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84화 (284/441)

# 284

힐통령 284화

91장 메모리 다이브 (5)

“마스터…… 마스터!”

카이는 누군가가 몸을 흔드는 느낌에 눈을 떴다.

시야로 들어오는 것은 로엔의 집 내부와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블리자드.

그는 여전히 로엔의 이마에 붙어있는 손을 떼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블리자드의 거듭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카이가 물었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이러고 있었지?”

“꼬박 하루입니다.”

“그렇구나.”

카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로엔의 기억 세계에서 보낸 시간도 하루 정도 되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끄응.”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카이를 블리자드가 황급히 부축했다.

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의자에 앉은 카이는 멍한 표정으로 로엔을 쳐다봤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카이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눈가를 훑어봤다.

“…….”

눈물 자국이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지난 하루 동안 내가 울었던 적이 있던가?”

“아뇨. 몇 분 전부터 로엔은 계속해서 울었지만…… 마스터께서는 멀쩡하셨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욱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장 부근은 쓰라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로엔의 기억에 너무 동화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치 멜로 영화라도 본 것처럼, 슬픈 일을 목도했기 때문일까.

그 사실을 알 수 없던 카이는 천천히 로엔에게 다가갔다.

“로엔님.”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자, 굵고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리던 로엔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카이가 무슨 말부터 건네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돌연 로엔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갑자기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눈가를 슥슥 닦으며 활기차게 일어난 로엔은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미쳤었나 봐요. 할 짓이 없어 약에 손을 대다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셨다면 절 크게 꾸짖으셨을 겁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병마였습니다. 카이 님을 세 달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죄송합니다.”

카이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로엔은 깜짝 놀라 마주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 아닙니다! 그건 카이 님의 잘못이 아니지요. 이러지 마세요.”

이어서 로엔은 카이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우매한 저를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모두 카이 님 덕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카이는 열심히 고개를 숙이는 로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본인의 기억이 바뀌었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하다고 해야 할지.

말을 잇지 못하는 카이에게 로엔이 말했다.

“아버지가 유언을 남기시길, 도시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학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학자가 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혹시 어디로 갈지 결정은 하셨나요?”

“음…… 아직은 못 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영지로 오시겠습니까?”

제안을 한 것은 미안함 때문이었다.

아무리 치료의 목적이었어도, 자신은 그의 소중한 기억을 멋대로 수정하고, 더럽혔으니까.

심지어 로엔은 그 사실조차 모른 채, 분에 겨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연신 감사를 표한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카이는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로엔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 이제보니 귀족이셨군요?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마에 귀족이라고 써놓은 것도 아닌데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카이는 품에서 조그마한 골드 주머니를 꺼내 로엔에게 건넸다.

“현재 저의 영지인 아르칸은 아카데미 도시로 건설되는 중입니다.”

“아카데미…… 도시요?”

생소한 단어에 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아카데미로 만들 생각입니다. 대륙 최고 수준의 강사진은 물론, 학생들을 위한 편의 시설과 물론 오락 시설까지 갖춘 장소이지요.”

“마, 말만 들어도 꿈만 같습니다. 그런 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로엔의 눈동자에서 기쁨이 뚝뚝 떨어졌다.

“아카데미 측에는 따로 말해놓겠습니다. 언제 완공될지는 모르겠으나,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 돈은 아카데미가 완성되기 전까지 생활비로 쓰실 정도는 될 겁니다.”

“이렇게 계속 받기만 하면…….”

감동의 파도에 허우적거리며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 구르던 로엔.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카이 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훌륭한 학자가 되어, 카이 님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띠링!

[로엔과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로엔은 당신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이 은혜를 갚아나갈 것입니다.]

“…….”

평소라면 기뻐했을 메시지조차, 현재 카이의 마음속에 놓여진 돌을 치우지는 못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앗, 곧 날이 저물 겁니다. 누추하지만 하룻밤 지내시고 가시는 게 어떠실지…….”

“아닙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요.”

“아아,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로엔이 크게 아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배웅했다.

손을 흔드는 로엔이 멀어지자 블리자드가 말을 걸었다.

“마스터, 정말 괜찮으십니까?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카이는 그대로 길을 걸어 호숫가로 향했다.

로엔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수를 했던 호숫가였다.

그곳에서 자신의 표정을 보려고 했지만, 밤의 호숫가에 비춰지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블리자드.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다녀오십시오.”

두 말 않고 카이를 배웅하는 블리자드.

그를 남겨둔 카이는 곧장 천상의 정원으로 향했다.

“카이여.”

자리에 앉아있던 헬릭은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헬릭 님.”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카이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으며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한 일이 정말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지, 아니면 저의 자기만족일 뿐인지…… 전 위선자인 걸까요.”

쓰담쓰담.

헬릭은 말 없이 손을 뻗어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카이여. 인간의 세상에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

“…….”

카이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녀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마찬가지로 위선 또한 선이니라, 물론 그 위선이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는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대가 로엔을 치료한 것은 무언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느냐?”

카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헬릭이 아이처럼 낮게 웃었다.

“그것 보아라. 그대는 위선자가 아니다. 로엔을 위해 친절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스스로 납득하지 못해 아파하고 있을 뿐이지. 그거면 된 것이니라.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거라. 스스로를 담금질하여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여라.”

“헤, 헬릭 님…….”

마냥 아이처럼 생각하던 헬릭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는 충고를 해줄 줄이야.

카이는 살짝 감동한 눈빛으로 헬릭을 쳐다보았다.

“흐, 흐으응.”

그녀는 카이의 존경어린 눈빛에 으쓱해졌는지, 턱을 척 치켜세웠다.

“그대가 자꾸 망각하는 것 같아 다시 말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태양신 헬릭이니라. 신도도 내가 제일 많으니라.”

“오늘만큼은 인정입니다.”

“그렇지. 오늘만큼은…… 뭐, 뭐라고 했느냐!”

두 볼을 공기로 빵빵하게 불린 헬릭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이에 카이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눌렀다.

“푸우우우우…….”

그러자 헬릭의 볼에서 바람이 빠지며 재미있는 소리가 났다.

카이는 그 상태에서 헬릭의 찹쌀떡처럼 보드라운 볼을 쭉쭉 늘리며 놀았다.

“흐어어어…….”

“역시 헬릭 님에게 상담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흐우우우…….”

“제가 행한 친절을 위선이라고 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이가 손을 떼자, 헬릭은 자신의 얼얼한 두 볼을 감싸 쥐며 카이를 노려봤다.

“히잉…… 자꾸 늘리지 말거라. 볼 늘어난단 말이다.”

“신의 피부가 그 정도로 늘어날 리가 없잖아요. 심지어 헬릭 님은 태양신이잖아요?”

“그, 그렇지. 나는 태양신이니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헬릭은 헛기침을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메모리 다이브에 대해 누차 경고를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것 때문이었느니라. 애초에 그 기술은 마족들의 것. 아무리 그대가 좋은 마음을 품고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마족들이 만들어낸 추악한 성질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니라. 결과적으로…… 그대가 상처받고, 그대가 아파하게 되겠지.”

헬릭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카이가 방긋 웃었다.

“이렇게 절 걱정해주시는 태양신님이 있는데, 제가 그렇게 아파하겠어요?”

“……그대도 참.”

흐유우. 옅은 한숨을 내쉰 헬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타인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 감정을 아무런 방어 체계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니라. 마족들이야 애초에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심장을 지니고 있으니 상관이 없다지만…….”

“저도 괜찮습니다.”

카이가 단언했다.

“결과적으로 로엔은 이전보다 더 나은, 더 생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매일매일 찾아오던 악몽도, 후회도 더는 그를 방문하지 못하겠지요. 그거면 됐습니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예. 저도 마냥 착한 놈은 아니라서, 제가 힘들다고 느껴지면 그때 그만두겠습니다.”

카이의 미소를 쳐다보던 헬릭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그대는 참 이상한 사람이구나.”

“멀쩡한 사람이었으면 헬릭 님한테 사탕이나 초콜렛을 주는 해괴한 짓도 안 했을 걸요?”

“……계속 이상한 사람이었으면 좋겠구나.”

헬릭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중얼거렸다.

***

이후 며칠 동안 정우는 느긋하게 지내며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좀 많이 바빴지.”

쉴 틈도 없이 달려온 그였기에, 스스로에게 짤막한 휴가 정도는 내주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그는 토요일을 맞아 선물을 바리바리 싸든 채, 성북동 본가로 찾아갔다.

“……이게 다 뭐니?”

아버지가 좋아하는 최고급 와인부터 시작해서 어머니와 누나를 위한 옷과 가방까지.

예고도 없는 선물을 받게 된 가족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를 반겼다.

“그냥요. 가족들 얼굴 본 지도 오래된 것 같고.”

“알긴 잘 아는구나.”

“크흠. 이렇게 찾아오지 않아도, 네 소식은 간간히 잘 듣고 있다.”

아버지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어머니가 대번에 핀잔을 줬다.

“간간히는 무슨. 네 아빠는 매일 퇴근하면 컴퓨터에서 커뮤니티? 거기서 너에 대한 소식을 계속 찾아보고 있단다.”

“여, 여보…… 그건…….”

“며칠 전에는 악플 하나를 보더니, 기업 법무팀을 동원해서 그 녀석을 고소하려고 했다니까?”

“크, 크흐흠!”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버지가 반격을 시작했다.

“거 나만 이상한 사람 만드는구려. 정우야. 네 엄마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긴 것 알고 있었냐?”

“취미라뇨?”

“여보!”

어머니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인터넷에 나온 네 기사들을 다 프린트하고, 오려서 스크랩북을 만드는데…….”

“정말 이렇게 나올 거예요?”

“크흠. 당신이 먼저 시작한 일 아니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킨 것은 누나, 한지혜였다.

“어휴. 두 분 다 주책이에요, 그거.”

자신이 선물로 가져온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온 그녀는 정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우 네가 이해해. 요즘 두 분 사업이 잘 안 풀리셔서, 시간이 많이 남거든.”

“사업이 왜?”

“왜긴. 미드 온라인 때문이지.”

이쑤시개로 참외 하나를 집어 입에 쏙 집어넣은 지혜가 말을 이었다.

‘미드 온라인 때문이라…… 그럴 만도 해.’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부모님은 각각 사업체를 이끌고 계셨는데,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골프 웨어와 등산복을, 아버지는 정장과 구두 등을 제작하는 회사를 운영 중이셨다.

“요즘 누가 현실에서 골프 치러 다니고, 등산을 다니겠어? 아버지가 만드는 양복도 고급 브랜드인데, 요즘 돈 있는 사람들은 죄다 미드 온라인에서 돈 쓰고 다니지 현실에서 잘 안 놀잖아.”

“끄응…….”

“후우…….”

부모님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나오자, 정우가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럼 두 분도 미드 온라인에서 장사하시면 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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