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88화 (288/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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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통령 288화

92장 아르칸 아카데미 (4)

사고는 예고없이 찾아오는 법이라 했던가.

아르칸 아카데미의 설립을 성공적으로 마친 카이에게도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겨났다.

“……아카데미를요?”

카이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헬릭은 큰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나도 가보고 싶으니라. 그대가 만든 아름다운 학원.”

“끄응.”

카이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이곳에 괜히 왔다는 기색을 팍팍 내비췄다.

눈치가 제법 빠른 헬릭은 두 손을 꼬물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안 되느냐……?”

그 귀여운 모습을 눈앞에 둔 카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안 될 건 없습니다만…… 그런데 지상에 내려오실 수도 있어요?”

“카이여. 그대의 눈앞에 위치한 이는 전지전능한 태양신이다.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느냐. 다만…….”

헬릭이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신이 중간계에 내려가려면 지닌 힘의 대부분을 봉인해야 되느니라.”

“네, 그럼 안 됩니다.”

카이가 딱 잘라서 거절하자, 헬릭이 찡찡거렸다.

“아아아아! 왜! 왜 안 되는 것이냐? 나는 가고 싶으니라.”

“그야 너무 위험하잖아요. 유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힘을 봉인하더라도, 한낱 아동 유괴범 따위에게 납치될 정도는 아니니라.”

“흠…….”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카이가 헬릭에게 물었다.

“그럼 말썽 안 피우고 말 잘 듣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으세요?”

“우우웅…… 그런데 내가 신인데…… 그대는 내 대리인인데…….”

헬릭이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드러냈지만, 카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약속 안 해주시면 안 데려가요. 자, 약속.”

“약속하니라.”

칼 같은 대답을 뱉어낸 헬릭이 손을 내밀었다.

고사리처럼 가느다란 새끼손가락을 손에 걸고 약속까지 마친 헬릭은 신이 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준비 다 되셨습니까?”

작은 책가방 하나에 짐을 모두 담은 헬릭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짐이라고 해봤자, 자신이 좋아하는 사탕과 과자를 골라서 집어넣은 게 전부였다.

“다 되었다.”

“……끄응.”

카이는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뭐. 별일이야 있겠어.’

아르칸 영지에는 각국의 황족과 왕족, 명문가의 귀족 자제들이 모여 있다.

당연히 그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 책임은 모두 영주이자 이사장인 카이의 몫.

때문에 그는 학생들이 등록금으로 지불한 돈의 대부분을 다시 지출해서 기사들을 고용했다.

덕분에 현재 아르칸 영지는 감히 철옹성이라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을 수준.

‘게다가 알버트 교황님도 있고, 태양교의 정예와 태양 기사단도 있으니까.’

오히려 헬릭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대상이 불쌍할 정도다.

말끔하게 고민을 지워버린 카이는 헬릭의 손을 잡고 입을 달싹였다.

“신출귀몰.”

아카데미의 이사장 실로 이동한 카이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헬릭을 보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아카데미 구경시켜 드릴게요.”

카이의 뒤꽁무니에 착 달라붙은 헬릭은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그를 뒤따랐다.

“와아. 아름다우니라.”

드워프들의 예술적인 건축물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시종일관 반짝였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니 데리고 내려온 보람이 있는 것 같기도.’

사탕과 과자를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신난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헬릭은 정말 아이처럼 뛰어다니며 아카데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지치지도 않으시나…….”

카이가 몇 시간이 돌아다니는 그녀를 보며 중얼거릴 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카이 님…… 아니, 이사장님!”

때마침 교내를 둘러보고 있던 로엔이었다.

그는 마치 교과서에 나오는 위인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이렇게 훌륭한 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까지 지원해 주시다니……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뭘.”

카이는 아직도 그의 기억을 수정했다는 것에 약간의 미안함을 갖고 있었기에,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중이었다.

물론 그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손해는 아니었다.

로엔은 그 정도 돈값은 할 것이 분명한 인재였으니까.

“그런데 저 분은 누구십니까? 입학식 때는 못 뵈었던 얼굴인 것 같습니다만.”

로엔은 한 번이라도 보면 잊어버리기가 힘든 헬릭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신장도 그렇고, 외형도 그렇고.

헬릭은 누가봐도 아이처럼 보였지만 일반인이 범접하기 힘든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아, 그게…….”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귀를 쫑긋 세우며 다가온 헬릭이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헬…….”

“헬리자베스야.”

카이가 헬릭의 말을 그대로 잘라내며 선수를 쳤다.

“……헬리자베스 님이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독특한 이름에 로엔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헬릭을 쳐다봤다.

“응. 13살이지. 좋아하는 것은 사탕과 과자. 특징은 볼살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그, 그렇군요.”

로엔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카이를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사장님의 동생이십니까?”

“……어? 으응, 뭐. 비슷하지.”

“앞으로 뵙게 되면 인사드리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는 로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헬릭이 눈을 가늘게 뜨며 카이를 쳐다봤다.

“난 그대의 동생이 아니니라. 헬리자베스는 더더욱 아니고.”

“알죠. 하지만 그렇다고 이분은 내가 모시는 신이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흐우우…….”

헬릭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목도리처럼 제 목에 돌돌 말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는 시무룩해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카데미 구경은 어떠셨어요?”

“응. 구경은 재미있었다.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라.”

“그럼 신전도 가보실래요? 알버트 교황님이 버선발로 뛰쳐나와서 반기실 텐데.”

“그, 그건 괜찮다.”

고개를 붕붕 내저은 헬릭이 돌연 카이의 소매를 붙잡았다.

“흐아아암. 카이여. 이제 조금 졸리니라.”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웅…….”

아무리 신이라지만 아이의 몸으로 하루종일 그 넓은 아카데미를 방방거리며 뛰어다녔다.

당연히 졸릴 수 밖에.

카이는 귀여운 하품을 뱉어내며 눈을 비비는 헬릭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신출귀몰.”

***

헬릭과의 짧은 데이트가 끝난 뒤, 카이는 리버티아 방문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오, 벗이여! 이게 얼마만이란 말인가!”

“오랜만이야, 루테리아.”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작은 세계수, 루테리아를 손바닥 위에 올린 그가 고개를 돌렸다.

“천하제일야장대회는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까?”

“네. 예정대로라면 일주일 뒤에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엘프 족의 여왕 엘라니아가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카리우스와 카룬달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역시 그대의 생각이 맞았네.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관광객이 더 몰려드는군.”

“껄껄. 대회에 참가하는 녀석들은 최고의 대장장이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며, 연습에 한참일세.”

“좋네요. 경쟁이란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는 법이지요.”

리버티아라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심장이라도 된 것처럼 생동감 있게 뛰었다.

이미 과거의 황량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완벽한 도시의 모습.

‘리버티아의 성장 속도는 빨라. 벌써 B등급을 목전에 두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

앞날이 탄탄대로였기에 고민도 없었다.

게다가 이전에 벌려놨던 일들도 제법 수습이 되는 분위기인지라 마음도 편했다.

‘천하제일야장대회만 성공적으로 끝나면…… 타락의 성지에서 찍은 예능이 방영될 거고, 그것까지만 보고나면 다시 모험을 시작하자.’

생각을 짧게 정리한 카이에게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카이!”

“……카밀라?”

있었지. 이런 여자가.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니? 네 장비 완성되어서 찾아왔지.”

특유의 털털한 목소리를 뽐낸 그녀는 한 쌍의 장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애지중지하면서 사용해. 내가 특별히 공들여서 만든 녀석이니까.”

‘아, 맞아. 지난 번에 자탄 재료들 주면서 장갑 제작을 의뢰했었지?’

까맣게 잊고 있던 장비가 손에 들어오자,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카이는 좋은 감촉의 장갑을 들어올렸다.

그가 카밀라에게 장갑 제작을 의뢰할 때 건넸던 재료는 자탄의 단단한 껍질, 그리고 각각 불과 얼음, 대지와 전기의 속성을 담고 있던 네 개의 다리였다.

그것들이 절묘하게 섞인 장갑의 형태는 제법 신선했다.

우선 옅은 갈색으로 이루어진 장갑은 단단한 껍질로 만들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단단한 껍질이 아닌 가죽이나 천을 사용해서 만들었다고 말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

그뿐만이 아니라, 장갑에는 네 개의 선이 그려져 있었다.

각각 속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적색과 청색, 갈색과 황색을 띄고 있는 선들이었다.

“어때? 멋있지.”

“외관은 진짜 멋잇네. 근데 이거 왜 이렇게 부드러워?”

“어휴, 말도 마. 껍질 그거 진짜 지독하더라. 부드럽게 만든다고 망치질 엄청 했어.”

질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카밀라가 그를 재촉했다.

“능력치도 어서 확인해봐.”

“……어지간히 자신 있나 보네.”

피식 웃음을 터트린 카이는 그녀의 말대로 장갑을 감정했다.

“아이템 감정.”

[자탄의 중력장갑]

등급 : 유니크

힘 +20

민첩 +20

체력 +20

방어력 1240

마법 방어력 1215

*중력장 스킬의 효율이 크게 증가합니다.

*중력장 내부에서의 움직임이 다소 자유로워집니다.

*중력장 내부에서 무작위 속성을 부여받습니다.

착용 제한 : 레벨 400 이상

내구도 100/100

‘호오?’

아이템의 설명을 읽던 카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중력장 스킬의 효율을 늘리는 옵션이 붙을 줄이야.’

사실 중력장을 대상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광역으로 전개하는 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적들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지만 카이도 중력의 영향을 받았으니까.

‘타락의 성지에서 뱀파이어들을 상대할 때 그 단점을 여실히 느꼈지.’

하지만 카밀라가 이번에 제작한 중력장갑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제는 다소 자유로워진다는 게 어느 정도냐는 건데…….’

그건 확인해 보면 될 일.

카이는 곧장 장갑을 양손에 장비했다.

“미안한데 잠깐만 실례. 중력장.”

“흐아?!”

카밀라에게 양해를 구한 카이는 중력장을 일대에 전개했다.

순식간에 네 배나 무거워진 중력.

동시에 그의 장갑에 각인되어 있던 황색의 선이 밝은 빛을 내뿜었다.

‘이건…….’

중력장 내부에서 전기 속성을 부여받았다는 뜻일 터.

따악. 치지지직.

카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치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전류가 일어났다.

“이거 재미있네.”

재미난 장난감을 얻은 카이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점프를 해보았다.

확실히 평소보다는 조금 더 힘들지만, 크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다.

‘중력을 네 배나 높였는데…… 체감상으로는 두 배 정도 높아진 것 같아.’

한 마디로 중력장을 통해 받는 압력이 절반 정도 감소되었다는 뜻.

“해제.”

중력장을 해제한 카이는 카밀라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고맙다. 이거 진짜 마음에 들어.”

“으으…… 야! 말도 없이 갑자기 그런 스킬을 사용하면……!”

화를 내려던 카밀라는 자신이 제작한 장갑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카이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 저렇게 좋아하니 된 건가.”

자신이 만든 장비를 받고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것.

‘그래. 이 맛에 대장장이 하는 거지.’

카밀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했다.

자신이 대장장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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