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83화 (283/441)

# 283

힐통령 283화

91장 메모리 다이브(4)

마을의 호숫가를 둘러보던 카이는 우선 스탯창을 불러들였다.

[로엔]

직업 : 없음

레벨 : 238

칭호 : 사춘기를 겪고 있는

생명력 : 65,100

마 나 : 81,200

힘 : 502 체력 : 651

지능 : 812 민첩 : 308

신성 : 13 탐구 : 52

‘역시. 내 스탯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건가.’

사실 이 정도는 예상을 했었다.

때문에 큰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은 카이는 로엔의 스탯을 천천히 살폈다.

‘기본적으로 몸의 밸런스는 잘 맞춰져 있어. 사냥꾼인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배우고, 산에서 생활을 해서 그런가?’

눈에 띄는 것은 높은 지능 수치와 탐구라는 고유 스탯이었다.

“탐구 스탯 확인.”

[탐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늘어납니다.

“흠.”

대상의 본질이라, 이건 자신의 위엄과는 달리 상당히 애매한 능력이었다.

‘보유 스킬은 뭘 가지고 있지?’

카이는 호숫가에 앉아 로엔의 모든 것을 살피기 시작했다.

-보유 스킬 목록-

[중급 함정 설치 LV.2]

[중급 궁술 LV.3]

[중급 도축 LV.7]

[고급 수학 LV.1]

[고급 역사 LV.2]

[학습. Passive]

[분석. Passive]

[명석한 두뇌. Passive]

“흠…….”

현재 로엔의 스킬들 중 지금 당장 카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함정 설치와 궁술, 도축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저나 수학과 역사 스킬이 따로 있을 정도라니.’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스탯 자체는 좋은 편이야. 밸런스가 잘 잡힌 지력캐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는 곧장 프람 마을로 돌아갔다.

3개월 전이나 현재나 큰 차이가 없는 산골 마을.

우드득!

자신에게 말을 건넸던 수염 중년인은 여전히 장작을 패는 중이었다.

‘저 사람이 로엔의 아버지겠지.’

로엔의 집에 자연스럽게 들락거리는 중년인이니 확실할 수밖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카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자신의 사소한 말이나 사건까지 로엔의 기억이 될 터이니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둬야했다.

“오늘은 언제 사냥 나가세요?”

카이가 방실방실 웃으며 다가가자, 로엔의 아버지인 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춘기인 자신의 아들은 자신만 보면 툴툴거리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옆집의 엘렌 할머니가 장작이 필요하대서, 조금 준비해 드리고 나갈 생각이다.”

“저도 같이 가도 돼요?”

“진심이냐?”

휴의 얼굴에 기쁨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매번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며 속만 썩이던 아들이 먼저 사냥을 가고 싶다고 말하다니!

“진심이죠. 안 돼요?”

“안 될 리가! 당연히 된다. 안에서 준비하고 있거라. 장작은 금방 끝나니까.”

휴의 두 팔이 부풀어 올랐고, 장작을 패는 속도가 빨라졌다.

오랜만에 아들과의 사냥이 기대됐던 탓이었다.

집으로 들어가 사냥 장비들을 챙긴 카이가 집 밖으로 나오자, 휴는 장작을 한 아름 안고 옆집의 문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부탁하신 장작, 여기 있습니다.”

“매번 고맙단다. 이것 뒤뜰에서 키운 토마토…….”

그가 옆집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카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추억을 많이 만들 생각이기는 한데…… 결과적으로 휴는 죽어야 해.’

문제는 그 방법이다.

만약 자신이 내일 새벽에 가출을 시도하지 않으면, 휴는 죽지 않는다.

‘하다못해 휴가 불치병에라도 걸렸으면 이야기는 편해졌을 텐데.’

카이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휴가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쿨럭!”

“네 기침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구나. 역시 지금에라도 병에 대해서 로엔에게 말해야…….”

“쉿.”

엘렌 할머니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하자, 휴가 이를 다급히 제지하며 카이의 눈치를 살폈다.

카이는 애꿎은 장비를 재점검하며 못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겉모습과는 별개로, 머리는 재빨리 돌아가는 중이었다.

‘뭐지? 병이라니?’

로엔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그렇다면 로엔조차 몰랐다는 뜻, 혹은…….

‘내가 그렇게 바랐기 때문에?’

카이의 안색이 굳어졌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지만, 타이밍이 공교로웠으니까.

카이는 다가오는 휴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안색이 어두우시네요. 어디 아프세요?”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거라.”

언뜻 차갑다고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게 말을 끝낸 휴는 사냥 준비를 빠르게 마쳤다.

“바로 출발하지.”

“오늘은 뭘 잡으실 거죠?”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칼날 늑대들의 배변이 발견되었다. 늑대는 무리를 이루는 생물. 게다가 배변의 양을 보니 절대 작은 규모의 무리는 아니다. 주민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그 전에 사냥한다.”

“늑대 사냥이군요.”

“제법 강행군이 될 텐데. 괜찮으냐?”

“저는 괜찮습니다.”

카이가 씁쓸한 기분을 감추며 활짝 웃자, 휴의 입꼬리도 저절로 올라갔다.

***

휴의 말처럼 강행군이 이어졌다.

“허억, 허억…….”

특히 로엔의 빈약한 스탯을 지니고 그 강행군을 따라가는 카이는 죽을 맛이었다.

‘이런 곳에서 새삼스럽게 스탯의 중요성을 느끼다니.’

카이의 고통스러운 안색을 흘깃 쳐다본 휴가 입을 열었다.

“다 왔다. 이 근처에서 배변을 발견했으니…… 조심하거라.”

자신이 일전에 표시해 놓은 나무의 표식을 가리킨 그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허억…… 몇 마리…… 정도나 있을까요?”

물을 마시며 숨을 돌리던 카이가 물었다.

“배변의 양과 발자국을 보면…… 못해도 서른 마리는 될 것 같다. 정면 승부는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서른 마리…….”

일반적인 플레이어조차 동 레벨의 몬스터를 그 정도까지 상대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휴는 기사도 아닌 사냥꾼.

“함정을 설치해야겠군요.”

“예전에 가르쳐 준 것들, 기억하느냐?”

“어…… 아마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한 번 해보거라. 위치는…… 여기와 저기, 저기가 좋겠군.”

카이는 가방을 열어 덫을 꺼낸 뒤, 휴의 지시한 위치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함정 설치 스킬을 배운 적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능숙하게 함정을 설치할 수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려도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가르쳐준 걸 까먹지 않고 있었구나.”

“그, 그렇죠 뭐.”

휴가 감동받은 목소리로 말하자, 카이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 하니. 서둘러야해.”

두 사람은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

해가 산의 중턱에 걸리고, 산맥이 노을로 뒤덮이는 시간이 되었다.

“후우. 조금만 더 설치하면 끝나네요.”

“이제 잘하는구나.”

휴가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 위로는 자랑스러움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정말이지 다 컸어. 만약 네가 사냥꾼이 된다면 잘 해낼…… 쿨럭, 쿨럭!”

휴의 기침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듣는 이로 하여금 걱정이 덜컥 들 수밖에 없을 정도.

“괜찮으세요?”

카이가 황급히 물병을 건네자, 휴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피, 피잖아요!?”

그의 손바닥을 확인한 카이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괜찮으세요? 기침에서 피가 나오다니, 아무래도 절대 정상은 아니…….”

“로엔. 준비해라, 지금 바로 내려간다.”

“예? 하지만 함정의 설치가 끝나지 않았…….”

아오오오오오오!

돌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못해도 수십 마리가 동시에 우는 듯한 소리였다.

“이런…….”

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칼날 늑대의 후각은 그 어떤 생물보다 우월하다. 게다가 피 냄새 같은 경우는…… 3킬로미터 밖에서도 맡을 수 있지.”

피가 묻어있는 주먹을 꽉 쥔 휴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지금 바로 내려간다!”

평화롭던 분위기가 손바닥 뒤집듯 돌변했다.

“젠장, 따라잡혔어요!”

달리던 와중 뒤를 돌아본 카이가 소리쳤다.

‘저게 다 몇 마리야?’

눈으로 확인한 것만 최소 25마리.

게다가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하며, 사냥을 할 때는 몰이사냥을 하는 존재들이다.

‘사이드 쪽의 적까지 생각하면…….’

최소 40마리 이상의 대규모 칼날 늑대 무리!

카이의 안색이 굳어졌다.

‘잠깐만, 그런데 내가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은 카이 캐릭터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걸까?

아니면…….

‘로엔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카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절대 죽게 놔둘 순 없어.’

자신의 사랑스러운 펫, 블리자드가 누군가를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말은 블리자드가 로엔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나누어줬다는 뜻.

로엔이 죽으면 블리자드 녀석이 많이 슬퍼할 것이다.

“젠장!”

달려나가던 휴는 엉덩이 부근에 매달아 놓은 손도끼를 거칠게 뽑아 왼쪽으로 던졌다.

“끼이이잉!”

정수리에 도끼가 박힌 칼날 늑대는 그대로 피를 내뿜으며 넘어졌다.

덕분에 휴는 죽음의 위기를 넘겼지만,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아우우우! 아우우우우우!”

“컹컹! 크허헝! 커허헝!”

칼날 늑대들이 대량의 피 냄새를 맡고 잔뜩 흥분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이 상태로는 마을로 못 내려간다!”

휴가 돌연 방향을 틀었다.

이 늑대들을 모두 이끌고 마을로 내려가면, 기다리는 것은 몰살뿐이기 때문이다.

딸깍, 딸깍!

“끼이이이이잉!”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 있다면, 미리 설치해놓은 수십 개의 함정들이 정상적으로 작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쪽으로!”

“허억, 허억!”

앞서가던 휴는 때때로 활을 통해 칼날 늑대들을 견제하며 카이를 도와주었다.

“크르르…….”

“아오오오오!”

많은 칼날 늑대들이 함정에 걸리고,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쯤 되자 남아있는 열 마리의 칼날 늑대들은 거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그들을 쫓아왔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허억, 허억…….”

거듭된 도망과 전투에, 노련한 사냥꾼인 휴조차 호흡조절을 하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칼날 늑대들은 이미 두 사람을 다 잡은 사냥감을 생각하고 서서히 숨통을 조여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쉴 새 없이 찾아오는 병마는 휴를 몇 배나 더 괴롭게 만들었다.

“허억…… 쿨럭, 쿨럭! 크어어억!”

그래서일까.

한창 잘 뛰어가던 휴는 돌연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이런!”

휴가 걱정되었지만, 그 상황에서 카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 뿐이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휴의 활과 화살통을 집어든 카이는 시위를 당기며 늑대들을 견제했다.

“크르르…….”

“컹컹!”

칼날 늑대들은 그런 카이를 비웃으며 두 사람을 포위하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았다.

‘우두머리, 우두머리를 찾아야 해.’

카이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적들을 상대하기에 부족한 스탯, 부상당한 동료,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의 적들.

이 상황에서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단 하나.

‘우두머리를 치는 법뿐이야.’

거듭 말하지만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하는 이들.

당연하게도 결속력과 응집력이 굉장하다.

우두머리가 큰 부상을 입는다면 일단은 물러날 터.

물론 그런 이유로 우두머리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은 없다.

‘누구지? 저놈인가? 아니면 저놈?’

활대를 이리저리 돌리며 칼날 늑대들을 견제하는 카이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기를 잠시, 칼날 늑대들의 조그마한 차이가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띠링!

[패시브 스킬, 분석의 효과로 적들을 분석합니다.]

[탐구 스탯의 영향으로 분석의 효과가 증폭됩니다.]

칼날 늑대들의 능력치는 마치 잘 정리된 도표처럼 카이의 눈앞에 떠올랐다.

‘이것이 로엔의 능력…….’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그는 이내 확신했다.

‘저 녀석이다.’

다른 늑대들과 다를 것 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칼날 늑대.

근육량이 가장 많았으며,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중급 궁술이라고 했지.’

꽈아아악.

카이는 활대와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시위를 당겼다.

그 모습을 본 칼날 늑대들이 경계하듯 물러나는 순간.

카이가 몸을 살짝 비틀며 화살을 쏘아냈다.

푹-!

“크허허허허헝!”

화살은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칼날 늑대의 왼쪽 눈에 정확히 박혔다.

녀석은 고통스러운지 바닥을 구르며 머리를 몇 차례나 뒤흔들더니,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아우우우우우우우!”

그 울음 소리에 다른 늑대들도 함께 울기 시작했다.

“아우우우우!”

“아우우우우!”

카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지켜보기를 잠시, 한쪽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녀석은 화살통에 담긴 넉넉한 화살을 한 차례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달아났다.

녀석을 따라 함께 도망치는 칼날 늑대들.

“……돼, 됐다.”

오랜만에 스릴 넘치는 전투를 치룬 카이는 곧장 누워 있는 휴를 확인했다.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쿨럭, 쿨럭!”

입에서 연신 피를 토해냈고, 안색은 병자의 그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이런…… 이런 병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없었는데!”

아랫입술을 꽉 깨문 카이가 소리쳤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휴가 두꺼운 손을 뻗어 카이의 손을 꽉 쥐었다.

“당황하지…… 말거라. 사냥꾼의 아들이라면…… 그래야…… 한다.”

휴는 고통을 참으려는 듯 눈을 꾹 감으며 말을 이어갔다.

“널 도시로 보내지 않은 것은…… 욕심…… 이었다……. 내가 죽어가는 것을 알았기에,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왜 말하지 않은 겁니까? 그걸 진작 말하셨으면!”

욱씬.

카이가 돌연 헉하고 숨을 삼켰다.

누군가가 손을 뻗어 자신의 심장을 꽉 움켜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무슨…….’

솔직히 말하자면, 휴의 죽음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큰 슬픔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기분은 달랐다.

비통과 분노, 태양신을 향한 간절한 바람이 한데 섞인 감정의 파도가 그를 흔들었다.

‘이러면 내가 정말 휴의 아들이라도 된 것 같잖아.’

주인의 뜻을 거스른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카이가 그 감정의 급류에 휩쓸리기 직전, 알림이 울렸다.

띠링!

[스페셜 칭호, 몽상가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공감 능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마치 멍이든 자리에 시원한 파스를 뿌리기라도 한 듯, 심장 부근이 시원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여운을 느낀 카이는 바닥의 흙을 움켜쥐었다.

‘힐이라도 쓸 수 있었으면…….’

아니, 설령 사용할 수 있더라도 휴를 치료해서는 안 된다.

그를 살리면 로엔의 기억 속에 들어온 의미가 없으니까.

“한 가지만…… 약속…….”

꽈악.

카이의 손을 쥐고 있던 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생의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휴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는 언제 아팠냐는 듯, 멀쩡하고 맑은 눈빛으로 카이, 아니 자신의 아들인 로엔을 올려다봤다.

“조금 더 현명하지 못한 아버지라서…… 미안하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윈 네가 아버지까지 잃으면 잘못된 선택을 할까 두려워 여태껏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보니 확실히 알겠구나.”

휴는 피가 흐르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넌 나의 아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인하고, 용감하지.”

“……아버지.”

상황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로엔의 마음이 닿아서인지.

카이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꽉 잡고,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이에 휴는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아버지라…… 오랜만에 듣는 말이구나. 말해줘서 고맙구나. 그리고…… 병에 대해 숨겨서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로엔, 도시로 가거라. 그곳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뛰어난 학자가…… 되거라. 사랑…… 한다.”

끝까지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준 휴의 손아귀에서 점점 악력이 사라졌다. 카이는 그런 그의 모습을 쳐다보며 소리죽여 울었다.

띠링!

[로엔의 기억,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변경되었습니다.]

[휴의 죽음에 불치병이라는 상황을 추가하셨습니다.]

[메모리 다이브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더 이상 로엔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로엔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공부에 전념할 것입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하루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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