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
힐통령 311화
98장 동부의 신성 (2)
무려 한 달 만에 방문하는 천상의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무지개 분수도 그대로고, 화원도 그대로네. 아! 대신 그림이 많이 추가되었구나.’
가장 중요한 헬릭은 그녀가 항상 차를 마시고 쿠키를 먹던 테이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대체 뭘 하시는 거지?’
호기심이 들어 가까이 다가간 카이는 그녀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헬릭은 눈을 꼭 감은 채, 검지와 중지를 양쪽 관자놀이 올려놓고는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사탕이가 온다…… 초콜릿이 온다…… 케이크도 손을 잡고 온다…… 앗! 아이스크림도 같이 온다…….”
“…….”
일종의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는 모양.
이를 쳐다보던 카이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돌연 소리를 질렀다.
“어어어어!?”
일부러 과장된 몸놀림으로 바닥에 넘어지는 카이.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헬릭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이곳으로 이동되었네…….”
열 살짜리 아이도 간파할 수 있을 정도의 볼품없는 연기였지만,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헬릭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지, 진짜 되는 것이냐!”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는 헬릭.
그녀는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팔짱을 끼며 다시 위엄 넘치는 표정을 되찾았다.
물론 그것은 본인의 희망사항일 뿐.
연신 씰룩거리는 입꼬리와 볼살은 그녀가 행복에 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카이여. 그대는 나의 위대함을 조금 더 찬양해도 좋으니라.”
“와아. 태양신 만세에.”
카이가 성의 없게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찬양했다.
그럼에도 헬릭은 몹시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그대도 당황했을 것이다. 바쁜 업무 중에 갑자기 이곳에 소환되었으니…… 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평소에 간식을 잘 챙겨주지 않아서 생긴 문제. 앞으로는 유의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뭘 가져왔느냐?”
카이에게 가까이 다가온 헬릭은 쪼그려 앉아 카이의 손에 잡힌 꾸러미를 보며 물었다.
“아, 오늘은 평소에 가져오던 것과 조금 다릅니다.”
꾸러미를 연 카이는 해외의 귀족과 상인들이 보낸 먹거리를 하나씩 꺼냈다.
“이건 아란 왕국의 분자 사탕이래요. 입 안에서 톡톡 튄다고 하니 재밌으실 거예요. 그리고 이건 하비에르 왕국 특유의 건조한 환경에서 만들어낸 14겹짜리 페스트리 쿠키라고 하네요.”
“우와아아아!”
헬릭의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손이 자동으로 꾸러미를 향해 가자, 카이가 이를 가볍게 제지했다.
“왜, 왜 그러느냐?”
헬릭이 굉장히 서럽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건 바로 음식을 눈앞에 두고 못 먹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하루에 과자 세 개씩만 드셨어요?”
“응!”
“양치는 제대로 치셨어요?”
“으으응…….”
헬릭이 거짓말을 할 때는 티가 난다.
왜냐하면 목소리에 실린 힘부터가 다르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니까.
게다가 바닥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연신 가늘게 떨리는 중이었다.
“아- 해보세요.”
카이가 요구했다.
“아-”
물론 치아 상태를 봐도 비전문가인 카이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한정적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카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양치를 잘 안 치시는 것 같네요. 계속 이러시면 같이 치과를 가는 수 밖에 없겠어요.”
“치과? 이름만 들어도 불길한 장소구나.”
헬릭이 덜컥 겁을 냈다.
그야 치과는 이름만 들어도 가기가 싫어지는 마성의 단어였으니까.
“가기 싫으면 양치질 잊지 말고 제대로 하세요.”
“응응. 그러겠느니라.”
“……그럼 여기 있습니다.”
카이가 간식 보따리를 건네자, 헬릭이 두 손을 공손하게 내밀어 이를 받았다.
‘우리 헬릭 님은 예의까지 바르시네!’
잘했다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카이.
그는 과자를 꺼내며 연신 행복한 미소를 짓는 헬릭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문득 패트릭이 자신에게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귀여운 헬릭 님에게 아픔이 많았다니, 그건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카이는 그 마음을 지그시 눌렀다.
만약 그것이 정말 헬릭을 괴롭게 만들었던 기억이라면.
떠올리게 하는 것은 굉장히 미안한 일이었으니까.
“그냥 이대로만 자라주세요. 헬릭 님은.”
“웅?”
헬릭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카이를 올려다보며 연신 물음표를 띄웠다.
***
“여긴 언제와도 분주하네.”
라시온 왕국의 수도, 레이아크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그야 초보자들이 시작의 마을로 선택하기엔 안성맞춤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성문만 나가면 초보자 사냥터부터 골고루 위치해있지.’
수도에서 시작을 하면, 100레벨까지는 아무 걱정 없이 캐릭터를 육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리버티아도 이래야하는데.’
동시에 카이의 눈동자에 짙은 아쉬움이 떠올랐다.
리버티아 근처에도 사냥터가 있긴 했지만, 그곳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최소 300레벨을 바라보는 유저들만이 사냥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억지로 사냥터를 개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아쉬움을 삼킨 카이는 북적이는 거리를 넘어 왕궁으로 향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오늘따라 왕궁의 입구에는 긴 마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서 있는 중이었다.
‘나도 줄 서야겠네.’
얌전히 줄에 합류한 카이는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따라 철저하게 신분 검사를 하는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 뒤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본 카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뒤파 남작 아닌가, 이런 곳에서 보다니 반갑군.”
“신바 백작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네만 오늘은 줄이 길어서 그런지 기분이 영 안 좋군.”
“괜찮으시다면 제 앞에 서시지요. 저는 조금 늦게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정 그렇다면야 뭐…… 남작의 호의는 기억해두겠네.”
일명 새치기를 하는 존재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그것도 몰래 끼어드는 새치기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내세운 협박성 새치기였다.
“흐음.”
그의 마부가 끌고 있는 마차가 카이의 뒤까지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혹시 성함이……?”
마차의 운전석에 앉아있던 마부가 카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카이는 뒤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카이라고 합니다.”
“아아! 혹시 동부 쪽의 그…… 리버티아를 이끌고 계시는?”
“예.”
“아하, 카이 남작님이셨군요. 시골에서 올라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카이를 내려다보는 마부가 피식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주인이 백작인 것에 비해 상대는 마차도 없는 시골 영지의 남작이었으니까.
‘……어딜 가나 이런 놈들은 꼭 하나씩 있지.’
힘 있는 자들의 밑에서 그 권력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
카이는 더 이상 그런 이와 말을 섞기 싫었기에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하지만 마부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이 남작님께서는 마차를 타고오지 않으셨군요?”
“예.”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상당히 노여워하실 수도 있을 텐데, 괜찮으십니까?”
“그건 그쪽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카이가 못을 박아버리자 마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감히 반박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무리 백작의 마차를 몰고 있다지만, 상대는 귀족이었으니까.
“크흠.”
그래서 그 주인이 입을 열었다.
창문을 통해 살짝 고개를 내민 마차의 주인이 손을 까딱였다.
“카이 남작이라고 했나? 굉장히 젊군.”
아무리 카이라도 백작이 하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예, 젊습니다.”
“나 서부의 신바 백작일세. 자네에 대한 소식은 몇 번 들었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유능한 친구라고.”
그의 말에 카이가 조소를 지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유능하다라.’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유능하지만 그래봐야 제 또래에 비해서 우수한 수준이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좋게 봐줘서 감사하군요. 저도 뭔가 덕담을 해드리고 싶지만, 백작님에 대해서는 딱히 들은 바가 없어서.”
카이의 말에 신바 백작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리버티아를 시골이라 비하했는데, 카이는 신바 백작에 대해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한 마디로 이런 시골까지는 네 놈의 이름이 퍼지지 않았다는 비꼬기였다.
물론 카이는 실제로도 신바 백작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젊은 남작이여, 인생의 선배로서 충고를 하나 해도 괜찮겠나?”
“아뇨. 안 괜찮으니 하지 말아주십시오.”
카이가 딱 잘라 거절하자 신바 백작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까지 자신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굴었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자작들은 물론 같은 백작들조차도 내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리는데…….’
서부의 대영주인 신바 백작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물론 화가 난다고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자신의 영지였다면 저런 버릇없는 남작을 두고두고 혼내줬을 테지만, 이곳은 왕궁의 입구였으니까.
‘놈. 운 좋은 줄 알아라.’
신바 백작은 거칠게 창문을 닫으며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후우, 이래서 근본 없는 시골 촌것들은…… 그렇지 않니?”
“맞습니다, 아버님.”
“들어보니 리버티아는 짐승들이 사는 장소라고 하던데, 가본 적 있느냐?”
“제가 아무리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지만, 그런 시골까지 가서 장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린내와 짐승 똥 냄새가 진동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과연 그렇겠구나.”
제 아들과 대화를 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카이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재미있네.’
카이는 신선함을 넘어 당황스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최근 들어 감히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존재는 없었으니까.
‘하긴. 최근 NPC들이랑 부대끼는 일이 별로 없기는 했지.’
그래서인지 잠시 잊고 있었지만, 원래부터 미드 온라인의 귀족 중에는 저런 이가 많았다.
예전 아쿠에리아의 영주와 화이트홀의 영주도 저랬으니까.
오죽하면 유저들이 귀족 NPC의 갑질 좀 줄여달라고 페가수스 사에 매번 항의를 하겠는가.
‘솔직히 나만 가지고 구시렁거리면 참아주려고 했는데…….’
자신의 영지민인 아인종들을 저런 식으로 비하하는 건 도저히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중력장.”
카이가 살짝 중얼거리자, 신바 백작의 마차에 가해지는 중력이 순식간에 몇 배나 증가했다.
여기서 카이의 절묘한 컨트롤이 빛을 발했다.
마부나 안쪽의 인물들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고, 오직 마차에 실리는 중력만 증가시킨 것이다.
당연히 부하를 이겨내지 못한 마차가 비명을 내질렀다.
콰지지지직!
“헉!”
“이, 이게 무슨!”
깜짝 놀란 신바 백작과 그의 아들이 부서진 마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고, 마부가 그들을 부축했다.
중력장 스킬을 해제한 카이는, 정신을 못 차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그의 속을 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래서 마차는 튼튼한 걸 써야 되는데. 돈 몇 푼 아끼겠다고 싸구려 쓰면 큰일 나는 법이지.”
“이…… 이!”
봉변을 당해 얼이 빠진 신바 백작의 속을 제대로 긁는 중얼거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