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힐통령 276화
90장 몬스터 투기장(3)
복도의 벽에 횃불이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맞은편의 철창 안쪽은 어둡고 조용했다.
“…….”
횃불이 일렁거릴 때마다, 철창 안쪽에서 눈을 감고 얌전히 앉아 있는 인영이 엿보였다.
저벅, 저벅.
철창 밖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전히 그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어이! 231번, 준비해라. 경기다.”
경비병 복장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사내는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 하나를 찾아 철창을 열며 소리쳤다.
그제야 감겨있던 인영의 눈이 뜨여졌다.
번쩍.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나는 그것은 사람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세로로 길쭉하게 세워진 눈동자는 파충류의 그것.
“……231번이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란 눈의 주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경비병을 노려봤다.
“블리자드. 마스터께서 지어주신 나의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허, 진짜네? 도마뱀 새끼가 말도 해.”
“그렇다니까? 그나저나 제국어는 아닌 것 같고, 라시온 왕국 쪽 언어 같지?”
“쯧. 알게 뭐야. 사람 흉내 내는 것 같아서 소름 끼치네.”
“…….”
블리자드의 손목과 발목, 목에는 단단한 구속구가 채워진 상태였다.
경비병들은 구속구에 달린 줄을 당겨 그를 짐승처럼 거칠게 이끌었다.
“빨리 빨리 나오라고. 챔피언 씨, 관중들이 너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게을러서 되겠어?”
“팬 서비스를 모르는 도마뱀이구만.”
두 경비병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때였다.
블리자드의 눈이 번쩍인 것은.
화악-!
그는 경비병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손목의 구속구를 경비병의 목에 걸었다.
“커억, 크에엑!”
“이, 이 새끼가!”
다른 경비병 하나가 황급히 검을 뽑으려 하자, 블리자드는 몸을 날려 어깨로 그의 가슴을 박았다.
콰드득!
“커억!”
뼈가 부러진 채 벽으로 날아간 경비병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때마침 목을 조르고 있던 경비병도 산소가 부족했는지 게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기회.’
블리자드는 아까 두었던 경비병의 품을 뒤져 열쇠 꾸러미를 찾았다.
철그럭, 철그럭.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사물을 볼 수 있는 그는 수십 개의 열쇠들을 제 구속구의 열쇠 꽂이에 차례대로 집어넣었다.
‘맞는 열쇠가 없다. 왜인가?’
블리자드의 미간이 찌푸려지던 순간.
“이거, 왜 안 오나 했더니……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
복도 저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새롭게 등장한 사내는 기사의 상징인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장비한 상태였다.
철창을 어깨 위에 걸친 그는, 두 팔을 창대 위에 두르고는 열쇠 꾸러미를 흔들었다.
“혹시 이거 찾냐?”
짤랑, 짤랑.
“쯧쯧. 그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는 철창밖에 못 열어.”
“…….”
그렇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블리자드는 대답 대신, 기절한 경비병의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호오, 한 번 해보려고? 아서라. 그러다가 오늘 경기 못 나가.”
기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블리자드는 이미 달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비록 구속구 때문에 보폭을 크게 가져갈 수는 없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충분히 빨랐다.
“쯧. 말귀를 이렇게 못 알아들으니 몬스터 소리를 듣지.”
혀를 찬 기사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꾸욱 눌렀다.
지지지직-!
동시에 블리자드의 목에 걸려 있던 구속구에서 전류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몸이 뻣뻣하게 굳은 블리자드는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니까 경기 전에 함부로 몸을 굴리면 안 돼요. 넌 상품이거든. 널 보려고 오는 관중들이 몇 명인지 알아?”
툭, 툭.
블리자드는 자신의 뺨을 기분 나쁘게 툭툭 때리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적당히 힘 좀 빼고 싸우라고 몇 번을 말해? 슬슬 지루하다고 원성이 쌓이기 시작한다고. 경기라는 게 좀 치고받고 해야 재밌는 거 아니겠어?”
말을 내뱉던 기사는 돌연 뭔가가 생각났는지, 창을 한 바퀴 돌렸다.
푹!
“햐, 이래도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네. 역시 리자드맨 족의 전사! 대단한 인내심이야.”
블리자드의 허벅지를 관통한 창날은 빠르게 회수되며 사내의 어깨 위로 돌아갔다.
“네가 적당히 할 생각을 안 하면, 우리도 이런 식으로 페널티를 줄 수밖에 없어.”
“…….”
블리자드의 노란 눈동자가 기사를 사납게 노려봤다.
“어우, 그렇게 노려보시니 존나 무섭잖아요.”
기사가 낄낄거리며 블리자드를 도발하는 순간, 경비병들이 몰려왔다.
“10분 내로 준비시켜서 경기장 내보내.”
“알겠습니다!”
기사의 명령을 받은 경비병들이 블리자드를 부축하며 경기장으로 데려갔다.
“이제 여기가 네 집이야.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하는데, 사이좋게 좀 지내자고.”
뒤에서 들려오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블리자드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마스터…….’
항상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져만 갔다.
***
설은영과 헤어진지 정확히 네 시간이 지났을 때.
한정우는 살짝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으음…….”
랭커에게 있어서 숙면은 사치다.
물론 정우처럼 압도적인 1위라면 숙면보다 더한 사치를 부려도 된다.
실제로 근래 정우의 수면 시간은 못해도 일곱 시간 이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정신이 조금 멍하네.’
지금은 블리자드가 얼굴도 모르는 놈들에게 잡혀서 강제적인 싸움을 요구 당하는 상황.
알아볼 것이 많았기에 팔자 좋게 꿈나라나 여행할 시간은 없었다.
또르르륵.
얼마 전 구비한 커피 머신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린 정우는 거기에 샷을 세 개 추가했다.
일반인이라면 혀끝에 닿자마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뱉을 정도의, 도저히 커피라 부를 수 없는 액체.
당연히 정우도 그것을 커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각성제.’
졸린 정신을 일깨우고, 혈관 가득 카페인을 주입하기 위한 각성제.
정우는 쓰리샷을 추가한 에스프레소를 그러한 용도로 사용했다.
꿀꺽.
사약과도 같은 액체를 목구멍으로 털어 넘기자, 살짝 멍했던 정신이 번쩍 뜨여졌다.
“후우…….”
목구멍이 따끔거릴 정도로 쓰디쓴 액체를 마신 정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빠르게 간단한 세안을 마친 그는 서둘러 캡슐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선 확인부터.”
게임에 접속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었다.
“블리자드, 역소한.”
사실 이 방법이 통한다면, 굳이 칼데란 제국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일은 생각처럼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띠링!
[블리자드가 소환/역소환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흐음.”
소환과 역소환이 될 수 없는 상태라.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어루만진 카이는 블리자드의 정보를 띄워 올렸다.
[블리자드 LV.323]
등급 : 필드 보스
포만감 : 23/100
충성도 : 91/100
“블리자드…….”
마지막으로 녀석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는 루시퍼의 날개를 팔기 전.
그때의 녀석은 318레벨이었고, 포만감도 충분한 상태였다.
물론 충성도도 98로 매우 높은 수치였고.
‘몰라줘서 미안하다.’
상태만 놓고 본다면 블리자드는 그 이후에 잡힌 것으로 추정되었다.
카이는 자신의 무능함에 가볍게 치를 떨었다.
“주인이 되어서 소환수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하다니…….”
동시에 이런 상황을 만든 유흥 도시 하란.
그곳에 대한 분노도 천천히 끓어올랐다.
‘재미있는 놈들이네.’
카이의 신형이 물감처럼 흐려지며 사라졌다.
***
칼데란 제국은 편리한 마법보다는 무(武)를 숭상하기로 유명한 제국이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왕국 사람들은 칼데란 제국의 대도시에 방문하면 가장 먼저 입을 벌린다.
“우와…….”
수많은 사람들의 허리춤과 등에는 검집이 매달려 있었다.
심지어 장을 보는 아주머니는 물론, 14살짜리 아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칼데란 제국의 시민이라면 어려서부터 검술을 배우는 것이 필수 교양에 속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칼데란의 농부는 타왕국의 견습 기사보다 검을 잘 다룬다는 농담마저 나돌 정도였다.
“다음!”
그건 유흥도시 하란도 마찬가지였다.
길거리를 메운 사람들 중 태반은 검을 들고 다녔으니까.
“흐음. 드라질 상단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군.”
하란의 성벽을 검문하던 병사가 의심 섞인 눈초리로 긴 행렬을 노려봤다.
“신생 상단입니다. 아란 왕국에서 오는 길이며, 상단을 증명해 줄 패는 여기 있습니다.”
“흠.”
상단주로 보이는 남자가 건넨 패를 꼼꼼히 살피던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에는 문제가 없군. 그럼 남은 건 교역품인데…….”
“문제없음!”
교역품을 확인하던 동료 병사들이 사인을 보내자, 그는 그때서야 패를 돌려주었다.
“부디 좋은 상행이 되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드라질 상단의 행렬이 검문소를 통과하려던 찰나, 병사가 돌연 소리쳤다.
“잠깐!”
“…….”
선두에 있던 상단주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 머리 위의 그걸 뭐라 부르나 궁금해서 말일세. 지난번에 들었는데 까먹었단 말이지.”
병사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현재 드라질 상단의 직원들은 모두 기묘한 형태의 두건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사막의 뜨거운 태양열을 막기 위해 아란 왕국의 시민들이 즐겨 쓰는 형태의 두건이었다.
상단주가 웃었다.
“터번이라고 부릅니다.”
“터번, 터번이라…… 내 이번에는 꼭 기억해 두지.”
“감사합니다. 아참,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최근 하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장소가 몬스터 투기장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크흐흐. 가볼 텐가? 생각 잘 했네. 한 번 보면 인간들이 싸우는 건 시시해서 못 볼 걸세. 다양한 몬스터들이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얼마나 스릴 넘치는지…… 저 앞쪽 광장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원형 콜로세움이 보일 걸세.”
“감사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최신 트렌드는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요.”
“생각이 참 깨어 있는 양반이군. 장사도 곧잘 하겠어.”
웃는 병사를 뒤로한 상단은 곧장 검문소를 통과해 몬스터 투기장으로 향했다.
“이 인원이 전부 관람하신다고요……?”
“안 됩니까? 돈은 충분합니다.”
“아, 아뇨. 가능합니다. 아! 다만 231번의 대결은 자리가 매진되어서 입석으로 보셔야 해요. 괜찮으시겠어요?”
“231번이라면……?”
“흐흐, 모르시는구나?”
매표소 직원이 실실거리며 말했다.
“저희 몬스터 투기장의 간판스타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이죠. 블랙 리자드맨 일족의 전사인데, 빠르기와 힘, 기교까지 세 박자를 모두 갖춘 녀석이에요. 그 녀석 경기가 잡히는 날에는 이렇게 전 좌석이 매진됩니다.”
“……재미있습니까?”
상단주의 물음에 매표소 직원은 손사래를 치며 과장되게 웃었다.
“당연한 걸 물으시네. 둘이 보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재밌죠.”
“그렇군요. 그럼 입석으로 주십시오.”
직원들의 대금까지 모두 치른 상단주는 터번을 고쳐 쓰며 콜로세움 안으로 이동했다.
***
“죽여라! 죽여!”
“231번! 231번!”
“검은 혜성! 검은 혜성!”
수천 명의 관중을 족히 수용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상태였다.
좌석들은 이미 모두 매진된 상태였으며, 입석들도 대부분이 팔렸는지 옆 사람과 부대끼며 경기를 봐야했다.
여기저기서 팝콘과 맥주가 넘쳐흘렀고, 사람들은 231번을 연호했다.
물론 상대편을 응원하는 목소리도 간간히 터져 나왔다.
“오우거 전사! 난 네놈에게 걸었다!”
“451배 잭팟 가즈아아-!”
모두 배당률이 말도 안 되게 높은 상대편에게 돈을 건 이들이었다.
“자리가 많이 불편하네요.”
부하 직원의 목소리에 상단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깨끗한 돌로 뒤덮인 경기장을 조용히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자, 그럼 기대하고 기대하시던, 오늘의 하이라이트 결투!”
한창 사회를 진행하던 사회자가 드디어 선수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포식자이자 두려움의 대상! 3미터 신장의 오우거가 갑옷을 입고 무기까지 들었습니다! 318번, 오우거 전사!”
경기장의 문이 열리고, 방어구와 무기를 장비한 오우거가 표효와 함께 거칠게 달려 나왔다.
“크워어어어어어어-!”
이에 관중들이 열광했다.
“와아아아아아!”
“역배당 와라와라와라!”
“그 거대한 둔기로 231번의 뚝배기를 단번에 깨버리라고!”
관중들의 반응을 살피던 사회자는 기분 좋게 웃으며 진행을 이어갔다.
“318번의 도전을 받는 몬스터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콜로세움의 챔피언, 231번! 검은 혜성!”
이번에는 반대쪽의 문이 열리며, 블랙 리자드맨의 전사 하나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왔다.
그가 입은 장비는 흑색의 경갑옷이었는데, 심하게 파손되어 비늘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와아아아아아아!”
“검은 혜성! 검은 혜성!”
“17연승 가즈아아아!”
오우거 전사를 소개할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환호성이 콜로세움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