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힐통령 265화
89장 흡혈왕 데스몬드(1)
더 강한 몬스터에게 복종하는 것이 몬스터들의 생태계다.
특히 던전처럼 강력한 보스가 군림하는 장소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강력한 개체가 통솔하는 던전의 몬스터들은 필드의 몬스터들보다 더 조직적이니까.
허나 카이 일행을 향해 파도처럼 몰려드는 변종 구울은 조금 이상했다.
‘이 녀석들, 단결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대체 왜?’
그저 시뻘겋게 물든 눈을 한 채, 침을 뚝뚝 흘리면서 짐승처럼 달려들 뿐.
그 모습에서는 그 어떤 질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몬스터 웨이브라는 말에 더없이 어울리는 이들이 되었다.
인간을 먹기 위해 아군의 어깨와 머리를 짓밟으며 다가오는 녀석들은 마치 쓰나미 같았으니까.
“발터, 이거 버텨야 돼.”
카이가 말했다.
“젠장, 젠장!”
전방의 모든 시야가 변종 구울로 채워지는 심리적 압박감.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다리가 덜덜 떨려도 할 말 없을 그 상황에서.
발터는 인상을 왈칵 구기더니 고함쳤다.
“그래, 어디 한 번 와서 뚫어봐라, 이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아!”
쿠우우웅-!
다시 한 번 전개된 그의 마나 방벽은 공터를 정확히 이등분하며 일행을 보호했다.
그 위로, 변종 구울들의 몸통 박치기가 작렬했다.
끼리릭, 끼릭. 끼이이익!
변종 구울들의 손톱과 발톱이 마나 방벽을 긁으며 기괴한 소리를 퍼트렸다.
“크윽, 젠장!”
마치 손톱으로 칠판을 박박 긁는 듯한 듣기 싫은 소리.
하지만 다행히도 방벽은 긁기나 베기 같은 도검류 공격에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이유였다.
“키에에엑!”
“인간, 인간! 인간!”
“먹는다…… 맛있겠다!”
인공지능이 높기로 소문난 미드 온라인의 몬스터들이 공격 방식을 바꾼 이유.
그들은 자신들의 단단한 머리와, 어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쿠웅, 쿵. 쿠우웅!
방벽에 부딪친 머리에서 피가 흘러도, 어깨뼈가 바스라져도.
변종 구울들은 마치 통각을 상실한 놈들처럼 계속해서 방벽에 부딪쳐왔다.
“이, 이런 미친…… 방벽 내구도 살살 녹는다! 차라리 지금 차징으로 밀어버리는 게 나아!”
발터의 우는 소리에 카이는 방벽 너머의 변종 구울들을 차갑게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직이야. 좀 더 버텨.”
“젠장, 몬스터 수가 몇 마리인데! 보통 상황에서라면 탱커가 세 명은 필요하다고!”
“그래도 안 돼. 아직이야…… 좀만 더 버텨봐.”
“크으으윽……!”
발터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두 다리와 방패를 바닥에 철심처럼 박아 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꾸준히 뒤로 밀려났다.
쿠웅, 쿠우웅! 쿠우웅!
마치 공성전에서 성문을 박살내는 역할을 하는 파성추처럼.
변종 구울들의 박치기와 숄더 차징은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카이는 기다리라는 말만 기계처럼 반복했다.
“카이! 이건 내가 봐도 지금 당장 차징으로 밀어내고 정리를…….”
“아직이에요! 좀만 더 기다리세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발터를 보다 못한 설은영이 입을 열었지만, 카이는 완강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그가 애타도록 기다리는 것은 단 하나의 타이밍.
눈앞에 위치한 변종 구울들의 탑을 쓰러트릴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녹색빛으로 물든 카이의 눈이 무언가를 목격했다.
“키르륵?”
“앞이 막…… 혔다…….”
“빨리빨리 비켜라! 나도 인간을 먹고 싶어!”
공터의 반대쪽.
단 하나만이 위치한 입구.
그곳을 통해 꾸준히 유입되던 변종 구울들의 발걸음이 뚝 멈춰버렸다.
‘됐다.’
발터가 열심히 버텨준 덕분에, 공터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뺵빽하게 변종 구울들이 들어선 상태였다.
그 수만 물경 1,000마리.
카이는 기괴한 소리를 질러대는 변종 구울들의 탑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지금이야! 밀어버려!”
턱, 턱, 턱.
설은영과 유하린, 카이는 곧장 발터의 등에 손을 얹고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동료들의 도움을 받은 발터가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며 한 발자국을 땅에서 떼었다.
부들부들.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르고 허공에서 덜덜 떨리는 발터의 발.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발터의 입에서 공터가 떠나갈듯이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동시에 허공에 정체되어 있던 그의 다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어졌다.
처음 한 번이 어려울 뿐.
탄력을 받은 발터가 무소처럼 앞을 향해 전진했다.
“방벽 강타!”
우우우웅.
마나로 이루어진 푸른 방벽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방벽을 향해 연신 공격을 가하던 변종 구울들을 불도저처럼 밀어내기 시작했다.
발터의 힘이 부친다 싶으면, 카이가 뒤에서 검을 휘둘러 검풍을 쏘아내 지원했다.
그 결과.
“끼, 끼에엑!”
“모, 몸이 꼈다!”
“뒤로 빠져! 뒤로 빠져!”
“고, 공간이…… 공간이 없다! 캬아아악!”
“통로가 너무 좁다!”
인간을 먹겠다는 탐욕 하나로 협소한 공간에 빽빽이 들어선 변종 구울들.
그들이 공터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기껏해야 하나 달린 통로는 변종 구울 두 마리가 지나가면 딱 알맞은 크기.
발터의 방벽 강타를 통해 밀려난 녀석들이 그 통로를 그대로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수고했어. 정말 수고했어.”
카이가 발터의 어깨 갑주를 퉁퉁 두드렸다.
발터는 그 짧은 시간에 2주 정도는 늙은 것 같은 표정으로, 카이를 쳐다보았다.
‘카이…… 이 녀석이 그리고 있던 작전이 이거였나?’
‘과연. 앞서 몇 번 상대해본 변종 구울들의 주특기는 빠른 속도와 긴 손톱을 이용한 할퀴기 공격이었어.’
‘이 넓은 공터를 이 등분해 버리고, 나머지 절반은 변종 구울들로 가득 채워서…… 적들의 공격 수단과 회피 수단.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어요.’
카이가 불러일으킨 몬스터 웨이브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원기 회복의 샘.”
발터의 뒤쪽에 원기 회복의 샘을 네 개나 설치해 준 카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죠.”
말을 짧게 뱉어낸 카이는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허나, 그가 시작한 것은 사냥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학살일 뿐.
서걱, 서걱!
카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변종 구울들의 팔과 다리.
혹은 목 따위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그들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피할 수 있는 공간 따위는 없었다.
그것은 유하린과 설은영도 마찬가지였다.
콰드득, 서걱, 핏, 핏!
그녀들은 저항을 못하는 변종 구울들을 바라보며 아낌없이 솜씨를 뽐냈다.
세 사람의 공격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화려하게 변종 구울들의 수를 줄여나갔다.
덕분에 공터에서는 연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빠암, 빠암, 빠암!
“오우, 지저스! 미드 온라인이 이렇게 즐거운 게임이었습니까? 파안~타아스티익!”
마이클의 몸에서는 대략 2초에 한 번 꼴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은 발터의 몸에서는 대략 20초에 한 번 꼴로 빛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광란의 레벨 업!
‘이거, 경험치 쏠쏠한데?’
심지어 파티에서 레벨이 제일 높은 카이조차 그 짧은 시간에 2개의 레벨이 올랐을 정도였다.
공터를 가득 메운 1,000마리의 변종 구울들.
그들이 모두 정리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23분 남짓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발터가 들고 있던 방패가 부르르 떨렸다.
불과 몇 시간 전에 287레벨이었던 그는 현재 318레벨의 랭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 실화인가?’
투구를 벗고 뺨을 때려봤지만, 통각 시스템은 멀쩡히 작용했다.
즉, 꿈이 아니라는 소리.
‘하지만 이것조차도…….’
발터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31레벨 업.
그것은 분명 경이적인 레벨 업 속도였지만, 마이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이클은 177레벨에서 242레벨로 무려 65개의 레벨을 올리는 기염을 토해냈으니까.
심지어 설은영의 경우엔 322에서 335로.
유하린은 357레벨에서 네 개의 레벨을 올려 361레벨을 달성했다.
“휴, 깔끔하네.”
공터 바닥에는 변종 구울들이 남긴 무수한 전리품들이 반짝였다.
카이는 유유자적 그것들을 주으며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발터가 소리를 질렀다.
“야! 왜, 왜 이렇게 태연해? 좀 더 그…… 뭐랄까. 기뻐해도 되잖아?”
“응? 내가 왜?”
“그야…… 너도 레벨이 두 개나 올랐잖아.”
“2등에서 1등 된 것도 아니고. 현상 유지인데 뭘.”
“……너, 설마 평소에도 이렇게 사냥하고 다니냐?”
“뭐, 비슷하지.”
미소를 지으며 애매한 말을 뱉어내는 카이.
그 모습을 쳐다보는 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레벨 업 속도가 너무 빨라서 버그 플레이어라고 몰리던 이유가 있었네.’
‘상식을 송두리째 갈아엎는 비정상적인 플레이…… 직접 겪고도 믿을 수 없어.’
카이가 어떻게 무수한 랭커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1위라는 왕좌에 앉을 수 있었는지를.
그것은 단순히 히든 클래스를 운운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볼 때 카이는 기존에 존재하는 ‘규칙.’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고, 파괴하는 ‘룰 브레이커’ 그 자체였으니까.
“자, 그런데 나머지 놈들은 안 들어오나?”
카이가 공터의 입구를 쳐다봤다.
그곳에는 처음에 공터로 들어오지 못한 변종 구울들의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공터로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키, 키에엑. 미친 인간이다.’
‘키에엑, 또라이 같은 인간이다.’
‘들어가면 죽는다!’
몬스터들이 강자의 말을 듣는 이유는 간단하다.
거역하면 죽으니까.
그들은 죽음에 민감한 존재들이었고, 들어가면 죽는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한 상태였다.
하지만 녀석들의 뒤쪽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욱, 촤아아악!
마치 북을 잡아 뜯고, 물감을 잔뜩 묻힌 붓을 사방으로 휘두르는 듯한 소리.
“키, 키에엑!”
“샤르단 님이다!”
변종 구울들이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앞과 뒤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들의 뒤에서 거대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들어가라. 들어가서 모험가들의 피와 살을 뜯어먹어라! 겁쟁이들은 내 손에 죽는다!”
‘저놈이 보스인가.’
카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집을 좀 어질러놨더니, 집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나왔기 때문이다.
“보스예요.”
설은영이 공터로 들어서는, 다른 구울들보다 키가 2배 정도 큰 근육질의 구울을 보며 말했다.
“레벨 390이라…… 일찌감치 말하지만, 나 저거 못 막는다.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진짜 못해.”
발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포기를 선언했다.
그것은 그의 의지가 나약해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캐릭터가 지니고 있는 스펙이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걱정 마. 나도 그 정도 상식은 있으니까.”
“얼씨구, 너한테 그런 게 있었어?”
발터가 코웃음을 치며 방패를 들어올렸다.
“내가 저 보스 녀석들은 못 맡아주지만. 잡몹들 데리고 늘어질 수는 있어.”
“오케이. 설은영 씨, 발터와 함께 변종 구울들을 상대해 주세요.”
“……알겠어요.”
설은영은 잠시 유하린과 보스 몬스터, 샤르단을 쳐다보더니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발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보스를 상대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하린 씨는 저와 함께 저 녀석을 공략합니다.”
끄덕끄덕.
한 명의 스트라이커와 한 명의 윙어가 동시에 바닥을 박찼다.
“도발!”
동시에 발터는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끌며 후방으로 빠졌다.
‘샤르단. 부패한 시체들의 왕.’
녀석의 손끝에 달린 거무튀튀한 손톱을 보는 순간, 알림이 떠올랐다.
띠링!
[포이즌 마스터 스킬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분석 중…….]
[독에 대한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시독屍毒]
등급 : 유니크
죽음을 거스르고 오랜 시간 인간을 먹어치운 구울들의 왕, 샤르단의 손톱이 내포한 독입니다.
피부를 스치기만 해도 중독이 되며, 중독된 상태에서는 체력이 매우 빠른 속도로 줄어듭니다.
희귀도 : ★★★★
독성 : ★★★★★
‘독이라.’
확실히 위협적인 독이다.
만약 상대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게다가 약점도 명확하고.’
카이는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성검을 소환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스위칭.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미천한 인간들이 발을 들일 장소가 아니…….”
“파이널 어택.”
상대방의 방어를 무시해 버리는 일격 필살의 스킬.
그것이 노린 것은 샤르단의 머리나 심장 따위가 아니었다.
콰드드득!
“으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샤르단의 팔에 붙어 있던 손목 두 개가, 허공에 날아올랐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는 샤르단.
카이는 그 표정을 감상하며 유하린에게 명령했다.
“공격하세요.”
날쌘 벼락처럼 튀어나간 유하린의 검은, 그대로 샤르단의 심장을 뚫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