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
힐통령 270화
89장 흡혈왕 데스몬드(6)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좋은 장비들?
강력한 병사들?
혹은 걸출한 지도자?
무엇 하나 뺄 것 없이 전쟁을 치를 때 중요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좋은 장비, 강력한 병사들, 걸출한 지도자.
그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유추해보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온다.
바로 ‘사기’.
적들은 압도적인 장비로 무장한 상대를 보면 절로 위축될 것이다.
적들은 포효하는 강력한 병사들을 마주할 때도 위축될 것이다.
하물며 걸출한 지도자는,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에 들기 전까지 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의 사기를 낮추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카이가 일으킨 전쟁의 시작은 100점 만점에 100점을 줘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크아아아악!”
“숨…… 숨이!”
한 마리의 와이번이 뱀파이어의 성채 안에서 독연을 흩뿌리고 있었다.
성채 내부는 이미 푸른색 연기로 뒤덮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
초원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뱀파이어 놈들의 머릿속이야 뻔하지.’
단 하나의 생각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바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
뱀파이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영생을 택했고, 저주를 받은 이들이다.
제 목숨을 끔찍히 아끼는 놈들이니 생존 본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터.
‘하지만 이미 늦었어.’
독 안개로 가득 찬 도시.
그 상황에서 헬 파이어에 불타오른 건물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화염과 독성을 품은 가스성 안개의 만남.
그것은 곧 연쇄 폭발로 이어졌다.
펑- 퍼퍼퍼퍼펑!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은 경쾌한 소리가 흑색 성채 안에서 꾸준히 들려왔다.
동시에 일행들의 경험치도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4,217,196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4,331,257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4,198,625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제대로 된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선을 확실하게 제압한 카이.
곧이어 굳게 닫혀있던 흑색 성채의 문이 열렸다.
“크아아악!”
“허억, 허억!”
그곳에서 밀려나온 건 침입자들을 맞이하는 정예 병사들이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해 도망친 패잔병들 뿐.
혼란에 빠진 적들을 바라보던 카이가 손을 들었다.
“아군을 보호하소서. 천사들의 찬가!”
성의 니케에서 번쩍!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머리 위를 아기 천사들이 떠다니며 호른을 불어댔다.
띠링!
[천사들이 낭송하는 찬가를 들었습니다.]
[받는 물리 피해가 30% 감소합니다.]
[받는 마법 피해가 30% 감소합니다.]
[모든 상태 이상 저항력이 40% 증가합니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사냥 준비가 끝난 이에게 필요한 것은 적들을 물어뜯는 행위뿐.
카이는 아무 말 없이 한쪽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는 아군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응원이나 축복, 하다못해 전진하라는 말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듀라한들은 카이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군단.
굳이 입 밖으로 명령을 내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철그럭, 철그럭.
전진하는 듀라한들의 갑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울림을 내며 초원을 가득 채웠다.
“으, 으으으……?”
“뭐냐!”
“감히 더럽고 수준 낮은 듀라한 주제에…….”
뱀파이어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언데드 군단을 사납게 노려봤다.
독에 중독당한 그들은 고통스러웠고, 그 고통에 대한 화풀이를 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듀라한은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기껏해야 듀라한…….’
‘우리 같은 고귀한 밤의 귀족들에게 이빨을 드러낼 위치는 아니지.’
그들은 자신감 넘치게 듀라한들에게 달려들었다.
까아앙-!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듀, 듀라한이 나의 공격을 막는다고?”
“이 벌레 같은 놈들이 어떻게 내 공격을 피하는거지?”
눈앞의 듀라한들은, 그들이 알고있던 존재들이 아니었으니까.
학살이 시작되었다.
서걱, 서걱!
텅, 터-엉!
카이에게 지급받은 최고급의 검.
듀라한들은 그것을 들고 뱀파이어의 심장을 갈랐고, 머리를 베었다.
“끄, 끄아아악-!”
“뒤, 뒤로! 뒤로 후퇴해라!”
“멍청한 녀석들! 죽기 싫으면 듀라한 놈들을 쓰러트려! 뒤는 이미 지옥이라고!”
“끄윽…… 듀라한 새끼들, 육체가 없으니 흡혈을 할 수도 없어!”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는 차가운 눈으로 전장을 주시했다.
‘현재 상황만 보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이지만…….’
전선에 나와 있는 적들은 뱀파이어 병사와 기사들이 유일했다.
‘좀 더 상위 개체들은 어디있지?’
그에 대한 의문은 즉시 해소되었다.
띠링!
[미믹이 역소환되었습니다.]
뜬금없는 미믹의 사망 알림.
카이의 눈이 빛났다.
‘그렇군. 상위 개체들은 푸른 역병과 그 대폭발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거야.’
미믹의 죽음을 통해 유추한 사실이었다.
그야 상위 개체들은 허둥지둥 도망을 나오지도 않았고, 아직도 도시 안에 머무르면서 차분하게 미믹을 처치했으니까.
‘고작 이런 일로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엉덩이가 무겁다 이건가.’
큰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봐줄 이유가 사라졌어.”
상대방은 도시 밖에서는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이쪽도 굳이 성문을 포위하기 위해 전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
카이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동시에 듀라한 군단이 선보이는 움직임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뭐, 뭐야!”
“이 녀석들, 갑자기 더 빠르고 강해졌어!”
“힘을 숨기고 있었나?!”
“듀, 듀라한 주제에…… 끄아악!”
50마리의 듀라한들은 귀신같은 몸놀림을 선보이며 하급 뱀파이어들을 무자비하게 썰어 넘기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는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쉽다. 상급 뱀파이어들이 밖으로 도망쳐나오면 일망타진 할 수 있었는데.’
뱀파이어들은 교활하다.
카이는 그들과 13번의 전투를 치루면 그 사실을 머리로, 피부로 똑똑히 기억했다.
때문에 듀라한들의 힘을 일부러 제한했다.
그래야 상대가 안심할 테니까.
안심을 해야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고,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릴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겁이 많을 줄은 몰랐네.’
자칭 밤의 귀족들이라는 이들의 좁쌀만 한 담력을 한껏 비웃어준 카이는 천천히 성문으로 걸었다.
이미 성문 앞을 가득 메우고 있던 뱀파이어들은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된 후였다.
그를 반긴 것은 양쪽에 도열한 채 자신을 맞이하는 듀라한들.
그리고 뱀파이어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해대던, 순혈이 만들어낸 붉은색 카펫뿐이었다.
차박, 차박.
카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 웅덩이를 걸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못했다.
카이가 걸어 나가자, 그의 뒤로 듀라한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덜그럭, 덜그럭.
*휘하의 언데드가 적을 처치하면, 대상은 스켈레톤이 되어 시전자를 따릅니다.
나이트 오브 나이트메어에 기재된 또 하나의 효과가 발동했다.
쓰러진 뱀파이어들은 스켈레톤이 되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듀라한들에게서 퍼져나간 핏빛 기운, 군단의 심장은 그들 또한 강화시켰다.
‘이제야 좀 군단 같네.’
이제 휘하의 언데드만 무려 300.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카이는 망설임 없이 성문을 넘어갔다.
동시에 강렬한 회전을 머금은 창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카아아앙-!
듀라한 기사 하나가 튀어나와 이를 완벽히 차단했다.
물론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투창 공격을 막아낸 대가로 팔은 걸레짝이 되어 덜렁거렸으니까.
‘일격에 듀라한의 팔을 거덜 낼 정도의 공격력이라?’
카이가 웃었다.
‘드디어 나왔구나.’
상위 개체의 공격이 분명했다.
“햇살의 따스함.”
황금빛에 물든 듀라한의 팔은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빠르게 재생되었다.
“…….”
카이는 도시의 건물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푸른 역병이 만들어낸 안개는 대폭발을 일으키며 대부분 사라진 상태였고, 덕분에 도시를 살피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숨어 있네.”
누가 박쥐 새끼들 아니랄까 봐.
카이는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정면에서 보이는 거대한 저택.
‘저곳이 데스몬드인지 뭔지 하는 놈이 사는 저택이겠지.’
뱀파이어들이 그토록 찬양을 해대던, 뱀파이어의 왕.
우뚝.
한참을 걸어 폐허가 된 광장에 들어선 카이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 속에서 수십 개의 안광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기다렸구나.”
자신이 아군의 기세를 높이기 위해 유리한 전장에서 싸웠듯이.
뱀파이어들도 본인들에게 유리한 전장을 고른 것이다.
불타버린 건물들의 위.
혹은 무너진 기둥의 뒤에서.
100마리의 뱀파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
카이가 그들의 면면을 훑었다.
뱀파이어 병사, 기사와는 다르게 기품이 깃들어 있는 화려한 의복과 망토를 걸친 이들이었다.
‘뱀파이어 귀족이라.’
확실히 귀족이라 칭할 만큼 레벨이 높았다.
평균 400레벨이었으니, 야간 버프와 보름달 버프를 받으면 대략 500레벨 후반 정도.
그들은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다.”
“감히 데스몬드 님이 다스리는 권역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뱀파이어 병사와 기사들을 물리쳤다고 큰 착각에 빠졌군.”
“모두 죽여라!”
뱀파이어 귀족들이 달려들었다.
이에 카이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동시에 그를 따르던 언데드들이 성난 파도처럼 사방팔방을 향해 쏘아졌다.
그들은 제각각 한, 두명의 뱀파이어 귀족들에게 달려들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뭐, 뭣?!”
“잔머리를 굴리다니!”
“젠장, 듀라한들은 무시해! 저 모험가부터 죽여라!”
“현명한 선택은 아닌데.”
자신의 군단 앞에서 한눈을 판다?
그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크아아악!”
“뭐, 뭐냐 이 듀라한들은!”
“하다못해 스켈레톤까지…… 우리가 알고있던 수준이 아니다!”
그들은 앞서 병사와 기사들이 느꼈던 심정을 똑같이 느꼈다.
‘내가 굳이 어울려 줄 필요는 없지.’
카이는 빠르게 바닥을 박차고 저택을 향해 뛰었다.
물론 언데드들의 군단은 뱀파이어 귀족들을 100% 막아내지는 못했다.
“잡았다!”
포위망을 빠져나온 귀족 하나가 카이의 사제복을 뒤에서 잡아당겼다.
“크하하하! 적군의 지휘관을 잡았다! 듀라한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모험가 쯤은…….”
“못 이겨.”
돌연 팽이처럼 몸을 돌린 카이의 손에는 성검이 쥐어져있었다.
카이는 그 검을 그대로 위로 그어올렸다.
사타구니에서 정수리까지.
밝게 빛나는 선 하나가 뱀파이어 귀족의 몸에 새겨졌다.
“끄, 끄아아악! 아파! 아파!”
“아프겠지. 네 놈들이 싫어하는 태양의 힘이 깃들어 있으니.”
카이는 들어올린 성검을, 이번에는 밑으로 내리그었다.
스거어억!
징그러운 소리와 함께 뱀파이어의 머리에서 피분수가 터져나왔다.
“아, 앞이 안 보여!”
뱀파이어 귀족이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을 꼬나쥔 카이가 춤을 췄다.
서걱, 서걱, 서걱!
녀석의 팔 다리 힘줄이 잘리는 데에는 불과 2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일말의 군더더기도 없는, 스테미너를 극한으로 절약하는 형태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카이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추적하는 빛의 화살.”
파밧, 파바밧!
수백 개의 신성 화살이 쓰러진 뱀파이어 귀족의 몸에 빼곡히 들어섰다.
콰드득.
카이는 비명조차 내지 못하는 녀석의 머리통을 밟으며, 자신을 포위한 소수의 뱀파이어 귀족들을 스윽 둘러봤다.
“죽고 싶은 녀석 먼저 덤벼라.”
“…….”
“…….”
뱀파이어 귀족들은 카이의 발치에서 벌레처럼 경련하는 동료를 쳐다보다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을 목격한 카이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저택 쪽으로 걸어 나갔다.
추격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