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
힐통령 304화
97장 자유의 날개(5)
초원에 대한 정보는 이카루스의 입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애초에 조인족이 가질 수 있는 취미라고는 사냥 또는 낮잠 정도 밖에 없었기에, 초원에 대한 관심은 금새 뜨거워졌다.
처음에는 모두가 이카루스의 말을 의심했으나, 그가 증거물로 제시하는 가고일의 날개.
그것이 조인족들로 하여금 ‘혹시?’라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결국 조인족들이 초원을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
“이, 이카루스가 말하던 초원이 이것인가…….”
“좀 비켜보게, 나도 좀 보세.”
“아, 자꾸 밀지마세요.”
일전에 카이와 블리자드가 개척해놓은 길을 따라서, 수백의 조인족들이 초원 구경에 나섰다.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던 블리자드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마스터. 기다리신다는 게 이것이었습니까?”
“응. 왜냐하면, 저들의 마음속에는 공포심이 박혀 있으니까.”
그 상태에서 섬을 탈출하자고 강요해봤자, 반발만 이어질 뿐이다.
“하지만 저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저들이 공포심을 느끼는 것과 초원을 보는 것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블리자드의 질문에 카이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블리자드, 공포를 극복해낼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뭔지 알아?”
“음…… 용기입니까?”
“그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야. 공포를 극복할 때 가장 먼저 느껴야 하는 건…….”
카이의 두 눈이 초원을 멍하니 쳐다보는 조인족들을 바라봤다.
“반발심을 느끼는거야.”
“반발심이요?”
“내가 왜 공포에 질려서 이걸 참아야 되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어라, 생각해 보니 좀 기분 나쁜데……? 아니, 생각할수록 엿 같네?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반발심이거든.”
“아!”
블리자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의 지혜에 감탄했다.
“역시 마스터는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뭐. 옛날에 학교 다닐 때 괴롭힘당하는 친구들을 도와준 적이 있어서 제법 알고 있지.”
어깨를 으쓱거리는 카이에게 블리자드가 재차 질문했다.
“그럼 이 다음 순서는 어떻게 됩니까?”
“첫 번째 단추는 성공적으로 끼워 넣었어. 조인족에게 자유라는 이름의 갈증을 느끼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잠깐의 반발심이 수백 년 동안 느끼던 공포를 밀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빙고, 그러니까 이쪽에서는 계속해서 보여줘야지.”
“보여주다니, 뭘 말입니까?”
“저들을 억압하는 존재들. 그들이 사실은 뭣도 없는 놈들이라는걸.”
“그 말씀은……?”
블리자드가 눈을 반짝였다.
이에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포스러웠던 존재가 허무하게 쓰러지는 걸 바라보는 것. 그것이 두 번째 단추가 될 거야.”
* * *
“더 빠르게!”
후우웅!
“변화가 느리다. 조인족은 이 세상 그 어떤 종족보다도 자유로운 혼을 지닌 이들. 너의 움직임에 한계란 없다.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여라!”
거스트의 입에서는 평소의 인자하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혹독한 훈련 교관의 목소리가 줄기차게 새어나오며 이카루스를 단련시켰다.
‘으으…… 죽을 것 같아.’
이카루스가 아무리 나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지금 배우는 훈련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
그건 물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수영을 본격적으로 배울 때 느끼는 기분과 흡사했다.
하지만 효과가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카루스를 바라보는 거스트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현재 그는 누구보다 놀란 상태였다.
‘이 녀석, 골칫덩어리인줄만 알았는데…….’
그의 날개 근육은 그 어떤 조인족보다 유연했고, 동시에 질겼다.
그 말은 똑같이 한 번 날갯짓을 할 때 힘을 절약하면서,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는 뜻.
심지어 이카루스는 매 답게 비행 속도 또한 발군이었다.
‘지금은 힘들어할 수밖에.’
이카루스는 지금껏 근본 없이 앞으로 빠르게 날아가는 것만을 일삼아 왔다.
그랬던 녀석이 인제 와서 변화롭고, 자유로운 비행을 익히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들까.
‘하지만 내가 가르치는 것들을 모두 흡수하게 된다면…….’
하늘의 제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가 될 것이다.
‘게다가…… 결전의 날이 오는 것이 머지 않았다.’
세계의 구원자라 불리는 사도가 방문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새장에 갇혀 있던 조인족들이, 드디어 날개를 활짝 펼 시간이 되었다는 뜻.
“이카루스! 거기선 날개를 접고 더 빨리 움직여라!”
“크윽…… 네!”
거스트가 훈련 강도를 조금 더 높였다.
* * *
조인족들에게 초원이라는 장소가 공개된 지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이카루스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몸.
일전의 여리여리하던 몸은 최근 한 달 동안 누가 봐도 놀랄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키가 크고, 근육양이 늘어났다.
최근 젊은 조인족들은 이카루스를 마주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그에게서는 일족의 어른들을 마주했을 때나 느낄 법한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물론 그것은 조인족 전사가 지닌 특유의 날카로운 기세였다.
“그러고보니 슬슬…….”
마을의 호수에서 가볍게 목을 축인 이카루스는 그 길로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공터로 향했다.
“왔는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블리자드였다.
물론 지금은 동경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와라.”
거스트에게 조인족으로서의 움직임과 비행 수업과 이론을 배우고 나면.
이카루스는 블리자드에게는 그 배움을 쏟아내며 하나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블리자드가 전력으로 그를 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까딱까딱.
두 발을 움직이지 않은 채,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있는 블리자드.
그의 ‘한 손’을 뚫고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빼앗는 것.
그것이 이카루스가 그와 함께 치루는 실전 교육이었다.
“그럼 갑니다.”
이카루스가 두 날개를 넓게 펼치며 도약을 준비했다.
다음 순간, 눈을 빛낸 이카루스가 두 날개를 강하게 움직였다.
파아아앙!
그가 서있던 바닥의 흙이 비산했고, 이카루스의 신형은 엄청난 속도로 블리자드에게 날아갔다.
물론 블리자드는 당황하지 않고, 한 손을 침착하게 휘둘러 이카루스의 발톱을 튕겨냈다.
“거스트님이 이렇게 무식하게 돌진하라고 가르치시던가?”
“그럴 리가요.”
튕겨 나간 이카루스가 돌연 허공에서 360도를 돌며 두 발을 뻗어냈다.
콰드드드득!
이를 한쪽 팔로 막아낸 블리자드의 몸이 뒤로 쭈우욱 밀려났다.
블랙 리자드맨의 단단한 비늘이 아니었다면, 피부가 찢어졌을 만큼 날카로운 발톱 공격이었다.
이카루스는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미련 없이 그의 팔을 놓으며, 몸을 360도로 회전시켰다.
이번에는 횡 방향으로.
“음……!”
블리자드는 황급히 팔을 들어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운 360도 회전 발차기를 막아냈다.
찌릿찌릿.
막아낸 팔뚝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블리자드는 웬만한 플레이어조차 가볍게 이겨버리는 강력한 소환수.
“이 정도로는 어림 없다.”
콰아아앙!
블리자드가 이카루스의 발목을 붙잡고는 그대로 땅에 처박아버렸다.
“쿨럭! 쿨럭!”
이카루스가 연신 기침을 토해내자, 블리자드는 그의 발목을 놓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도는 좋았지만 움직임이 너무 크다. 공격이 막혔을 때의 대안도 없고.”
“이게 서로의 목숨을 노린 거였다면 블리자드 네 말이 맞지.”
한 줄기의 음성이 블리자드의 말에 반박을 하고나섰다.
“마스터……?”
블리자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되묻자, 둘의 전투를 지켜보던 카이가 씨익 웃었다.
“하여튼 어린이들의 잔머리는 예측할 수가 없다니까.”
“그게 무슨…… 설마?”
블리자드가 황급히 자신의 목을 내려다봤다.
당연히 걸려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목걸이는 없었다.
“헤헤…….”
오히려 누워서 신음을 흘리던 이카루스가 실실 웃으며 왼팔을 흔들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목걸이가 쥐어져있었다.
“도대체 언제?”
“블리자드. 적과 마주했을 때는 그 대상의 특성을 알아내는 것도 중요해.”
“조인족의 특성이라면 비행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빠른 움직임이 아닙니까?”
“거기에 두 가지 더 있지.”
카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날카로운 깃털을 주우며 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바로 깃털을 투척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운이 좋았죠.”
이카루스가 자리에 앉으며 숨을 골랐다.
“360도로 회전을 할 때, 블리자드 님의 시선은 제 회전 발차기에 온전히 쏠려 있었잖아요.”
“아아…… 그 때인가.”
설마 그 순간 깃털을 발사해 목걸이를 끊어버릴 생각을 하다니.
“마스터의 말대로, 잔머리가 뛰어나군. 하지만 그것은 불리한 전투를 뒤집을 수 있는 전사의 능력 중 하나. 이번에는 나의 패배로군.”
블리자드가 시원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이에 이카루스는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붕붕 휘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블리자드 님이 전력으로 임하셨으면 저 같은 건…….”
“너무 겸손할 필요는 없어. 애초에 그런 룰이었으니까. 당당하게 승리를 즐겨.”
“승리…….”
이카루스가 그 단어를 입안에서 몇 번이고 곱씹어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승리감이었다.
‘카이 형이랑 알고난 뒤로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 참 많다니까.’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카루스가 카이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형이 지난번에 그러시지 않았어요? 블리자드에게 목걸이를 빼앗으면 부탁할 일이 좀 있다고.”
“아아, 그랬지.”
환하게 웃어보인 카이가 입을 열었다.
“너, 좀 날아다녀야겠다.”
* * *
이카루스가 거스트, 블리자드와 함께 훈련을 하는 한 달이라는 시간.
그 동안 조인족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유행이 생겼다.
바로 숲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버섯이나 과일, 채소 등을 준비한 뒤, 숲 가장자리에 앉아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앗…… 엄마. 초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뭔가 시원해. 뭔가 빵하고 뚫리는 기분이야!”
“호호. 너도 그러니?”
“초원이라는 것은 몇 시간을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군.”
“심지어 바람이 이렇게 강하게 부는 곳이 있다니…… 아아, 잠이 저절로 오는구나.”
조인족의 특성상 바람과의 상성은 최상.
당연히 바람이 강하게 부는 바닷가 섬의 초원은 그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물론 대다수의 조인족이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때, 그 이상을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저길 뛰어다니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카루스 녀석은 그걸 실제로 해봤다고 하던데. 그러고도 멀쩡한 걸 보면…… 괜찮은 거 아닌가?’
발전이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조인족, 특히 젊은 조인족들은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손바닥만 한 숲에 갇혀서 생활했으니까.
하지만 날고싶다는 생각만 가득할 뿐.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용기를 지닌 조인족은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 용기 있는 자가 있었다면, 숲 밖의 초원을 아무도 몰랐을 리는 없었으니까.
“아아, 날고싶다.”
“진짜 끝내주는 기분일 텐데.”
젊은 조인족들이 매번 초원 위를 비행하는 그림만을 머릿속으로 그릴 때.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이카루스가 숲의 외곽 지역에 나타났다.
“응? 이카루스 녀석, 요즘 보기 힘드네.”
“……잠깐. 그런데 이카루스가 저렇게 키가 컸던가?”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이카루스는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더니, 말릴 틈도 없이 날개를 펼쳤다.
펄럭!
“저, 저놈이 대체 무슨……!”
“이카루스! 위험하다! 지금 당장 내려…… 내려와야…… 하는데.”
조인족의 아이가 마을의 금기를 어기고 숲을 나가 자유롭게 날갯짓을 한다.
심지어 초원을 내려다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다는 눈빛을 비추는 중이었다.
지금 당장 법을 어긴 그를 야단쳐야 하지만, 그의 자유로운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었다.
자유롭게 숲보다 높은 하늘을 비행하는 그 모습은, 조인족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불씨를 지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