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힐통령 287화
92장 아르칸 아카데미(3)
며칠 후, 부모님의 투자하고 한지혜가 실질적인 영업을 담당하게 된 새로운 의류 브랜드.
위즈덤(Wisdom)의 첫 의상이 미드 온라인에서 완성되었다.
“퀄리티 좋은데?”
교복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카이가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러자 초보자 의상을 입고 옆에 서있던 한지혜, 아니 위즈가 가슴을 쭉 폈다.
“당연하지. 국제대회에서 몇 번이나 수상한 전적이 있는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의상인데.”
자부심이 넘치는 그녀의 말처럼, 카이의 손에 들린 옷은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우선 의상 퀄리티의 대부분을 결정하는 원단은 화이트 실크로 만들어졌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만능의 원단.
심지어 무게도 가벼운 주제에 내구성은 튼튼한 마법의 재료였다.
“디자인 자체는 그냥 우리나라의 사립 학교 교복 같은데?”
“맞아. 우리에게는 친숙하지만 NPC들에게는 생소한 디자인이지.”
“제법 잘 먹힐 것 같아.”
베이지 색의 교복을 손에 쥔 카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것만 판매할거야?”
“물론 아니지.”
위즈는 인터페이스를 띄우더니 그대로 카이에게 패스했다.
“이건…….”
그녀가 건넨 자료를 읽던 카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교복, 세일러복, 한복에…… 바니걸 의상까지? 맙소사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야. RPG게임의 최종 컨텐츠라고 불리는 커스터마이징 의상들이지.”
“이런 부끄러운 옷들이 팔릴 거라고 생각해?”
“팔아야지. 사업가는 필요하다면 사막에서 모래도 판매할 수 있어야 해.”
“내 생각엔 부끄러워서 아무도 안 입을 것 같은데.”
“호호.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거야. 두고보라고.”
카이는 그녀가 드러내는 자신감에 어깨만 한 번 으쓱거렸다.
***
똑똑똑.
“영주님,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이른 아침, 프레스콧이 카이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가요.”
카이가 방을 나서자 프레스콧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잘 주무셨는지요.”
“저는 잘 잤습니다. 프레스콧은요?”
“저 역시 잘 잤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함께 식당으로 향하던 와중, 돌연 카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창밖을 통해 성벽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긴 행렬이네요.”
“뜻 깊은 날이지요. 아르칸 영지는 오늘을 기점으로 새롭게 태어날 겁니다.”
카이의 옆에 서서 그와 같은 경치를 바라보던 프레스콧이 감회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문득 영주님을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얼마나 되었다고 까먹겠어요. 물론 기억합니다.”
“고향의 몰락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심정이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지요.”
쓴웃음을 지은 프레스콧이 고개를 돌려 카이를 쳐다봤다.
“아르칸의 새로운 영주가 카이 님이라서 다행입니다. 진심입니다.”
“아침부터 쑥스럽게 왜 그래요.”
멋쩍은 미소를 지은 카이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럼?”
“아침 식사가 끝나면 티타임을 가지신 뒤, 천천히 아카데미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끙, 연설할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는군요. 아침 먹고 체하는 거 아닐까요?”
“아르칸의 주인은 카이 님이십니다. 당연히 영주님이 연설을 하시는 게 도리에 맞습니다. 그리고 아침 식단은 소화가 잘되는 수프와 샐러드 위주로 요청해 놨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아카데미의 입학식 날이 되었다.
카이는 지난 몇 주 간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나날을 떠올렸다.
‘영지 운영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단순히 돈만 투자하면 끝나는 줄 알았건만.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쓸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물론 아르칸 아카데미에 애정이 없다면 적당히 전문가를 고용해서 굴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 땅인데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지.’
벌써부터 골이 아파왔다.
현재 그가 제대로 관리하는 것은 리버티아와 아르칸 정도.
하지만 하베로스의 운영을 제대로 시작하고, 바덴 영주에게서 새로운 영지 두 개를 추가적으로 건네받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카이는 주방장이 준비한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한 때는 프레스콧과 카이가 전부였던 썰렁한 영주 저택은 많이 바뀐 상태였다.
요리사는 물론이고, 정원사나 시종, 하녀들까지 대거 들어선 상황이었으니까.
“오늘도 음식이 맛있네요. 깔끔하고.”
“주방장에게 전해놓겠습니다.”
“네.”
이어서 가볍게 티타임을 가진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볼까요? 프레스콧의 새 직장으로.”
“……역시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심이. 전 그저 영주님을 모시면서 저택을 관리하는게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프레스콧이라면 잘 하리라 믿어요.”
카이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그는 프레스콧을 예절 과목을 담당할 교사로 아카데미에 고용한 상태였다.
“이제 슬슬 출발하죠.”
저택을 나선 두 사람은 아카데미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마차가 끊이지를 않네요.”
성문에서부터 쭈욱 이어진 마차들의 행렬은 퇴근 시간의 꽉 막힌 올림픽대로를 보는 듯했다.
그들을 지나쳐 아카데미의 강당으로 들어서자 교사들이 일어나 카이에게 인사를 했다.
“이사장님…….”
“영주님…….”
“성혈단장님…….”
통일이 되지 않는 제각각의 호칭들.
카이는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편한대로 하세요. 편한대로.”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알버트 교황에게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교황님. 아르칸 아카데미의 신전은 어떻던가요?”
“마음 같아서는 이곳의 신전을 본단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더군요.”
“하하하! 드워프들이 들으면 좋아할거예요.”
알버트 교황의 극찬에 기분이 좋아진 카이는 교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은 아르칸 아카데미에 처음으로 학생들이 들어오는 날입니다. 다들 오냐오냐 소리 들으면서 자란 사람들이라 말은 안 들을거 같지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렴요.”
“훌륭한 시설에 걸맞는 훌륭한 교육을 선보이겠습니다.”
“이사장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교사들의 다짐을 받은 카이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왠지 오늘은 하루가 길어질 것 같네요.”
***
“흠.”
오곤 제국의 테세우스 3황자는 자신의 여동생인 루나 9황녀와 함께 아카데미에 입성했다.
‘확실히 마법 수정구에서 본 그대로다. 영상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어.’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다름아닌 감탄이었다.
‘역시 세상은 넓군.’
대륙을 통틀어 마도의 정점이라 자부하는 오곤 제국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왕국인 라시온의 일개 영지가 자랑하는 건축물은 그 오만한 생각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라시온 왕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존재하다니……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네요, 오라버니.”
“이 도시의 모든 건물이 드워프들이 손길을 거쳤다고하니 그럴 수밖에.”
본인도 무척 놀랐지만, 테세우스 황자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티를 냈다.
‘게다가…….’
강당에 들어선 그는 먼저 도착해있는 수많은 남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도 있고…… 만난 적은 없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은 이들도 있군.’
훗날 자신이 이끌게 될 가문의 자제들도 눈에 들어왔고.
타국에서도 명성을 떨치는 이름난 가문의 자제들도 제법 보였다.
“흠.”
테세우스 황자는 오곤 제국의 황자답게 당당한 걸음걸이로 강당의 앞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이 아카데미는 국제 사회의 축소판 같다. 향후 대륙의 패권을 다툴 때 싸우게 될 적의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겠어.’
앞으로 4년 동안 함께 공부를 배울 학생들은 훗날 대륙을 쥐락펴락할 이들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칼데란 제국을 손쉽게 제치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그러자면 우선 누구보다 뛰어난 성적을 받아야 하고, 타의 모범을 보여야 할 터.
‘그렇다면 내 자리는 저곳 뿐이군.’
가장 앞 좌석, 그 중에서도 가장 중앙!
테세우스 황자는 다른 귀족가의 자제들은 감히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그 자리에 앉을 생각으로 의자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꾸욱.
꾹.
그는 왼손만 뻗었는데, 눈에 들어오는 손은 두 개였다.
“음?”
“흠?”
동시에 같은 의자를 붙잡은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은…… 칼데란의 11황자.”
“오곤의 테세우스인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자리를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된 것이었다.
칼데란의 11황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이 자리는 내가 먼저 발견했다. 손을 치우고 물러나도록.”
“손잡이를 먼저 잡은 것은 나다. 그러니 그쪽이야말로 얌전히 포기하고 물러나지.”
평소에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두 제국의 후계자는 서로를 보는 즉시 신경전을 펼쳤다.
심지어 100명이 넘어가는 학생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그들을 지켜보는 중이었으니.
이곳에서 꼬리를 말고 물러나면 이후의 아카데미 생활은 불보듯 뻔했다.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이 없는 날이다. 다치기 전에 물러나라.”
“다치고 싶다면 계속 까불어도 좋다.”
두 황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들 주변으로는 이미 흉흉한 마나가 피어오르며 서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살벌한 상황에 말린 주변 귀족들이 괜히 앞 자리에 앉았다고 자책하는 순간.
촤아아악.
강당 무대를 가리고있던 커튼이 펼쳐지며 그 뒤에서 교사진들이 나타났다.
“큼큼.”
사회를 맡은 교사 한 명이 헛기침을 내며 두 황자들에게 주의를 줬지만.
그들은 교사를 한 번 스윽 훑어보더니 신경도 쓰지않고 다시 서로를 노려봤다.
‘이놈들 봐라?’
그 모습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카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레벨 높고 빽 좋다고 선생님 말씀을 아주 강아지 소리처럼 취급하네?’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카이의 입장에서는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레스콧.”
카이가 말했다.
“예, 영주님.”
“학부모 연락 수정구 있죠?”
“여기 있습니다.”
눈치 빠른 프레스콧이 정중히 수정구를 건네자, 카이는 그것을 받으며 물었다.
“오곤 제국이랑 칼데란 제국의 황제 폐하께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순간, 두 황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들은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돌려 수정구를 만지는 카이를 쳐다보았다.
“이건 뭐 어떻게 쓰는거야…… 음?”
두 사람의 시선을 느낀 카이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 분 이제 안 싸우세요?”
“크, 크흠.”
“험험…….”
어색한 듯 헛기침만 내뱉는 두 명의 황자들.
그 모습을 보며 알듯 모를 듯 미묘한 미소를 지은 카이가 입을 열었다.
“입학식 진행해야하니, 히페루스 황자님은 저쪽, 테세우스 황자님은 저쪽에 앉아주세요.”
“…….”
“…….”
카이는 반항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말에 따르는 황자들을 쳐다보며 확신했다.
‘역시 애들한테는 학부모 소환이 최고지.’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입학식은 그 어떤 트러블도 일어나지 않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