 수 있는 최상급의 근접 딜러가.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무려 두 명이나 존재했다.
“포지션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분은 지금 말해주세요.”
물론 불만을 토로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치로 이동할 뿐.
“그럼 출발합니다.”
등 뒤에서 방패를 꺼낸 발터는 이를 왼팔에 부착시키며 전방을 가렸다.
호리호리하지만 키는 제법 큰 발터의 몸 대부분을 가려주는 거대한 사각의 방패.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는 발터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해보였다.
“…….”
허나 1분이 채 지나기전에, 카이가 그를 멈춰세웠다.
“발터, 잠깐 멈춰 봐.”
“응? 갑자기 왜?”
발터는 여전히 전방을 경계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에 살짝 한숨을 내쉬는 카이.
그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있는 설은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혹시 평소에 던전 공략을 할 때도 이렇게 하냐?”
“응. 물론이지. 던전이 어떤 곳인데.”
발터가 고개를 돌리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던전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소리.
‘하지만 이 파티에서만큼은 아니지.’
불행히도 그의 친우는 자신이 아직 어떤 파티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 듯 했다.
“괜찮으니까 쭉쭉, 빠르게 전진해. 그 속도로는 한 달이 지나도 공략 못하겠다.”
“정말 괜찮겠어? 속도 올리는거야 상관없는데, 그러면 커버력이 떨어져. 갑자기 측면에서 몬스터라도 튀어나오면…….”
“왜, 딜러들 죽을까봐?”
“그야…… 아.”
고개를 돌려 유하린과 설은영을 쳐다본 발터는 짧은 탄성을 뱉어냈다.
그가 평소에 던전을 돌 때는 당연히 휘몰이 길드원들과 함께였을 터.
‘발터에게는 미안하지만, 휘몰이 길드는 국내에서는 몰라도 세계 기준으로 봤을 때 B급도 간당간당한 곳이야.’
그런 곳의 길드원들은 보호하면서 던전을 진행해야 했으니, 저런 습관이 몸에 벤 것이다.
“조언 좀 해도 될까요.”
할 말은 다하고 사는 설은영이 입을 열었다.
이에 발터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신다면 감사히…….”
“우선 어깨. 힘 빼세요. 그런 자세라면 정면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올 때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측면에서 기습을 당하거나 함정이 발동될 때는 반응하기 힘드니까.”
“아!”
발터가 짤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던전을 돌면서 항상 겪어오던 일이었다.
‘어깨에 힘을 너무 준 것이 문제였나?’
휘몰이 길드에서는 자신이 어떤 점을 고쳐야 하는지를 속 시원하게 조언해줄 사람이 없었다.
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주고 싶어도 실력이 안 되서 못 해주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조금 더 빨리 가볼게요.”
전진하는 발터의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찌릿.
자신이 얼마나 큰 기회를 손에 넣은 것인지를 깨달은 발터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평소보다도 훨씬 더 집중이 잘 되는 느낌.
살짝 어두운 던전의 길이 구석구석까지 똑똑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바닥에는 함정 없음. 벽에도 없고, 천장도 클리어.’
길드원들과 함께 던전을 돌 때는 배우지 못했던 것을 던전 입장 5분 만에 배울 수 있었다.
발터는 이번 기회에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겠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기를 잠시,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몬스터 발견.”
“……저 녀석들. 뭐하고 있는 거지?”
카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앞을 쳐다봤다.
세 마리의 인간형 몬스터는 그들에게 등을 보인 상태였다.
우걱우걱, 쩝쩝.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연신 입가로 가져가는 중이었다.
‘늪지 개구리다.’
평균 레벨 280의 몬스터를 식량 취급하는 녀석들이니 그보다는 레벨이 높을 것이다.
그런 카이의 예상은 적중했다.
“킁킁. 냄새가…….”
“인간……! 인간의 냄새다!”
뒤로 고개를 휙 돌리는 녀석들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들은 먹고있던 개구리를 버려둔 채, 네 발을 이용해 빠르게 뛰어왔다.
발터가 소리쳤다.
“젠장, 말을 하는 구울이라고? 레벨은 310!”
“키아아아악!”
세 마리의 변종 구울들은 각기 발터와 유하린, 설은영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발터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동시에 그는 무거운 방패를 힘껏 들어올려, 바닥에 내리찍었다.
쿠우웅-!
그리고 전방에 펼쳐지는 푸르스름한 마나의 벽.
“마나 방벽!”
자리를 박차며 달려든 구울들이 방벽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꽈앙, 꽈아앙-!
“크윽……!”
두 다리로 바닥을 강하게 밟고 있는 발터의 몸이 뒤로 4㎝가량 밀려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구울들의 기습을 훌륭하게 막아냈다.
“윙어들!”
후방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카이가 소리쳤다.
동시에 두 명의 윙어가 날뛰기 시작했다.
푹!
유하린의 검이 섬전처럼 움직이며 변종 구울 한 마리의 목을 베었다.
“키르륵! 무, 무슨……?”
변종 구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목에 박힌 검을 빼내려했다.
하지만 유하린의 반응속도가 더 좋았다.
그녀는 변종 구울이 뒤로 걷는 속도만큼 정확히 따라붙으며, 그대로 검을 아래로 내렸다.
쯔거억!
결국 몸이 둘로 갈라진 변종 구울은 그대로 사망했다.
‘역시 유하린. 공격력 하나는 일품이야.’
레벨이 깡패인 점도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아름다운 연속기였다.
카이의 시선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샤프니스.”
설은영이 들고있던 화려한 백색 레이피어가 한 차례 빛났다.
샤프니스, 방어력 관통력과 공격력을 올려주는 버프.
그녀는 유하린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딛었다.
‘속도만 따졌을 때는 설은영 쪽이 더 위인가?’
레이피어는 일반적인 검과는 달리, 베기보다는 ‘찌르기‘에 특화된 무기이다.
찌르기류 무기의 대명사인 창이 그렇듯, 레이피어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거리.
설은영의 쭉 뻗은 다리가 앞으로 나가고, 거기서 상체까지 앞으로 숙이자.
변종 구울과 설은영의 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워졌다.
“빠, 빠르…… 키에엑!”
설은영의 레이피어가 잔상을 남기며 변종 구울의 전신을 찌르기 시작했다.
피빗! 핏! 피비빗!
물이 가득 찬 페트병을 바늘로 찔렀을 때처럼.
구울의 몸에서는 가느다란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설은영의 레이피어가 움직일 때마다 허공을 향해 쏘아지는 혈선의 갯수가 늘어났다.
“크, 크르륵……?”
치즈마냥 구멍이 숭숭 뚫린 구울의 몸.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혈선의 갯수가 18개가 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인지조차 못한 채,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나이스! 라스트 한 마리!”
발터가 신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렇게 수준 높은 딜러들과 함께 던전을 공략한다는 것이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이, 인간들 따위가 어, 어떻게…… 키르륵!”
자신의 동료들이 순식간에 처치되자, 마지막 남은 구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이런.”
아까 돌진할 때도 느낀거지만, 변종 구울들의 이동속도는 상상이상으로 빨랐다.
물론 전력으로 달리면 못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포기해야 해.’
하지만 설은영은 빠르게 포기했다.
몬스터들은 영리하지만, 던전 안의 몬스터들은 훨씬 더 영리하니까.
저렇게 도망치는 녀석을 무턱대고 쫓아가면 반드시 함정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기 마련이다.
그녀가 한 놈을 놓쳤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후웅!
바람이 불 일 없는 던전의 내부에서, 한 줄기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던전에서 이유없이 바람이 불 일이 없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즉, 이 바람은 자연적인 바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휙. 황급히 고개를 돌린 설은영의 시야로 낯익은 등이 보였다.
“끼, 끼르륵!?”
네 발을 이용해 엄청난 속도로 도망을 치던 변종 구울이 돌연 비명을 내질렀다.
갑자기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크륵? 파, 팔에도…….”
팔과 다리.
자신이 달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신체 부위에 한 줌의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달려나간 카이가 녀석의 힘줄을 정확하게 잘라버린 것이다.
파아아아아악!
변종 구울이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머리부터 바닥에 쳐박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녀석은 바닥에 쳐박히고도 10미터 가까이 앞으로 쓸려나갔다.
“키에에에엑! 아파! 아프다!”
비명을 내지르는 변종 구울.
하지만 그 비명은 머지않아 뚝 그치게 되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
“…….”
던전에서 치러진 첫 번째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파티원들은 침만 꿀꺽 삼키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그 중에서도 유하린과 설은영의 눈빛은 흔들리는 것을 넘어 복잡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배짱과 속도, 정교함. 3박자가 고루 갖추어진 말도 안 되는 기술이야.’
‘도망치는 변종 구울은 나도 따라잡을 수 있어. 하지만 달려가는 녀석의 팔 다리 힘줄을 정확하게 자르는 건 불가능해. 그것도 검을 딱 네 번만 휘두르다니…….’
두 눈으로 똑똑하게 봤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두 여인과 발터가 전율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마이클만이 기쁨의 웃음을 흘렸다.
“오우, 브로! 나 여기 아주 마음에 들어.”
그의 몸에서는 빛이 정확히 3번 뿜어져 나왔다.
고작 첫 번째 전투를 치렀을 뿐인데 레벨이 3개나 올라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