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
힐통령 312화
98장 동부의 신성 (3)
거인이 짓밟기라도 한 듯 산산조각이 나버린 고급스러운 마차는 단번에 주변 귀족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인가?”
“신바 백작의 마차가 갑자기 부서졌습니다.”
“……꼴좋군.”
“그야말로 태양신 만세로군.”
“주, 주인님! 들리겠습니다.”
“크흐흠!”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프라이드, 즉 자존심이 높은 존재들이다.
그런 이들을 더 높은 권력으로 무시하며 갑질을 해대는 신바 백작은 당연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그의 봉변은 주변 귀족들에게 시원함과 동시에 고소함을 안겨주었다.
“이이……!”
마부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신바 백작을 빠르게 부축한 뒤, 그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괘,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닥쳐라.”
낮게 으르렁거리며 죄 없는 마부에게 화풀이를 한 신바 백작은 카이를 노려보았다.
“방금 전에 뭐라고 했지?”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물론 그렇게 노려본다고 기가 죽을 일 없는 카이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것이 신바 백작의 속을 다시 한 번 긁었다.
‘감히 나와 대화를 하면서 저딴 표정, 저딴 목소리를 뱉어내?’
누가 봐도 자신을 귀찮게 여기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신바 백작의 이마로 핏줄이 올라섰다.
“헛소리! 방금 전에 분명……!”
“무슨 일입니까.”
왕궁 주변을 순찰하던 기사들이 소란을 감지하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감히 기사 따위가…….’
큰 소리로 호통을 치려던 신바 백작이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이 가슴에 달고 있는 엠블렘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저 문양은 분명…….’
오직 국왕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두 개의 로얄 나이트 중 수호 기사단의 문양이었다.
아무리 백작의 위(位)를 지니고 있다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로얄 나이트.
신바 백작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응대했다.
“아무 것도 아닐세. 마차가…… 마차가 갑자기 고장 나서 말일세.”
“……고장입니까.”
수호 기사단원들은 산산조각이 난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시켜 고쳐놓도록 하겠습니다. 신바 백작님.”
“허허, 왕실에서 이토록 신경을 써주다니, 내 잊지 않겠네.”
다른 귀족들이 쳐다보는 앞에서 왕실의 실세 중 하나인 수호 기사단이 자신의 면을 세워주자, 신바 백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카이를 쳐다보며 살며시 비웃음을 날렸다.
‘놈. 이것을 보면 격의 차이를 어느 정도 느꼈겠지.’
수호 기사단을 멍하니 쳐다보며 입도 뻥긋 못하는 저 한심한 작태를 보라.
‘그래. 내가 동부의 촌놈을 직접 상대하면서 열을 올릴 필요는 없지.’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권력이 있으니까.
신바 백작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헌데 오랜만에 왕궁을 방문해 보니, 그동안 귀족의 질서가 땅에 떨어진 것 같군.”
“예? 그게 무슨…….”
“허허,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네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말을 하다가 끊어버리는 것!
수호 기사단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신바 백작은 인심을 쓴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허참. 그렇게들 바라보면 말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사소한 말다툼이 조금 있었을 뿐이니 괘념치 마시게들.”
“누구와…….”
“크흐흐흠!”
신바 백작을 말을 하기보다, 누군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당연히 그 시선의 대상은 카이였다.
‘유치하기는.’
그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카이는 어이가 없어져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분이십니까?”
수호 기사단원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흐으음?”
카이가 재미있다는 듯 말끝을 올리며 신음했다.
확실히 눈앞의 수호 기사단원들은 모두 초면.
‘저번에 파발과 대결을 할 때 자리에 없던 녀석들이구나.’
그 말은 수호 기사단 내부에서도 신입이나 다름없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제 이름은…….”
카이가 입을 열려던 순간, 뒤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여기 모여서 뭐하는 거지?”
‘아, 망했다.’
카이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굉장히 낯익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신이 왕궁에서 가장 마주치기 싫었던 인물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충성!”
신입 수호 기사단들이 바짝 군기가 들어간 경례를 올리며 파발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지?”
파발은 특유의 단단한 눈빛으로 장내를 훑으며 부하들의 보고를 들었다.
“흐음. 마차가 부서졌다고? 이렇게 말인가?”
산산조각이 난 마차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터트린 파발이 신바 백작을 쳐다보았다.
호랑이가 없는 산에서는 여우가 왕이더라.
행렬에서 왕 노릇을 하던 신바 백작이 굉장히 조심스러운 듯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로열 나이트의 단장은 왕국의 백작과 동급의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그들은 왕실에서도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히는 존재.
잘못 걸리면 중앙도 아닌 변방의 대영주 따위는 뼈도 못 추리는 절대 갑이었기 때문이다.
“명성이 자자하신 수호 기사단장님을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카이 님?”
신바 백작의 말을 끊어낸 파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우.”
그는 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는 카이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카이 님이 어째서 여기에?”
“줄 서 있습니다.”
“카이님이 어째서 줄을……?”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오히려 파발이 당황했다.
“국왕 폐하께서 친필 편지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거 말인가요?”
인벤토리에서 편지지를 꺼내든 카이가 이를 내밀었다.
동시에 주변에서 헉 소리가 들려왔다.
“라시온 왕실 인장이 찍힌 초대장…….”
“아니, 저걸 지니고도 이곳에 줄을 서 있었단 말인가?”
“그것보다…… 카이 남작이 폐하에게 저 편지를 받았다는 건…….”
“……소문 이상으로 대단한 남자로군.”
미드 온라인은 철저한 신분 사회.
당연히 왕실에서 무언가를 주관할 때는 차별을 둘 수밖에 없었다.
전국의 귀족을 상대로 보내는 초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국왕 폐하의 초대장을 직접 받으신 분들은 줄을 서계실 필요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무심한 아저씨가 진짜.’
카이의 눈살이 가볍게 떨렸다.
담백한 것도 정도가 있지, 추신으로 그거 한 줄 추가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덕분에 시간은 시간대로 낭비하고, 웬 떨거지와 트러블을 일으키게 된 카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없으셨습니다. 그런 말씀.”
“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게 된 파발이 대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무래도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이렇게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개 들어 올리세요.”
빠르게 파발의 어깨를 짚은 카이가 말했다.
그러자 파발이 감격에 찬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어찌나 마음씨가 넓으신…….”
물론 카이가 황급히 그를 말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눈부셔.’
그가 고개를 숙이면 정수리가 태양빛을 반사시켜서 눈이 부시기 때문.
물론 그런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됐습니다. 그럼 전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 정문으로 가셔서 초대장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파발이 묘한 눈빛으로 카이와 부서진 마차를 쳐다보았다.
물론 카이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난 몰라요.
누가보면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듯한 표정!
물론 상황을 파악한 파발은 어색한 미소만 흘려댈 뿐이었다.
“마차가 아주 산산조각이 났군요.”
“싸구려 마차가 다 그렇죠.”
“저 마차 브랜드는 그래도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곳입니다만.”
“소비자가 물건을 살 때 피해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뽑기 운이지요. 참 아쉽게 됐습니다.”
자신과의 연관성을 극구 부인하는 카이.
결국 파발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렀군요. 아무래도 신바 백작은 운이 참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 거지요.”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신바 백작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저 남작 나부랭이가 어떻게 수호 기사단장과 저렇게 친한 거지?’
그의 세계에서는 권력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권력이 높아지면 더 높은 귀족과 안면을 틀 수 있었고, 노는 물이 달라졌다.
하지만 상단을 운영해 축적한 돈으로 서부의 대영주 자리에 올라섰지만, 그는 일정한 벽을 넘을 수 없었다.
‘틈을 내주지 않는 왕실의 실세들.’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베오르크의 수족들이라 할 수 있는 자들.
그들은 서부의 대영주라는 타이틀을 쓰는 자신에게도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남작 따위가 어찌 왕실의 최강 실세 중 하나인 파발과 저리 친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뭐? 국왕 폐하의 친필 초대장이라고……?’
그것은 자신도 여태 한 번도 받지 못하고 소문으로만 들어봤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동부의 촌놈이 들고 있었을 줄이야.
‘설마 최근 돌아다니는 그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동부의 신성, 카이.
마르지 않는 부를 바탕으로 빠르게 영지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동부의 떠오르는 신흥 귀족.
게다가 최근에는 전 대륙에 드워프 대장장이들을 파견했다는 소문까지 떠돌고 있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보수적인 귀족들은 그 소문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드워프 대장장이는 제국에서도 특급 대우를 받는 인물들. 그런 이들을 일개 영지에서 백 명이 넘게 보유하고 있다고?’
신바 백작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애초에 사람이란 아는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하면 믿을지 몰라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하면 믿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본인들의 이해를 아득히 초월하는 소문에 관해선 부정적인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일.
바로 사람의 한계를 규정짓는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게다가 이건 리버티아의 존재가 유저들을 위주로만 퍼져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무튼 카이님은 저와 함께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괜찮아요. 혼자 가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카이님을 함부로 대하는건 태양교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파발이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자, 신바 백작은 덜컥 겁이 났다.
“……카이 남작님이 태양교와도 관련이 있는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카이의 이름 뒤에 ‘님’ 자가 들어간 상태였다.
파발은 신바 백작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성의 없이 까딱였다.
“그야 카이님은 태양신교의 성혈단을 이끌고 계시니까.”
“서, 성혈단이라면…….”
신바 백작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서부라는 좁은 우물에 갇혀 사는 그라고 해도, 성혈단이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봤다.
그는 급히 아들을 쳐다봤다.
그의 아들 또한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그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아, 아버지. 성혈단이라면 최근 태양교의 제일 무력부대라고 소문이 자자한…….’
‘나도 안다 이 녀석아!’
라시온의 남작 위 따위가 중요한게 아니었다.
성혈단의 주인이라면 태양교 내부에서도 최소 주교 이상의 위치를 지니고 있는 존재.
신바 백작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카이에게 말을 걸었다.
“대단한 분이셨군요. 제가 귀가 어두워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백작이 남작에게 존댓말을 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것도 평소에 남작과 자작은 같은 귀족으로 취급조차 않는 신바 백작이었기에, 이를 지켜보는 귀족들의 시선은 더욱 흥미진진했다.
“괜찮습니다. 모를 수도 있지요.”
카이의 담백한 말에 신바 백작의 안색이 환해졌다.
“역시 태양교의 자비로움을 몸소 보여주시는…….”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몰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말을 부드럽게 자르며 들어온 카이의 말에도, 신바 백작은 감히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지요?”
웃는 낯으로 말을 꺼내는 카이였지만, 신바 백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그야 카이의 뒤편에 서 있는 파발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노려보는 중이었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좋네요. 그럼 그…… 신발 백작님? 아무쪼록 줄 잘 서시길 바라겠습니다. 앞으로는 마차도 좀 좋은 걸로 사시고요.”
“가, 감사합니다. 마차도 최고급으로 사겠습니다.”
신바 백작은 카이가 자신의 이름을 틀리게 부른 것을 감히 정정하지도 못했다.
그날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그는 신발 백작이라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