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64화 (264/441)

# 264

힐통령 264화

88장 타락의 성지(3)

성격이 불같은 플레이어라고 해도, 던전에서만큼은 제 성질을 한 수 접어야만 했다.

심지어 던전이 개미굴 형태라면 더더욱.

한 번의 실수는 소란으로 이어지고, 소란은 던전의 몬스터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으니까.

던전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 것.

그것은 던전에 입장하는 모든 플레이어가 지켜야 할 하나의 ‘규칙’이었다.

“이 던전 진짜 꿀인데?”

그것이 이유였다.

파티의 던전 공략 진행이 생각보다 느린 이유.

물론, 카이가 느끼기에 느리다는 것뿐.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빠른 속도였다.

쓰러지는 변종 구울을 쳐다보던 카이는 제법 거대한 공터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자리 좋네요. 여기서 잠시 휴식하죠.”

던전에 입장한 지도 세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처치한 몬스터들의 숫자는 서른 마리.

그들이 주는 경험치에 마이클은 물론이고, 발터까지 함박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많은 경험치를 주는데, 최초 발견 버프까지 걸린 상태였으니까.

‘유하린과 설은영도 레벨이 각각 하나씩 올랐고.’

유일하게 레벨이 오르지 않은 카이였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불만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휴식하는 일행들을 쳐다보던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제대로 공략해도 되겠어.’

사실 카이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마이클이 아니라, 그의 친구인 발터이었다.

‘탱커가 제 역할을 못 하면 던전 공략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만약 이것이 방송이 아닌 솔로 던전이었다면 카이가 다 해먹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 촬영하는 장면들은 훗날 방송 자료로 쓰이게 될 것이다.

자신의 패를 어느 정도 드러내겠다고는 했지만, 밑천까지 털어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발터의 레벨이 몇 개 오르면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던전에 입장할 때만 해도 불안하던 발터의 실력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단순히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상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은영. 역시 천화의 마스터다워.’

그녀는 파티의 탱커가 무너지면 답이 없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전장의 여왕이다.

그 때문인지 전투가 한 번 끝날 때마다, 짧게나마 발터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그것이 발터의 실력을 빠르게 상승시키는 주요 원인이었다.

위에서 당겨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이가 있다면, 당연히 오르막길을 쉽게 올라갈 수 있으니까.

“헤이 브로. 혹시 랭킹 1위가 알려주는 휴식 시 꿀팁 같은 게 있을까?”

휴식을 취하는 카이에게 다가온 마이클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그는 휴식 시간마다 일행들을 돌아다니며 짧게나마 인터뷰를 했다.

방송의 초점이 던전 공략이 아닌 예능에 맞춰진 만큼, 이런 식으로 분량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휴식할 때의 팁이라…… 글쎄요?”

카이는 인터뷰를 할 때만큼은 반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훗날 이 장면을 보게 될 시청자들이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었으니까.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그냥 음식들을 먹어주면서 체력과 스테미너를 보충해 주고, 전투로 인해 손상된 장비들을 수리해 주고. 지난 전투들을 떠올리며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닐까요.”

“오우,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팁을 알려줘서 고마워, 브로.”

마이클의 말장난에 카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캐치하는 마이클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그림 좀 나오겠는걸.’

언노운이라는 이름은 여태까지 경외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이 남자는 커리어를 쌓아나가며 점점 이름 값을 알리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견줄 자가 없는 세계적인 스타의 자리까지 발돋움 했으니까.

‘이번 예능에서 보여줘야 할 것은 브로의 인간미.’

그를 대중에게 더 친숙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마이클이 이번 촬영에 임하는 목표였다.

솔직히 무명에 가깝던 언노운을 이 자리까지 올려놓은데는 그도 상당량 기여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고, 그 끝을 함께 보고 싶었다.

“어? 버섯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육포를 뜯어 먹던 발터가 기묘한 색상의 버섯 하나를 뜯어내며 중얼거렸다.

“먹을 수 있는 건가?”

“내려놔.”

설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발터를 몇 번이나 가르치며 확고한 스승의 자리를 쟁취했고, 그보다 나이도 많았다.

당연히 발터는 그녀를 깍듯하게 모셨고, 그것이 그녀가 반말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였다.

“던전에서 채취한 음식들은 약사에게 확인을 받는 것이 먼저니까.”

“그야 누님 말씀이 맞지만…….”

발터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에서 발견되는 버섯이나 꽃 등은 가끔 스탯을 올려줄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아이템을 영약이라 불렀는데, 뜯어낸 즉시 먹어야 온전한 효율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것이 거대 길드에서 던전을 공략할 때 구태여 약사들을 데려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 랭킹 21위께서는 우선 확인을 받는게 중요하다 했는데, 과연 랭킹 2위는?”

마이클이 짓궃은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제 검을 손질하고있던 유하린은 돌발적인 질문에 제 어깨를 흠칫 떨었다.

“…….”

그녀는 칠흑의 갑옷과 함께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누가봐도 당황했다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돌아가던 그녀의 시선이 고정된 곳에는 카이가 있었다.

마이클이 실실 웃었다.

“호오. 브로를 쳐다보는데, 어때? 혹시 이런 걸 막 주워먹는게 브로가 강한 이유 아니야?”

그는 농담삼아 한 말이었지만, 카이는 이를 달리 받아들였다.

“글쎄. 내가 강한 이유는 이것 때문은 아니지만…….”

카이는 발터가 내려놓은 버섯에 손을 뻗었다.

“궁금하면 그냥 먹어보면 되지.”

중얼거린 카이는 망설이지 않고 버섯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자, 잠깐만요! 지금 뭐하시는…….”

“야!”

깜짝 놀란 설은영과 발터가 소리쳤지만, 카이의 표정은 평온했다.

질겅질겅.

잠시 버섯을 씹던 그는 잠시 후 이를 뱉어냈다.

“퉤. 이건 못 먹어.”

“으, 응……?”

마이클이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자, 카이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설명했다.

“이거 못 먹는다고. 독버섯이야. 독성이 강해. 별이 다섯 개나 있어.”

“오, 오 성짜리 독이 들어 있는 버섯!”

일행이 경악했다.

사실 그러한 반응은 당연했다.

과거 뮬딘 교가 만들어 세계수 루테리아를 중독시킨 ‘아카샤의 심판’이 7성짜리 독이었으니까.

일반 유저들 사이에서는 3성짜리 독만 되어도 제법 위험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브, 브로는 괜찮아? 멀쩡해 보이는데?”

마이클이 뜨악한 표정으로 질문하자 카이는 태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스페셜 칭호인 ‘포이즌 마스터’가 있거든. 모든 종류의 독에 대해 면역이야.”

“…….”

“…….”

그 대단한 능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카이의 모습에 일행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브로. 이 부분은 편집해 줄까?”

마이클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전력이 드러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는 어깨만 한 번 으쓱거렸다.

“굳이? 편한 대로 해.”

사실 모든 독에 면역이라는 것은 말해주더라도 카이에게 아무런 손해가 없었다.

게다가 ‘포이즌 마스터’가 지닌 진정한 능력은 면역 따위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독에 대한 정보를 해석할 수 있다는 거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는 넋이 나가 있는 일행을 향해 턱짓했다.

“이제 출발하죠?”

***

“발터, 던전 도는 거 어때?”

공략이 재개되자, 카이가 물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좀 불안했는데, 이제 제법 적응돼서 괜찮아. 자신 있어.”

발터가 의욕을 드러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이에 카이는 듣고 싶은 대답을 들었다는 듯, 만면에 활짝 미소를 피웠다.

“그래? 잘됐네.”

“뭐…… 가?”

잘되다니, 대체 뭐가?

친구의 밝은 얼굴을 보고 불안감을 느낀 발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카이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이런 굼벵이 같은 속도로 계속 공략해나갈 생각은 아니었지?”

“그, 그럴 생각이었는데…….”

“에이,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카이가 일행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공략 속도를 좀 높일게요. 이대로 가다가는 던전에 몇 주는 묶여 있을 것 같으니까.”

“찬성이에요. 길드 관리는 며칠만 밀려도 골치 아파지니까요.”

끄덕끄덕.

“어, 음…… 나야 뭐 브로 뜻대로.”

발터를 제외한 이들이 모두 찬성을 하자, 카이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자, 잠깐만! 뭘 시작해?”

덥석.

무의식적으로 카이가 뻗은 손을 붙잡은 발터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에 카이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손님이 왔는데 집주인이 마중 정도는 나오게 해야지.”

“너 설마……!”

“걱정 마. 넌 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친구를 안심시킨 카이의 주변에서 돌연 네 개의 마법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홀리 익스플로젼.”

찰나와 같은 캐스팅이 끝나고, 천장을 향해 네 개의 광선이 직행했다.

쿠구웅-!

돌무더기가 떨어지며 던전이 무너질 것처럼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우, 지저스. 성기사의 마법 주문이 무슨…… 웬만한 마법사 저리 가라네.”

마이클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비단 홀리 익스플로젼이 지닌 파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키에엑

-소리…… 소리다!

-침입자!

던전이 떠나갈 정도의 굉음을 한 번 내주자, 몬스터들이 곧장 반응했다.

“곧 시작될 거예요.”

카이가 공터의 반대쪽에 위치한 단 하나의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뒤쪽의 모든 굴은 깨끗하게 클리어한 상태.

‘던전이 얼마나 넓은지도 모르는데, 주야장천 느리게 돌 수는 없지.’

본인들이 찾아가기 귀찮다면, 불러오면 그만이다.

물론 카이의 이 정신 나간 행동에 발터는 울상을 지었다.

“이건 돌았어. 돌았다고!”

“인정합니다, 탱커 브로. This is insane! 미친 짓이예요.”

던전에서는 돌다리는 물론 멀쩡한 바닥마저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는 규칙.

그 틀에 박힌 규칙을 과감하게 때려 부수는 무식한 공략법!

이 세상에서 오직 언노운, 카이만이 할 수 있는 미친 짓이었다.

“오, 온다. 몬스터 웨이브 온다고!”

몬스터 웨이브(Monster Wave).

괴물들의 파도라고 불리는 이 단어는 이벤트 때나 볼 수 있는 단어였다.

‘그립네. 오크 로드 공략전이나 침공 이벤트 때 자주 들었는데.’

바꿔 말하면,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으면 들을 일이 없는 단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이는 몬스터 웨이브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그것도 본인이 개미굴을 다 도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키에에엑!”

“인간…… 인간이다!”

“먹잇감!”

“나약한 종족!”

파바바박.

다양한 레벨의 변종 구울들은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빠르게 달려왔다.

“발터. 정신 차려!”

카이는 반쯤 넋이 나간 친구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그, 그래도 이 미친놈아. 몬스터들 숫자가…….”

선발대로 도착한 변종 구울들의 숫자는 못해도 백여 마리는 되어 보였다.

그 정도의 숫자를 홀로 커버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발터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토닥토닥.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준 카이가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띠며 입술을 달싹였다.

“블레스. 헤이스트, 스트렝스.”

“음? 너 설마 사제 스킬 트리도 올렸냐? 그거 효율 굉장히 별로라고 들었…….”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발터는 버프들의 효과를 확인했다.

동시에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여졌다.

‘뭐, 뭐야, 이 미친 수치들은?’

휘몰이 길드 1군에 소속된 사제들조차 넘보지 못할 정도의 수치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설은영이었다.

그녀가 최근 영입한 랭커 사제의 버프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까.

유감스럽게도 카이의 버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히든 클래스 고유 스킬이다.”

태양의 축복, 태양의 갑옷이 사용되자, 발터의 장비들이 황금빛으로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쿠웅.

“솔라 필드.”

일행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나간 태양의 영역은 넓은 공터를 가득 메웠다.

“이번 전투에서 내 포지션은…….”

줄곧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오더만 내리던 카이가 앞으로 나섰다.

발터라는 단단한 방패.

좌측과 우측을 맡은 두 명의 자유로운 딜러들.

궁수인 마이클은 멀찍이 떨어져서 엄호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파티에서 가장 날카로운 송곳은, 자연스럽게 발터의 바로 뒷자리를 차지했다.

“스트라이커다.”

몬스터들의 물결이 일행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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