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힐통령 291화
93장 도화선(3)
카이가 등장한 이상 스켈레톤 군단의 패배는 이미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문제는 카이도 팔다리가 각각 두 개씩 달려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
때문에 모든 스켈레톤을 정리했을 때, 리버티아가 받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진짜로…… 진짜로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얼굴 보고 싶다.”
한 쪽 입꼬리를 쭈욱 올린 카이는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엉망이 된 영지를 돌아보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리버티아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 했던 자신이 아니던가.
허나 수 천 마리의 스켈레톤들은 애초에 리버티아를 공격해서 이길 생각이 없었다.
“포튼, 3구역은 좀 어떻던가?”
“말도 말게. 이쪽 구역보다 더 심해. 상점가는 다 파괴해 놨어.”
“끄응. 정말 지독한 놈들이군. 작정하고 영지만 파괴하다니.”
카이가 등장한 순간, 스켈레톤들은 행동 패턴을 변경했다.
NPC들을 죽이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영지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엉망이 된 상점가를 쳐다보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복구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요?”
“으음…….”
그 질문에 드워프들의 국왕인 카룬달이 몇 갈래로 꼬여있는 기다란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다행히 영지의 주요 시설들은 멀쩡하네. 문제는 타격이 입은 곳이 상점가라는 것이지.”
“……젠장.”
사실 카이는 지금까지 리버티아를 발전시키는데 돈을 쏟아부었던 적이 없었다.
리버티아가 자체적으로 거두는 수익을 고스란히 투자했을 뿐이니까.
그래도 투자금의 일부가 허공으로 붕 떠버렸다고 생각하니 불쾌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우,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나. 차라리 좋게 생각하는 게 이롭겠군.”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좋게 받아들이죠?”
카룬달의 말에 카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들어보게. 사실 리버티아가 처음 개발될 때만 해도 우리 종족은 없었어.”
그의 말처럼 처음 리버티아가 만들어졌을 때는 인어 족과 엘프 족만이 있었다.
“그랬지요.”
“때문에 훗날 우리가 리버티아의 새 식구가 되었을 때, 사실 난감한 부분도 없잖아 있었네.”
인어와 엘프와 드워프들은 각각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부분은 건물 양식에서부터 차이가 났는데, 사실 엘프와 인어들이 그 문제로 의견 충돌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인어들은 집을 바닷속에 짓고 사니까.’
허나 뒤늦게 합류한 드워프들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엘프들과 함께 지상에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엘프들의 거주지는 거대한 나무 곳곳에 달려있었지만, 그들이 지상에 지어놓은 상점가는 얘기가 달랐다.
“상점가의 건물 배치는 비효율적인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
“그 부분은 저희도 인정해요. 세계수님과 함께 엘프의 숲에 살 때는 그런 시설들이 필요 없었으니까 지어본 경험이 없거든요.”
엘프들의 여왕 엘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러니 그런 부분을 깨끗하게 개선해서 새로운 상점가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군.”
“끄응, 그 부분은 편한 대로 진행 하세요.”
“대회는 어쩔 셈인가?”
“후우.”
가장 큰 문제는 천하제일야장대회였다.
“어쩌겠어요. 일정 모두 캔슬하고 상점가가 복구되면, 날짜 새롭게 잡아서 그 때 진행합니다.”
“구경을 위해 몰려든 사람이 많네만…….”
“양해를 구해야죠. 이 상황에서 대회를 계속 진행할 수는 없잖아요?”
이미 완파가 되어버린 대회장과, 리버티아의 곳곳을 보수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쩔 수 없군. 그럼 한 달 동안 상점가를 새롭게 보수하고, 대회도 그때 여는 것이 어떤가?”
“좋네요. 아, 그리고 오늘 같은 일이 다시는 안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적들의 침공 말인가?”
“예. 굉장히 불쾌하네요.”
자신이 있는 이상 영지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엘프와 인어 족은 기본적인 전투력을 갖추고 있기에 걱정도 크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리버티아의 보안은 상상 이상으로 약했다.
물론 엘프와 인어들이 약하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상대방이 물량공세를 취한다면 막는 것이 힘들 정도였으니까.
‘모르고 있었다면 한 번은 당할 수 있어. 하지만 같은 일에 두 번이나 당한다면…….’
그건 더 이상 실수 따위가 아니라 본인의 ‘무능’을 나타내는 꼴이었다.
“아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안 보이게.”
카이는 자신의 눈을 피해 꼭꼭 숨어버린 범인들을 향해 짤막한 경고를 남겼다.
***
리벤지 길드.
스팅과 골리앗이 손을 잡고 만든 길드의 첫 행보는 나쁘지 않았다.
카이가 보유하고 있는 두 개의 영지를 동시에 공격했고, 소기의 성과를 이뤘으니까.
심지어 그가 자신들의 정체를 유추할 만한 흔적은 절대 남겨두지 않았다.
그야말로 성공적인 잽(Jab).
하지만 스팅의 안색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그는 무언가 크게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러나?”
골리앗의 질문에 스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투 펀치는 확실히 들어갔다. 불의의 일격이었으니 아직까지 얼얼한 기분이 느껴질 거야. 무엇보다 천하제일야장대회의 일정이 캔슬되었으니 화도 많이 날 테고.”
“그렇지.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나. 조금 더 기뻐해도 될 텐데?”
“……후우. 네가 놈의 힘을 직접 목격했다면 지금처럼 태연하지는 못할 거다.”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린 스팅이 지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군. 서로 똑같은 신화 직업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능력의 차이가 날 수 있는거지?”
“놈이 신화 직업으로 전직을 하고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지 생각해 봐라. 우리는 전직한 지 이제 고작 한 달이 되었어.”
“내가 바보 멍청이로 보이나? 그 부분도 당연히 고려해 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끄응, 아니 차라리 직접 보여주는 편이 빠르겠군.”
스팅은 자신이 녹화했던 영상을 곧장 골리앗에게 전송했다.
“흐음. 대체 어느 정도 실력이기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한 번 구경이나 하지.”
대수롭지 않게 영상을 재생한 골리앗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처음에는 긴장, 두 번째는 당황, 놀라운 것은 그다음으로 찾아온 행복이었다.
“미친 건가?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군.”
스팅이 시비를 거는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이에 골리앗은 씨익 웃으며 제 주먹으로 반대쪽 손바닥을 두드렸다.
“재미있지 않나. 기본적인 스펙 자체가 높은 것도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싸우는 방법 자체가 대단해. 그를 제외하고 또 어떤 플레이어가 이런 식으로 싸울 수 있을까?”
“없다. 그래서 문제지.”
“큭, 두려운가?”
골리앗의 질문에 스팅이 그를 차갑게 노려봤다.
“날 도발하지 마. 안 그래도 오늘 기분이 더러우니까.”
“그렇게 받아들였다니 유감이군.”
어깨를 으쓱거린 골리앗이 가볍게 턱을 어루만졌다.
“확실히 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이유는 알겠어.”
“그놈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건 몰랐다. 혹시 랭킹 2위인 유하린과 3위인 크리스도 이 정도로 강력한 건가?”
불과 몇 시간 전, 자신 있게 랭킹 3위 안에는 들 것 같다고 말했던 스팅이 불안을 내비쳤다.
“아까 전의 패기는 다 어디로 간 거지? 걱정하지 마라. 그가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뿐이지, 우리가 약한 게 아니니까.”
“흐음. 아니, 아무래도 우리의 계획을 시작하기 전, 변수가 될 수도 있는 최상위권 랭커들의 실력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흥미롭군. 랭커 사냥이라도 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못할 것도 없지. 쟈오 린이 일을 실행하기 전에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나?”
“알지. 돌다리를 두드려 보다가 부셔버리고, 그 옆에 자신이 다리를 새로 짓는 미친놈이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정한다. 게다가 예전부터 유하린, 그 여자와는 한 번쯤 붙어보고 싶었어.”
카이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겁을 집어먹은 두 사람의 행동은 더욱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얻은 것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야.”
스팅은 자신이 스켈레톤과 링크를 하고 있을 때, 카이와 짧은 대화를 나눈 것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킬 것이 있는 자는 강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킬 것이 너무 많으면 약해지는 법이지.”
“우리가 파고들어야 할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군.”
“그래. 그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우리와 똑같이 팔 두 개, 다리 두 개가 달린 인간이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을 해결하지는 못하지.”
오늘의 전투에서 카이를 공략할 실마리를 찾은 두 사람은 미래를 기대했다.
***
“확실한 겁니까?”
카이가 리버티아 상공을 뒤덮은 얇고 푸른 막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인어 족의 국왕, 카리우스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인어 족의 마법을 너무 얕보는군. 자네도 알고 있잖은가? 우리들의 왕국인 아쿠아베라에는 공간인식저해 마법 결계가 씌워져 있다는 것을.”
물론 카이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쿠아베라는 나가들의 끈질긴 추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으니까.
“그럼 저것도?”
“물론 공간인식저해와는 성질이 조금 다르네. 리버티아는 아쿠아베라처럼 계속해서 위치를 변경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죠.”
“때문에 강화보호결계를 둘러놨네.”
“강화보호결계라…… 효과는요?”
“우선 외부에서 독단적으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연결시킬 수 없을 걸세. 외부에서 신호를 보내면 우리가 자체적으로 판단을 한 뒤, 게이트를 열어줄지 말지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지.”
“좋군요.”
카이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번처럼 까마득한 상공에서 텔레포트를 이용해 스켈레톤들을 떨어트리는 방법은 대처하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의 결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그만한 돈이 들어가네.”
“상관없습니다. 돈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보호막을 유지해 주세요.”
“돈 많은 영주님이 있어서 이런 부분은 좋군.”
카리우스가 씨익 웃자, 카이는 내친 김에 다른 부분도 요구했다.
“가능하다면 다른 두 개의 영지에도 같은 결계를 치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못할 거야 없지. 대신 결계를 유지, 보수해야 할 마법사가 그곳에 거주해야 하네.”
“인어 족에서 지원자를 뽑아서 진행해 주십시오. 보수는 넉넉하게 준다는 말도 빼먹지 마시구요.”
카이는 지갑을 여는데 거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돈을 써서 영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낄 정도였다.
‘기습을 당한 게 제법 기분은 나쁘지만 오히려 도움이 된 부분도 있어.’
이렇게 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면, 훗날 크게 화를 입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에라도 부랴부랴 대비를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자, 그럼 숙제가 하나 생겼구나.’
물론 이렇게 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습격자 놈에게 감사를 표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놈에게 줄 수 있는 건 내 주먹뿐이지.’
카이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녀석을 뒤쫓기 위해 자신의 여신님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