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
힐통령 303화
97장 자유의 날개(4)
블리자드는 자신의 샛노란 눈으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가고일들을 노려봤다.
“좀 도와줄까? 생각해 보니까 날아다니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서.”
카이가 질문에 블리자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후우웁, 하아아아.
블리자드가 호흡을 골랐다.
스스로의 몸을 가장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숨이었다.
적당히 긴장했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힘이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
하지만 움직이고자 한다면, 자신의 명령을 충실이 들어줄 수 있는 준비된 육체.
블리자드는 호흡을 한 번 내쉬는 것으로 그 준비를 완벽하게 해냈다.
‘가고일이라.’
그의 눈동자가 세 마리의 가고일들을 시야에 담았다.
리자드맨에게 있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적은 오래전부터 골치아픈 존재였다.
그것은 블리자드에게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마스터에게 방해가 되지 않고, 그의 옆에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적을 마주하더라도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블리자드는 그것을 위해 무사 수행을 떠났다.
수많은 적들을 마주했고, 싸웠으며, 마침내 돌파구를 찾아 그들을 무너트렸다.
‘스톤엣지 산맥의 하피들이 생각나는군.’
하피는 조인족과 매우 흡사한 외형을 지녔는데, 이성이 없기 때문에 몬스터로 분류되었다.
스릉.
블리자드가 돌연 두 자루의 곡도를 역수로 쥐었다.
예전의 감각, 바위산에서 수십 마리의 하피와 벌였던 전투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때의 세포가 전신을 지배하는 듯한 기분과 함께 고양감이 들었다.
동시에 블리자드가 두 팔을 뒤로 쭉 뻗었다.
“크륵?”
“카악!”
가고일들이 그 기묘한 준비 자세에 긴장하는 순간.
블리자드는 팔을 앞으로 뻗으며 쥐고 있던 두 자루의 곡도를 던졌다.
쇄애애애애액!
곡도는 빙글빙글 돌아가며 가고일들에게 날아갔다.
“캬아아아악!”
깜짝 놀란 가고일들은 황급히 날갯짓을 하며 곡도들을 피해냈다.
“키르륵, 키르륵.”
“까까까아악!”
여유롭게 공격을 피해낸 가고일들은 이내 블리자드의 한심함을 비웃었다.
“앗, 빗나갔어요. 역시 도망쳐야…….”
“이카루스. 상대방의 공격은 끝까지 봐야 돼.”
카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말이 옳았다.
쇄애애애액!
다음 순간, 두 자루의 곡도가 나란히 8자 형태를 그리며 되돌아왔으니까.
서걱, 서걱!
“캬아아악?!”
“크르윽! 크르으으윽!”
날카로운 곡도에 뒷목이 베인 가고일 두 마리는 그 자리에서 추락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의 공격이었기에, 엄청난 치명타 데미지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터억!
블리자드는 돌아오는 곡도들을 허공에서 낚아채는 신기를 보이며,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처음에는 마라톤을 하는 사람처럼 가볍게 움직이던 두 다리는,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단거리 육상을 하는 사람의 다리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잠시, 블리자드가 바닥을 박차고 가고일에게 점프했다.
“캬아아…… 깍…… 꺽!”
콰드드득!
추락하는 가고일 한 마리에게 달려든 블리자드는 곡도 한 자루를 녀석의 입에 쑤셔 박았다.
지르던 비명마저 끊긴 가고일의 두 눈이 크게 뜨여지는 순간, 남은 한 자루의 곡도가 놈의 목을 시원하게 베어버렸다.
그것으로 끝.
블리자드는 녀석의 명치를 발판으로 삼아 다시 한 번 도약하며, 다른 가고일에게 달려들었다.
“크르으으윽!”
동료의 죽음을 봤기 때문일까, 추락하던 가고일은 빠르게 날개를 펼치며 도망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블리자드가 한발 더 빨랐다.
서걱!
등에서부터 몸이 X 자로 베여 버린 가고일이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키륵?!”
남은 것은 멀쩡한 한 마리.
녀석은 두 마리의 동료가 모두 당하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아, 한 마리 놓쳤나?”
카이가 옆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쓰려던 순간.
쇄애애애애액!
이번에는 부메랑이 아닌, 도끼처럼 날아간 곡도가 가고일의 왼쪽 날개를 그대로 찢어버렸다.
“캬아아아악!”
녀석은 남아있는 한 쪽 날개를 열심히 파닥거렸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아, 맞다. 이것도 기억해둬.”
초원에 추락하는 가고일을 바라보며, 카이는 한 가지 가르침을 더 내려주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는 법이거든.”
쿠우우우웅!
묵직한 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졌다.
***
가고일 사냥을 끝내고 숲을 가로질러 마을로 돌아가는 길.
이카루스의 두 눈은 블리자드의 등에 자석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이를 쳐다보던 카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블리자드 등 뚫리겠다. 왜 그렇게 쳐다봐?”
“무, 무슨…….”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인 이카루스는, 목소리를 낮추며 카이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저 인간은 첫날에 없었잖아요. 카이 아저씨랑 같이 들어온 거예요?”
“우선 블리자드는 인간이 아니야. 그리고 나도 아저씨가 아니지. 한 번만 더 아저씨라고 하면 재미없을걸.”
“그, 그럼 뭐라고 불러요.”
“형이라고 불러.”
카이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이카루스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몇 살이신데요? 참고로 전 23살.”
“…….”
거스트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조인족은 오래 사는 일족이었다.
하지만 설마 이카루스 같은 꼬맹이가 자신과 동갑일 줄이야.
‘정신연령만 보면 딱 초등학생 수준인데.’
카이는 짧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몇 월 생인데?”
“저 8월 생이요.”
“그렇지!”
두 주먹을 불끈 쥔 카이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내가 형 맞네.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이카루스가 카이에게 재차 질문했다.
“그럼 저 분은 인간이 아니면 뭐예요?”
“리자드맨.”
“리자드맨? 그들은 다 저분처럼 강한가요?”
“그럴 리가. 우리 블리자드가 강한 편이지.”
“역시.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럴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하기는 했어요.”
“그럼, 그럼.”
카이는 마치 제 자식 자랑을 듣는 팔불출 아빠처럼 가슴을 쫙 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미믹도 보여줄게. 데스몬드는…… 어…… 음. 걔는 그냥 안 보는 게 낫겠다.”
“아하. 지난번에 아저…… 아니, 카이 형이 말한 그 와이번이랑 뱀파이어 로드요?”
“새인데 기억력이 참 좋단 말이야.”
이카루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는 아직도 카이가 그런 대단한 존재를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 블리자드가 그의 소환수라는 사실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마스터, 도착했습니다.”
마을에 도착한 카이는 이카루스의 등을 두드렸다.
“오늘 고생했다.”
“……후우. 그런 엄청난 광경을 보고나니 마을이 너무 답답해 보여요.”
“그렇다고 혼자 나가면 큰일 난다? 아까처럼 가고일들한테 공격당할 수도 있어.”
그러자 아까 전의 기억을 떠올린 이카루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그 녀석들 싫어요. 맞은 곳이 아직도 욱신거려요.”
“정 그러면, 나중에 거스트 님한테 한 번 찾아가보지 그래?”
“족장님은 왜요?”
“왜긴. 조인족의 전투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그밖에 더 있겠어?”
“……아!”
카이의 말에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이카루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형 말이 맞아요. 저녁에 한 번 찾아가봐야겠어요. 고마워요!”
“고맙기는. 아! 그리고 형이 부탁 하나만 할까?”
“무슨 부탁이요?”
이카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카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네가 본 엄청난 광경들. 설마 치사하게 혼자 간직할 건 아니지?”
“그래도……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을 텐데요.”
“이걸 보여줘도 안 믿을까?”
카이가 가고일의 흉측한 날개를 꺼내들며 이를 살살 흔들었다.
그러자 이카루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저, 저것만 있으면…… 평소에 날 바보 취급하던 녀석들에게도 자랑할 수 있어!’
“어때. 줄까?”
“주, 주세요!”
“대신 약속해야 해. 오늘 네가 본 광경을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친구들에게 말해주기로.”
“꼭 할게요! 아니, 시켜만 주세요!”
“좋아. 그럼 이 날개는 지금부터 네 거다.”
“고마워요, 형!”
가고일의 날개를 받아든 이카루스가 호수 위를 날아가자, 블리자드가 다가오며 물었다.
“마스터. 이제 어쩔까요.”
“기다려야지.”
“무엇을 말입니까?”
블리자드의 질문에, 카이는 뒷짐을 지고 호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발 없는 말이 움직이는 걸 기다려야지.”
소문.
카이가 기다리는 것은 소문이 퍼지는 것이었다.
***
이카루스는 당장 친구들이 모이는 공터로 날아갔다.
어른들이 나무를 깎아놓은 일종의 놀이터였는데, 할 게 없는 조인족의 아이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 이카루스다.”
“뭐야. 요즘 안 보이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래?”
솔직하게 말해서 이카루스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자신은 물론 조인족 전체를 겁쟁이 취급하는 사람이 인기인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펄럭!
공터에 내려앉은 이카루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봤다.
“이카루스, 오늘 무슨 일 있냐?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친구 하나가 말을 꺼내자, 이카루스가 후후 웃으며 가고일의 날개를 그들 앞에 내놓았다.
“너희들. 이게 뭔지 알아?”
“응? 이게 뭐야.”
“날개인데?”
“누구 날개지?”
“음…… 왜 날개에 털이 없지?”
가고일의 날개는 기본적으로 박쥐의 그것과 쏙 빼닮아 있었다.
때문에 조인족의 날개처럼 깃털로 덮여 있을 리가 없었다.
이카루스는 호기심을 드러내는 친구들에게 오늘 자신이 겪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에이, 말도 안 돼.”
“평소에 하도 망상을 하다 보니 이제 헛것도 보나봐?”
“맞아. 숲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고 어른들이 그랬어.”
친구들이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자, 이카루스가 가고일의 날개를 흔들었다.
“그럼 이건 뭐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가고일이라는 몬스터의 날개라고.”
“몬스터……?”
“그래. 너희도 족장님과 장로님들이 옛날 얘기를 해주실 때 들었지? 세상에는 몬스터라고 불리는 아주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있다고.”
“그치만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은 다 거짓인걸.”
“거짓말이 아니야.”
이카루스는 긴가민가 하는 친구들에게 열변을 토했다.
그렇게 평화롭던 조인족 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칠흑의 해역.
시 서펜트 할리는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자였다.
그는 뮬딘 교의 손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괴물이였지만, 그 본성이 어디가지는 않았다.
뮬딘 교는 할리를 만들어낼 때, 동대륙의 용을 베이스로 하되 최대한 드래곤을 카피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할리는 드래곤처럼 막강한 힘과 더불어 그들의 탐욕까지 쏙 빼닮게 되었다.
모든 드래곤들이 저들만의 ‘레어’를 가지는 것처럼, 할리도 자신만의 레어를 가지고 있었다.
총 12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스스로 명명하기를 칠흑의 군도라 불리는 장소가 바로 그의 레어였다.
그리고 드래곤의 레어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가디언.
둥지의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레어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물론 칠흑의 군도에도 그런 역할을 맡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할리 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7미터의 거대한 신체는 흑암으로 이루어져 무엇보다 단단해보였다.
심지어 뒤쪽으로 가지런하게 접힌 네 쌍의 날개는 그가 비행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가고일들의 왕, 카즈룬.
그가 바로 칠흑의 군도의 가디언 역할을 맡고 있는 존재였다.
“36번째 섬. 일명 ‘새장’으로 보냈던 가고일 세 마리의 반응이 소실되었습니다.”
[흐음……? 왜…… 그곳으로 가고일들을…… 보냈지……?]
“새장을 나온 존재가 감지되어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재미있군…… 그러고 보니…….]
번뜩.
감겨있던 할리의 거대한 눈동자가 뜨여졌다.
그는 어제 자신을 찾아왔던 건방진 인간을 떠올렸다.
‘그 애송이가 떨어진 곳도 분명 새장이었지…….’
어쩌면 숲을 빠져나온 것이 그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터…… 새장을 빠져나오는 존재만…… 확실히 처리하라.]
“할리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다음 순간 할리는 새장에 갇혀 있는 조인족들과, 그곳으로 들어간 한 명의 인간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렁이들이 아무리 모여도 용이 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