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힐통령 307화
97장 자유의 날개(8)
먹구름이 드리워져 어둡던 일대를 환하게 물들이는 황금빛 신성력의 파도.
씨 서펜트 할리마저 성검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공격력에 움찔거리며 몸을 주춤거렸다.
카이는 주변의 모든 사물이 천천히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먹구름이 토해내는 빗방울도, 천둥을 동반한 번개나 쓰나미와 같은 해일들.
하나하나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할리의 공격들이 모두 느려졌다.
파-지-직!
천천히, 아주 느리게 내리치는 번개는 마치 잎을 피우는 꽃처럼 아름다웠고.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빗방울들은 하나하나가 보석 같았다.
‘이건 도대체……?’
체란티아와 시미즈.
일찍이 두 사람을 강림시켰을 때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상황에 카이가 당황했다.
파앗!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뒤바뀌었음 느꼈다.
“여긴…….”
그곳은 성지, 혹은 잊혀진 신전이라 불리는 곳.
카이도 이전에 한 번 방문했던 적 있었던 장소였다.
“지르칸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신전이잖아.”
카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확신을 가졌다.
물론 신전의 모습은 그때처럼 쓰러져가고, 낡은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카이가 슬쩍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반투명하네.’
그것은 영원한 안식을 통해 불러냈던 영혼 상태의 지르칸이나, 데스몬드의 모습과 흡사했다.
칠흑의 해역에서 사투를 벌이던 자신이 왜 이곳에 소환될 이유가 뭘까?
그 질문에 답해줄 자는 이 길의 끝에 있으리라.
이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기에, 방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지르칸에게 배신을 당했던 방.
예배실로 추정되는 그 방에는 한 남성이 사제복을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기도 중이었다.
“당신의 빛이 언제나 세상을 밝게 비추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기도를 마친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는 카이보다 조금 더 컸으며, 근육은 딱 보기 좋을 만큼만 들어찬 몸매였다.
천천히 몸을 돌린 남자가 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벗었다.
“아……!”
카이는 그를 보는 순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패트릭.
비록 사념으로 만났을 때의 모습보다는 훨씬 어린 모습이었지만 그는 패트릭이었다.
금발금안의 무표정한 남자는 카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인가.”
“예전에 하녹스의 신전에서 한 번…….”
“그건 내가 남겨놓은 사념일 뿐이었지.”
그렇다면 지금은 다르단 소리인가?
카이가 눈빛으로 묻자, 패트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나는 온전하다. 이곳은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만의 독립적인 장소이고.”
“대단한 능력이군요.”
“그대와 잠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마련한 장소일 뿐. 길게 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야기라고 하시면……?”
“늙은이의 오지랖이지.”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아 보이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해도 큰 설득력은 없었다.
패트릭은 묘한 시선으로 카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불렀더군.”
“예, 패트릭 님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제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적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내가 세운 검술관에서 모든 것을 배우지 않았던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전 여전히 약하기 때문입니다.”
할리를 상대할 수도 없고, 헬릭의 말에 따르면 강력한 마계의 존재들도 감당할 수 없다.
‘힘이 없으면 지킬 수가 없어.’
지키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다.
그러한 마음을 뒷받춤해줄 수 있는 힘.
그런 힘이 있을 때 비로소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
패트릭은 카이의 그 확고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대는 이미 체란티아와 시미즈를 몇 번 불러냈기에 잘 알고 있겠지. 강림이 무엇인가.”
“선대 사도들의 일부 능력치를 빌려서 쓸 수 있는 기술, 아닙니까?”
“맞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나?”
“……!”
패트릭의 말에 카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발언은 카이가 줄곧 해오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실 데스몬드와의 전투가 끝났을 때부터 비슷한 생각은 계속 해왔었으니까.
‘빛의 군단은 본래 체란티아의 기술이야. 그런데 이걸 내가 스킬 형태로 배웠다는건…….’
혹시, 강림 스킬은 선대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선대의 기술을 후대에 물려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스킬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이 빛의 군단 스킬을 터득한 이유도 납득이 되었다.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진작 느끼고는 있었나 보군. 그대의 생각이 맞다. 강림 스킬이란 선대의 몸을 직접 자신의 몸으로 펼침으로써, 그 감각을 기억하고 최종적으로는 스스로 구현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지. 한 마디로 선대의 사도들이 계속해서 후배를 학습시키는 것이다.”
“……갈 길이 멀군요.”
“생(生)이란 항상 그렇다. 돌아보면 지나온 길은 항상 짧아 보이고, 가야 할 길은 항상 까마득해 보이지. 하지만 잊지 말거라. 인생이란 출발점은 정해져 있되, 결승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만하지 않고,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달려나가겠습니다.”
카이의 태도에 크게 패트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로부터 사도는 순백.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사람만이 이을 수 있었다.”
찔끔.
카이가 찔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타인을 도와주게 된 계기가 보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순백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패트릭은 그 부분을 가감없이 찔렀다.
“하지만 그대는 다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상대에 따라 잔혹해지기도 하지.”
“크으윽…….”
허를 찌르는 팩트 폭력에 카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패트릭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는구나.”
“……예?”
카이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시미즈, 체란티아, 그리고 나까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우리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하지만 그대라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패트릭이 가까이 다가오며 카이의 머리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대는 기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지. 왜냐하면, 그대는 탐욕을 지닌 인간이니까.”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실력을 계속해서 향상시키고자 하는 카이의 욕심과 노력.
그것을 패트릭은 크게 칭찬하는 중이었다.
“선과 욕망이 한데 어우러졌을 때, 과연 어떤 형태가 되는지 우리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 말씀은…….”
“그대가 우리에게 보여다오.”
패트릭이 손을 내밀었고, 카이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손을 마주잡았다.
“네 번째 사도여, 그대는 우리의 미래이다.”
동시에 막대한 신성력이 손끝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띠링!
[강림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영구적으로 20개의 선행 스탯이 소멸됩니다.]
[패트릭이 사용자의 육신에 강림하였습니다.]
[그의 제한된 능력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스킬 - 하늘을 가르는 검을 획득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스킬 - 신성 폭주를 획득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스킬(패시브) - 광휘의 검술을 획득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스킬(패시브) - 패트릭의 가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스킬(패시브) - 패트릭의 가호 효과로 모든 움직임에 신성 효과가 추가됩니다.]
“아아……!”
체란티아, 시미즈가 강림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었다.
왜 패트릭이 교단 역사상 최강의 성기사라 불렸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는 순간.
카이는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패트릭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하던 얼굴을 풀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요즘 그대 덕에 여신님께서 자주 웃으시더군.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그, 그야 물론입니다.”
“아픔이 많으셨던 분일세. 절대 그분을 울리지 말게나.”
“예.”
“자, 그럼 이제 돌아갈 시간이네.”
패트릭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위로 떠오른 마법진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공간이 카이를 뱉어냈다.
* * *
“……!”
카이는 자신이 전장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전의 모습은 물론, 패트릭의 모습도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할리.’
그의 눈으로 느릿느릿한 모습으로 수압포를 모으고 있는 할리가 들어왔다.
‘이런 식의 애프터 서비스, 정말 마음에 들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카이가 입술을 달짝거렸다.
“신성 폭주.”
콰아아아아아!
스킬을 사용하자 온 몸의 신성력이 해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돌아오는 이득은 상당했다.
띠링!
[신성 폭주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신성 폭발 스킬이 강화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150만큼 상승합니다.]
신성 폭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증가폭을 보여주는 상승 스킬!
동시에 카이의 몸이 후끈한 공기를 뱉어냈다.
그의 몸에 닿는 빗방울들이 순식간에 온수로 바뀔 정도의 뜨거운 온도.
“미믹, 뜨거워도 조금만 참아줘.”
“까악!”
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 미믹이 그대로 앞으로 날아갔다.
[하등한 인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구나!]
할리는 지난 번의 전투 때, 수압포로 미믹을 역소환시키고 카이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쏘아내는 수압포는 그가 진심으로 상대를 멸살하고자 쏘아내는 필살의 일격.
그는 예언자가 아니었지만, 몇 초 뒤의 미래를 예상했다.
‘건방지고 오만한 인간 녀석. 제 주제를 모르고 까불다가 이렇게 죽는군.’
그런 확신이 들 정도로 자신의 수압포를 강력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수압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공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졌다.
“……후우.”
미믹의 등 위에 중심을 잡고 서 있던 카이가 두 손으로 성검을 붙잡았다.
카이는 수압포를 끝까지 쳐다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문득, 여명의 검술관의 후이 관장이 누누이 하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한 번을 휘두를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으로. 마치 자신의 검이 하늘마저 벨 수 있다는 각오로 휘두르거라.
‘아, 그게 이런 뜻이셨군요.’
카이는 이번 일이 끝나면, 그가 좋아하던 술이나 한 병 사 들고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검을 내리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자신이 마치 하늘마저 벨 수 있다는 각오를 품은 채.
“하늘을 가르는 검.”
번쩍!
칠흑의 해역.
1년 365일 할리가 만들어낸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어둠에 잠긴 바다.
[이, 이런 말도…… 말도 안 되는……!]
성검이 수압포를 버터처럼 부드럽게 가르며 지나간다.
다음으로 가른 것은 세상을 뒤덮은 먹구름과 건물 높이만큼 치솟은 쓰나미.
마지막으로 가른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할리의 머리에 달린 뿔이었다.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