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힐통령 271화
89장 흡혈왕 데스몬드(7)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
설은영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에 발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에이, 굳이 우리가 안 가도 될 것 같은데요? 아까 전력 보니까 카이 혼자서도 다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던데요, 뭘.”
“확실히 아까의 전투만 보면 확실히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이겠지. 하지만 그중에는 뱀파이어 상위 개체가 단 한 마리도 없었어.”
“……아!?”
설은영의 설명에 무언가를 깨달은 발터가 돌연 비명을 뱉어냈다.
“젠장, 그럼 상위 개체는 그 독과 폭발에도 견딘 녀석들이라는 소리잖아요?”
“그게 문제지. 카이 님이 지휘하는 언데드의 군단은 분명 적으로 마주하기 싫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뱀파이어 상위 개체도 강하겠죠.”
“게다가 뱀파이어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데스몬드까지 염두에 둬야해.”
“그럼 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발터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빨리 카이를 도와주러 가야죠.”
“음. 솔직히 난 브로가 잘할 거라고 생각해서 걱정되지는 않지만, 대체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기대되니 가겠어.”
“유하린 씨는?”
설은영의 질문에, 그녀는 말없이 장비를 챙기는 것으로 대답했다.
서둘러 성채로 들어선 일행은 도시를 가득 메우는 죽음의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채앵…… 챙……!
멀리서 들리는 병장기 소리.
“저쪽입니다!”
발터가 방패를 들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제 이 건물만 지나면 나와.’
이미 가까워질 대로 가까워진 소리.
발터는 건물의 코너를 도는 것과 동시에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야, 인마! 친구 좋다는게 뭐냐! 내가 몸소 도와주러 오셨…….”
콰드득, 콰득!
수백 마리의 뱀파이어와 듀라한, 스켈레톤이 한데 섞여 싸우는 압도적인 광경을 목격한 발터는 스르륵 팔을 내렸다.
쿠우우웅!
듀라한이 자신의 머리통으로 뱀파이어의 턱을 쳐올린 뒤, 눈에다가 검을 박아넣었다.
“끄어억!”
물론 뱀파이어 귀족도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우그그극!
손을 뻗어 듀라한의 팔을 그대로 잡아뜯어 냈으니까.
흡혈을 할 수 없게 된 뱀파이어와, 회복을 못하는 듀라한.
그들의 싸움은 자연스레 소모전으로 돌입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발터를 비롯한 인간의 등장은 대번에 전투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 인간이다…….”
“피다!”
“이제 흡혈을 할 수 있어!”
해골과 갑옷 군단을 상대하던 뱀파이어 귀족들의 눈이 돌아갔다.
“으, 음. 불길한 기분이 드는걸.”
발터의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뱀파이어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달라붙은 거머리 같은 듀라한들을 떼어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흡혈을 해야 한다!”
“피를, 피를 원해!”
“으으…… 젠장! 괜히 탱커로 전직해서!”
인상을 구기며 울상을 지은 발터의 방패가 그의 정면을 가로막았다.
높은 어그로 수치 때문인지 모든 뱀파이어 귀족들은 일차적으로 발터만을 노렸다.
촤드드득!
뱀파이어의 손톱 공격 한 번에 발터의 방패는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순식간에 몸을 보호할 수단을 상실한 발터.
“아, 아니, 저거 아직 할부금도 못 갚은 건데…….”
그의 멍청한 목소리에 설은영은 가만히 광장을 둘러봤다.
‘남아있는 듀라한은 35마리. 스켈레톤이 104마리. 반면에 뱀파이어 귀족들은…….’
총 62마리.
계속해서 싸운다면 언데드 군단의 전멸이 확실한 상황.
‘언노운은?’
광장 이곳저곳을 둘러봤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친구 창도 확인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망하지는 않은 상태.
‘그렇다면 데스몬드를 상대하러 간 거야.’
자신들을 도와줄 형편은 안 된다는 뜻이었다.
“유하린 씨.”
설은영의 질문에 유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묻지 않았지만, 지금은 솔직히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유하린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두 분 분위기 잡는 건 좋은데 빨리 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다가오는 뱀파이어 귀족들을 견제하던 발터가 비명을 질렀다.
이를 무시한 설은영이 말을 이었다.
“유하린 씨. 저는 지금부터 이 불리한 전장을 뒤집을 전술을 짜기 시작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아군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말인데, 직업을 알려줄 수 있나요?”
“…….”
유하린의 직업.
미드 온라인이 출시된 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오우. 이쪽 그림도 제법…….”
마이클이 그 와중에도 몸을 움직여 설은영과 유하린의 구도를 멋있게 잡아냈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유하린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좋아요.”
옥구슬처럼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가 던전에 들어온 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말을 하는 순간.
“유, 유하린 씨가 말을 하다니. 궁금하잖아! 끄으으, 보고 싶은데……!”
동시에 대중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공개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이클과 설은영의 시선이 유하린의 입 끝으로 모여들었다.
“전…… 아직 직업이 없어요.”
부끄러운지 한쪽 손으로 볼을 감싸며 중얼거리는 유하린.
그녀의 말에 설은영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직업이…… 없으시다고요?”
“네에…… 전직을 안 했어요.”
“…….”
할 말을 잃은 설은영이 입만 뻥긋거렸다.
‘지금까지 전력 노출을 피하기 위해 스킬을 사용하던 게 아니었어?’
설마 그게 전직을 하지 못해서 직업 전용 스킬이 없었던 것뿐이라니!
설은영은 복잡해진 머리를 감싸며 재차 질문했다.
“끄응…… 그럼 지금 초보자신 거죠?”
“네.”
“좋아요, 머리 아프니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나 죽는다고요!”
발터가 꽥 비명을 질렀다.
뱀파이어 귀족들의 날카로운 송곳니는 달빛을 반사하며 그의 목덜미를 노리는 중이었다.
“……일단 저 녀석부터 구하죠.”
“네.”
대답과 함께 튀어나간 유하린의 검이 달빛과 함께 적들을 갈랐다.
“크윽! 계집 따위가!”
불시의 기습에 화가 난 뱀파이어 귀족 하나가 유하린을 공격했다.
동시에 유하린의 눈이 반짝였다.
‘3, 2…… 1!’
녀석이 다가오는 속도.
그것을 정확히 계산한 그녀는 뒤로 물러나며 왼쪽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다리는 그대로 뱀파이어의 턱을 강타했다.
콰드득!
“컥!”
뱀파이어 귀족이 이마를 짚으며 어지러움을 느끼는 순간, 유하린의 검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푹! 푹! 푹!
뱀파이어의 심장.
같은 장소를 연속으로 세 번 찌른 유하린은 그대로 검을 뒤쪽으로 휘둘렀다.
“크아아악!”
뒤에서 그녀를 덮치던 뱀파이어 하나가 얼굴을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났다.
녀석의 손바닥에서는 연신 붉은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기까지! 이제 빠지세요!”
유하린이 마무리를 하기 전, 설은영이 그녀를 불러들였다.
“끝낼 수 있었어요.”
두말없이 돌아온 유하린은 약간의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에 설은영은 웃었다.
“하지만 저희 손으로 죽이면 안 돼요.”
콰드드득!
듀라한의 손에 들린 단단한 머리통은 뱀파이어 귀족들을 내려찍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동시에 시체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강력한 스켈레톤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싸움, 이길 수 없어요.”
레벨에서부터 너무 큰 차이가 나기에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몰살당할 수도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버티는 것 뿐.
‘저 맹공을 버티기 위해선 총알 받이가 필요해.’
이미 성문에서의 전투를 보고.
듀라한이 적을 죽이면 스켈레톤이 생성된다는 것을 알아챈 설은영이었다.
“저희는 지금부터 방어에 전념합니다. 그러다가 방심하는 녀석이 나타나면 놈을 죽여서 새로운 스켈레톤으로 만들 거예요.”
주변을 둘러싸는 뱀파이어 귀족들을 쳐다보던 설은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
끼이이익.
대저택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저벅, 저벅.
방문자가 홀로 들어서자, 돌연 뒷쪽의 문이 쾅! 소리와 함께 닫혔다.
내부는 캄캄했다.
오직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만이 유일한 불빛.
하지만 남자는 불을 켤 생각도 없이,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님을 향한 예의범절이 엉망이네. 귀족 맞아?”
“불청객에게까지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지.”
2층.
어둠에 잠긴 공간에서 묵직한 음성이 날아왔다.
“하긴, 내가 왜 왔는지도 알지?”
“알다마다. 기다렸다. 그대가 오지 않았다면 내가 찾아갈 생각이었지.”
“그럼 얌전히 기다릴걸 그랬네.”
“큭.”
웃음을 터뜨린 저택의 주인은 천천히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혼자 방문한 용기는 칭찬해 주마.”
촤아아아악!
마침내 1층으로 내려온 저택의 주인이 양 팔을 쫘악 펼쳤다.
동시에 저택의 모든 불빛이 환하게 켜졌다.
170㎝의 신장.
마치 여자처럼 고운 선을 지닌 아름다운 얼굴.
날개뼈에서 돋아난 두 장의 거대한 박쥐 형태의 날개.
고급스러운 원단의 예복으로 숨기고있어도 티가 나는, 극한까지 단련된 전사의 몸.
[흡혈왕 데스몬드 LV.600]
“……높네.”
저택 주인의 늠름한 모습에 방문자, 카이가 중얼거렸다.
‘정말 높아.’
야간 버프와 종족 버프를 합치면 800레벨이 넘어가는 괴물이다.
‘지르칸보다 강하겠지.’
강하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데스몬드는 적을 눈앞에 두고도 눈을 감고있었다.
프스스스.
카이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흡혈왕. 레이드급 보스 몬스터.’
아오사, 자탄과 동일한 등급이다.
하지만 카이는 앞선 두 번의 전투 때도 하지 않았던 긴장을 했다.
‘인간형은 처음인가.’
아오사와 자탄의 덩치는 크다.
때문에 속도에 자신만 있다면,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충분히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데스몬드는 다르다.
‘생각보다 키가 작아.’
그만큼 날렵하다는 소리일터.
카이는 평소보다 약간 더 자세를 낮췄다.
“성검 소환.”
성검을 쥐고, 온갖 버프가 순서대로 시전되며 카이의 몸을 축복했다.
‘눈을 감고 있을 때 치명타를 먹이고 시작한다.’
카이가 달려나갈 준비를 마치는 순간.
“흠. 위험한 냄새가 나는군.”
데스몬드가 싱긋 웃었다.
‘웃어?’
카이가 그 웃음의 의미를 해석하려던 찰나.
파아악!
천장에 달려 있던 샹들리에가 터져나가고, 스탠드들이 그대로 폭발했다.
동시에 저택은 다시 어둠에 물들었다.
“이런!”
밝은 곳에 적응되어 있던 카이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암전되었다.
‘설마 눈을 감고 있던 이유가?!’
당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라 매의 목격자 효과도 도움이 안 되는 상황.
“하하하하하! 미개한 인간 따위는 생각해낼 수 없는 기발한 작전이지.”
기분 좋게 웃어보인 데스몬드는 그대로 카이에게 달려들었다.
꽈아악!
그는 순식간에 카이의 목덜미를 잡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크윽!”
벌레 같은 인간의 비명이 들려왔다.
‘음. 역시 인간의 비명은 좋군.'
그에게 인간의 비명은 클래식과 같았다.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명반처럼, 몇백, 몇천 번을 들어도 질리는 일이 없었으니까.
쩌저적.
데스몬드가 입을 벌리자 흉악한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그는 카이의 몸을 단단히 고정시킨 뒤,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기 위해 몸을 숙였다.
’……음?’
그가 이상한 것을 목격한 것은 그때였다.
’이 인간, 왜 눈을 감고 있는 거지?‘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뜬 채, 이 어둠에 1초라도 빨리 적응하려고 할 테니까.
그가 간과한 것은, 카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따악, 따악.
카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데스몬드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카이가 빙그레 웃었다.
“업그레이드, 신성한 빛.”
파아아아앗!
저택 내부를 밝게 물들이는, 강렬한 섬광이 그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