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힐통령 272화
89장 흡혈왕 데스몬드(8)
“크으윽, 젠장, 젠장!”
데스몬드가 자신의 두 눈을 감싼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툭툭.
먼지를 털고 여유롭게 일어난 카이는 신성한 빛을 천장으로 올려보냈다.
“음. 밝기 좋고.”
그는 밝아진 저택의 내부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집 좀 밝게 해놓고 살아라. 커튼도 좀 걷고.”
카이가 검을 살짝 휘두르자 검풍이 쏘아지며 커튼이 잘려나갔다.
“네가 무슨 어둠의 자식도 아니…… 아, 맞구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말버릇을 입에 담던 카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 비열한 인간 놈! 이런 식의 기습을 감행하다니!”
업그레이드 스킬로 강화가 된 신성한 빛은 그 밝기가 좀 강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카이조차 눈앞이 조금 어지러울 정도.
그야말로 섬광탄에 버금가는 위력이었다.
‘음. 이걸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봤다면…… 어휴.’
이를 상상조차 하기 싫던 카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말을 똑바로 해야지. 이 아름다운 작전은 너한테 배운 건데.”
“끄으윽…….”
할 말이 없어진 데스몬드는 억지로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웅, 붕.
마치 봉사처럼 제 앞을 휘적거리는 두 팔.
콰드득!
카이는 망설임 없이 성검을 휘둘러 데스몬드의 두꺼운 가슴을 갈랐다.
“크으윽……!”
그 공격으로 카이의 위치를 파악한 데스몬드가 손을 뻗었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핏빛 회오리가 몰아쳤다.
“음!”
살짝 긁힌 것만으로도 체력의 12%가 날아가는 압도적인 공격력.
‘확실히 데스몬드는 위험해.’
물론 자신의 공격도 잘 먹힌다.
뱀파이어는 악마 타입의 몬스터였기에 신성력에 추가 피해를 입었으니까.
게다가 성검까지 장착한 지금, 카이는 악마/언데드에게 100% 추가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죽어, 죽어라!”
아직 시력을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데스몬드는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 공격을 날렸다.
‘이 기회, 반드시 잡는다.’
카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데스몬드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중심에 두고 레이싱 트랙을 달리듯 빙빙 돌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어디, 어디냐!”
카이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데스몬드는 사방팔방으로 공격을 쏘아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몸 주변으로 강력한 방어막을 생성해 냈기 때문이다.
‘저게 사라지는 순간. 그 한순간을 노려야해.’
쿵, 쿵!
카이는 일부러 발목에 힘을 주어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
쫑긋.
데스몬드의 귀가 연신 움찔거렸다.
“거기…… 아니, 그쪽이냐!”
촤악! 촤아악!
핏빛 돌풍이 일어나며 저택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물론 카이가 그 돌풍에 얻어맞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을 못 보는 몬스터의 공격에 맞을 정도라면 애초에 랭커의 자격 자체가 없는 거니까.
“이제…… 이제 조금씩 보인다.”
녀석의 시야가 차츰 돌아오려는 순간.
카이는 달리던 방향을 직각으로 꺾으며 데스몬드에게 달려들었다.
푸욱!
데스몬드를 감싸고 있던 핏빛 방어막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전투 중에는 안심하지 마. 안심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법이니까.”
안심이란 상대를 죽인 뒤, 전투가 끝났을 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커, 커어억……!”
왼쪽 눈에 성검이 박힌 데스몬드가 팔을 휘둘렀다.
카이는 그 힘에 거스르지 않고, 충격을 최대한 흡수하며 뒤쪽으로 날아갔다.
‘한쪽 시야는 차단했어.’
인간의 시야는 넓다.
단순히 넓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동물 중에서도 상위권에 꼽힐 정도로 넓다.
오른쪽 시야 145도.
왼쪽 시야 145도.
위쪽 방향은 수평으로부터 55도, 아래쪽 시야는 약 75도.
그것은 뱀파이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 이상 왼쪽 눈은 쓸 수 없을 거야.’
피가 철철 흐르는 데스몬드의 왼쪽 눈은 이미 터진 상태였으니까.
일대일 싸움에서.
그것도 강자와의 싸움에서 한쪽 시야를 볼 수 없다는 페널티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우선 거리감.
“크윽……!?”
평생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데스몬드는, 카이와의 거리감을 정확히 계산해 낼 수 없었다.
카이 또한 그 부분을 노렸다.
휘익, 휘익!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데스몬드의 시각을 한껏 유린한 카이는 꾸준한 데미지를 누적시켰다.
그리고 또 하나.
‘왼쪽에서 치고 들어가는 공격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한다.’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반응하는 것이 굼뜨다는 것.
서걱, 푹!
“커억, 크어억!”
카이는 마치 어린 아이를 다루듯 흡혈왕을 가지고 놀았다.
물론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한쪽 시야가 나갔다고는 하나, 데스몬드의 가공할 만한 공격력은 여전했다.
“쥐새끼 같은 녀석! 맞아라! 죽어라!”
콰르르르르릉!
한 대라도 맞으면 체력의 10%가 우습게 날아갈 듯한 엄청난 공격력.
자칫 치명상이라도 맞으면 그 이상의 출혈도 각오해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걱정인 것은 따로 있었다.
‘절대 피를 흘려선 안 돼.’
뱀파이어는 상대방의 피를 마셔 자신의 체력을 채우는 종족이다.
그런 이들의 군주.
흡혈왕이라고까지 불리는 존재 앞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카이의 움직임은 초심자가 보기에는 과감해 보였다.
허나 랭커들이 그의 몸놀림을 봤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그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데스몬드의 다음, 또 그다음 행동을 계산한 뒤에 움직였으니까.
턴제 게임도 아니고, 나노초 단위로 이루어지는 실시간 전투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말 그대로 동물적인 전투법이었다.
“크으으…….”
체력이 30% 밑으로 떨어진 흡혈왕의 창백한 전신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세상에 가느다란 붉은색 선이 그어졌다.
처음에는 하나만이 그어지더니.
그 수는 점점 많아졌다.
‘느낌이 안 좋아.’
위기의식을 느낀 카이는 본능적으로 그 선들을 피해 다녔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지이이이이잉!
세상에 그어진 혈선으로 순식간에 핏빛 칼날이 튀어나오며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절단하기 시작했으니까.
땅, 기둥, 벽.
그 무엇도 핏빛 칼날의 분노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가능하면 빨리 끝내는 게 좋겠어.’
파티창을 확인하던 카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던 파티원들의 체력이 지속적으로 깎여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조함을 느낀 그는 살짝 무리를 감행했다.
“업그레이드. 신성 사슬.”
촤르르르륵!
소매에서 뻗어나간 굵은 쇠사슬이 흡혈왕의 목을 휘감았다.
“크윽……!”
흡혈왕의 전신에서 근육이 부풀었고, 타이트한 예복은 힘없이 찢어져나갔다.
예복 아래에 감춰져 있던 몸은 대단했다.
지방 한 점 없이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매는 경이로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에 감탄을 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업그레이드, 헬 파이어.”
화르르르륵!
지옥의 불길은 곧장 신성 사슬을 타고 데스몬드의 몸으로 옮겨갔다.
업그레이드로 강화된 스킬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맹렬하게 불타기 시작했다.
“…….”
흡혈왕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문 채, 카이를 노려볼 뿐.
‘……독한 놈.’
카이는 찌푸린 얼굴로 데스몬드를 쳐다봤다.
체력이 22% 밑으로 내려갔지만, 녀석은 오히려 처음부터 더 팔팔해보였다.
‘슬슬 공격이 잘 통하지 않고 있어.’
데스몬드가 자신의 공격 패턴을 어느 정도 파악했기 때문이다.
‘전투가 길어지면 불리한 건 나.’
카이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파티원들의 체력 상황도 많이 안 좋고, 듀라한과 스켈레톤들도 꾸준히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승부수를 걸자.’
카이가 사슬을 당겼다.
흡혈왕은 그 힘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추진력으로 삼아 카이에게 쇄도했다.
‘온다!’
카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달려드는 흡혈왕을 맞이했다.
콰드드득!
흡혈왕의 뾰족한 송곳니가 카이의 왼쪽 팔목을 파고들었다.
“크으으윽!”
동시에 알림창이 빠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띠링!
[데스몬드가 흡혈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20,0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데스몬드가 흡혈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20,0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
전체 체력이 14만을 조금 넘는 카이가, 초당 20,000씩의 체력을 잃는건 치명적이다.
심지어 데스몬드는 초당 10,000씩 생명력이 빠르게 차올랐다.
하지만 카이는 그 상황을 기다기라도 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업그레이드, 신성 사슬.”
“……?!”
다시 한 번 강화된 신성 사슬을 소환한 카이는 녀석에게 물린 자신의 왼팔과, 녀석의 몸을 칭칭 묶었다.
동시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햇살의 따스함.”
카이의 몸이 황금빛에 물들며 곧장 40,000의 체력이 회복되었다.
“어디 누가 최고의 터프남인지 한 번 가려보자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데스몬드가 몸을 빼내려 했다.
꽈아아악!
하지만 카이의 왼팔 근육에 단단히 박힌 이빨은 빠져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신성 사슬에 감겨있는 그의 몸도 꿈쩍하지 않았다.
카이가 서슬퍼렇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디 한 번 내 피, 계속 빨아봐.”
푹!
성검은 움직이지 못하는 데스몬드의 옆구리를 강하게 찔렀다.
[데스몬드가 흡혈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20,0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햇살의 따스함.”
[40,000의 체력이 회복되었습니다.]
푹! 푹!
체력이 깎이고, 차오르고, 또 깎이고 차오르고.
더 이상 두 사람의 싸움은 초반처럼 현란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그저 죽지 않는 좀비 두 마리가 누구 생명력이 더 질긴지 확인을 하는 것처럼 보일 뿐.
“그르르르……!”
흡혈을 하던 데스몬드가 고통을 토해냈다.
같은 부위를 계속해서 찔리자, 더 이상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결국 그는 자신의 이빨을 스스로 부러트리고, 카이의 왼팔에서 고개를 떼어냈다.
동시에 수백 마리의 박쥐로 변한 그는 신성 사슬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지금이다.’
카이의 눈이 빛났다.
그는 뒤쪽으로 도망치는 박쥐 떼를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태양의 분노!”
지이이잉.
보름달만이 존재하던 하늘, 아니 천장은 산산조각이 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들어온 태양빛이 대지를 폭격했다.
콰앙! 콰아앙! 지이이잉!
태양의 분노는 마치 지우개처럼 저택을 지도상에서 깨끗하게 지워냈다.
“커, 커흑…….”
데스몬드는 역류하는 피를 토해내며 바닥에 엎드려있는 상태였다.
“크…… 크으으…….”
그는 바닥에 누운 채 카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라도?”
예의상 물었을 뿐이었다.
“인간은…… 너희 인간은 예전부터 항상 그래왔다…….”
하지만 데스몬드는 진심으로 자신의 유언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화려한 불꽃을 태우듯,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자신들을…… 기준으로 삼은 뒤,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명명하지…… 이 얼마나 오만하고 건방진 족속들인가!”
저벅.
카이는 자신에게 걸어오는 데스몬드를 차갑게 응시했다.
“악마의 아들이라고? 웃기는 소리. 나는 지독한 피부병에 걸렸을 뿐이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인간들과 모든 것이 똑같은 한심한 놈이었지.”
덥석.
데스몬드가 카이의 멱살을 쥐었다.
그의 몸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잡힌 멱살을 통해 느껴졌다.
그것이 과연 기력이 다해서인지, 아니면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카이는 알지 못했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용납하지 못한다. 실제로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했지. 그 때문에 나의 어머니는!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화형대에서 돌아가셨다!”
“…….”
“큭. 우습게도 같은 종족도 아닌 마왕님만이 나를 인정해주셨고, 이 힘을 주셨지. 나는 힘을 얻은 날, 마을로 돌아가 인간 놈들을 모조리 찢어 죽였다. 크큭, 근데 웃기는 것이 뭔지 아나?”
데스몬드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인간이라는 한심한 족속들은…… 자신과 다를지라도 힘이 강하면 살려달라고 목숨부터 구걸하더군. 큭, 크하하하! 자신들과 다른 존재라 할지라도. 강하면 일단 구걸을 하고본단 말이다. 이보다 더한 희극을 봤는가? 응? 봤느냔 말이야!”
툭.
한바탕 울화를 쏟아내고 힘을 다한 데스몬드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지지할 대상을 잃어버린 그는 비틀거리다가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으으…….”
자리에 누운 데스몬드의 시야로 하늘이 올려다보였다.
‘그날의 밤하늘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약속했거늘…….’
한 쪽 눈은 실명이 되었고, 시야는 점점 흐릿해져갔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 때문인지 눈은 천천히 감겨졌다.
‘보름달이 박혀있던 하늘…… 그 밤하늘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좋겠군.’
아쉽게도 부서진 천장에는 보름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