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14화 (314/441)

# 314

힐통령 314화

98장 동부의 신성 (4)

카이는 세 개의 파벌로 나뉘어져있는 연회장을 쳐다보더니, 곧장 하인드 백작에게 향했다.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백작님.”

“허허, 뒷방 늙은이를 잊지 않고 신경써준 것만으로도 고맙네.”

신경을 써줬다는 건, 바덴 성에 드워프 장인을 파견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그 정도는 당연히 신경 써드려야지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카이에게 와인 한 잔을 건넨 백작이 주변 귀족들에게 그를 소개시켜 주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말했었지. 지난번에 몬스터들이 침공했을 때 바덴 성을 구해주었던.”

“아! 성혈단의 주인……!”

“젊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토록 젊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과연. 영웅의 기개와 귀족의 기품을 동시에 두르고 있는 드문 자이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칭찬의 파도.

카이는 귀족들의 말을 들으며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다들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굳이 건네는 칭찬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고작 칭찬 몇 번 들었다고 괜히 들뜰 필요도 없는 법.

훌륭하게 마음을 다스린 카이를 쳐다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공적을 세우고 주변에서 이토록 띄어준다면 건방질 법도 한데…….’

‘단단하다. 마치 뿌리가 깊은 거목을 눈앞에 둔 듯한 기분.’

‘내 아들이 이 자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군.’

수많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여유롭게 와인을 홀짝이는 카이에게, 새로운 무리가 다가왔다.

“하인드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텐 백작 아닌가.”

웃는 낯의 스텐 백작이 무리를 끌고 다가와 하인드 백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여태까지 왕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백전의 노장을 스텐 백작은 좋게 보고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존경과 예우를 갖추는 스텐 백작을 하인드 백작도 싫어할 리는 없었다.

“요즘 어떤가?”

“좋습니다. 남부는 슬슬 날이 풀려서 산책할 때마다 즐거울 정도입니다.”

“그런가? 기회가 되면 남쪽의 해변가를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겠군.”

“오신다면 제 영지에서 모시겠습니다.”

서로 훈훈한 대화를 이어가기를 잠시.

스텐 백작이 눈을 반짝이며 카이를 쳐다봤다.

“이 청년이 동부의 신성입니까?”

“이런, 내 정신 좀 보게나.”

하인드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를 소개해 줬다.

“자네 말대로 최근 동부의 신성이라고 불리는 카이 남작일세.”

“처음 뵙겠습니다. 카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스텐 백작이라고 하네. 그대의 소문은 많이 들었어.”

가까이서 보니 카이의 기품 있는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기에, 스텐 백작은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근래 보기 드문 청년…….’

생각을 잇던 스텐 백작의 시선이 카이의 복장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는 잠시 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곧장 사과했다.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실례를 범했군. 미안하네. 복장이 참 멋있어서.”

빈말이 아니라 현재 카이가 입고 있는 옷은 멋있었다.

딱히 대단한 장식이 달린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디자인이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슈트는 사람의 시선을 강탈하는 마성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아닙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카이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홀짝였다.

입고 있는 옷 때문일까.

그 사소한 행위에서 마저 고고한 기품이 흘러나왔다.

물론 이건 카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 녀석, 옷 돌려달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현재 카이가 입고 있는 옷은 데스몬드에게 빌린 ‘뱀파이어 백작의 예복’이었다.

데스몬드는 빌려주기 싫다고 강력히 반발했지만, 결국 카이에게 옷을 빼앗기고 역소환당했다.

카이는 옷을 갈아입는 것과 동시에 작게 감탄했다.

띠링!

[뱀파이어 백작의 예복을 장비하셨습니다.]

[특수 스탯, ‘기품’이 일시적으로 개방됩니다.]

[당신의 모든 행동에 고고한 기품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특수 스탯, ‘매력’이 일시적으로 개방됩니다.]

[당신의 모든 행동이 상대방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특수 스탯인 기품과 매력을 일시적이나마 강제로 개방시킬 수 있는 유니크 등급의 예복.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 백작의 예복이 지닌 진정한 힘이었다.

‘효과 괜찮네. 나중에도 종종 빌려야지.’

데스몬드가 들었다면 기겁을 했겠지만, 카이는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의복의 힘을 빌린 카이는 이후로 수많은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은 스텐 백작이라는 고위 귀족과 우호 관계를 쌓았다는 것이었다.

“국왕 전하 입장하십니다!”

한창 수다를 떨던 귀족들이 궁중 집사의 외침에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입구를 향하는 순간,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베오르크 국왕이 가족들과 함께 들어왔다.

왕자와 공주, 그리고 왕비를 이끌고 홀에 들어오는 그에게 모든 귀족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흠.”

홀을 한 바퀴 둘러본 베오르크 국왕이 입을 열었다.

“모두 일어나라.”

짧고 단호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홀의 무거운 분위기를 씻어내기에는 충분한 한 마디였다.

“다들 바쁜 걸음을 해주어 고맙군. 멀리서 온 이들의 얼굴도 보이는데 다들 즐기다 가게.”

베오르크는 본인이 태어난 날임에도 크게 기쁜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물론 카이도 그 기분이 조금 이해되기는 했다.

‘이제 겨우 23살 먹은 나도 생일날 별 감흥이 안 드는데, 베오르크 국왕은 더하겠지.’

베오르크 국왕은 홀을 돌아다니며 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씩 대화를 나누었다.

마침내 그가 카이의 앞에 왔을 때, 카이는 고개를 숙였다.

“국왕님의 탄일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탄일이야 시간만 지나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 큰 의미는 없지.”

카이의 생각대로 베오르크 국왕은 이 자리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이니 조금이라도 즐기시면 좋을 텐데.’

속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품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 제가 약소하게나마 전하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음? 지금 말인가?”

베오르크 국왕이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홀의 모든 귀족들이 카이를 쳐다봤다.

’……다들 반응이 왜 이래.’

생일 파티에서 선물을 건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하지만 모두의 시선에 담긴 것은 놀라움과 기대, 혹은 가소로움이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을 준비했길래…….”

“저걸 간이 크다고 해야 할지, 천지분간을 못 한다고 해야 할지.”

“카이 남작. 잠깐 귀 좀 빌리세.”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인드 백작이 카이에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방금 자네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의미…… 라뇨?”

“으음.”

그럼 그렇지.

하인드 백작은 어떻게 설명을 하면 좋을까라는 표정을 지으며 카이를 쳐다봤다.

“국왕 전하를 향한 탄신 선물은 보통 따로 보내는 법일세.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이미 사람을 보내 국왕 전하께 선물을 보냈겠지.”

“이런, 그러니까 여기서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거죠?”

“국왕님의 마음에 든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다만, 자네가 변변치 않은 선물을 준비했다면 그건 직접 선물을 건네지 않은 모든 귀족은 물론. 국왕 전하를 욕보이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생각하고 재고해 보게.”

“아.”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한마디로 선물에 대한 압도적인 자신감이 없으면, 그냥 뒤편으로 따로 보내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건 오히려 찬스일지도 모른다.

카이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베오르크 국왕에게 다가갔다.

그도 카이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는지, 재고의 기회를 줬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지. 본래 말이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지만, 이번 한 번만큼은 기회를 주겠다.”

아량도 넓으셔라.

하지만 카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그의 배려를 정중히 거절했다.

“베오르크 국왕 전하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전 전하께서 직접 선물을 받으시고, 이 탄일 파티를 조금 더 즐기셨으면 하거든요.”

“흐으음…….”

베오르크 국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회를 주었음에도 이렇게 나오니 그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군. 그래, 주고 싶은 선물이란 게 무엇인가.”

질문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카이의 입으로 향했다.

귀족들이 저마다 머리를 굴리며 카이가 건넬 선물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뭘까, 희귀한 무구?’

‘장비 종류라면 정말 웬만한 국보급 아티팩트가 아닌 이상…….’

‘대체 무슨 선물이길래 저만한 자신감을?’

그들의 시선과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카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베오르크 국왕 전하. 제가 일전에 전하께 드워프 장인들을 파견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며칠이나 되었다고 잊어버리겠는가.”

베오르크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시에 귀족들이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선물을 미리 준 것이라고 생색내려나 보군.’

‘멍청한…… 국왕 전하의 심기가 꽤나 불편해지겠군.’

‘이미 건넨 선물로 생색을 내는건, 전하의 성정 상 고깝게 보실 게 분명하다.’

‘건방진 녀석. 드디어 곤욕을 치르는구나.’

귀족들, 특히 신바 백작을 지지하는 서부 귀족들이 곧 다가올 카이의 굴욕에 조소를 짓는 순간. 카이가 말을 이었다.

“제가 왕실에 총 세 명의 드워프 장인들을 파견해드렸지요.”

“그 부분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사람은 보내놓고, 정작 중요한걸 보내지 않았더군요.”

“……중요한 것이라?”

베오르크 국왕이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카이를 빤히 쳐다봤다.

카이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예.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새로운 칼을 사면 휘둘러보고 싶고, 새로운 만년필을 사면 글씨를 적어보고 싶고, 새로운 옷을 사면 입어보고 싶지요.”

그 말에는 자리의 모두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 장인을 선물 받으신 전하께서도 분명 그들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으셨을 터. 하지만 제가 깜빡하고 그들의 실력을 증명할 만한 재료를 드리지는 않았더군요.”

“재료라면 왕궁에도 종류별로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베오르크의 말에 카이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실례되지만 전하. 혹시 뮬딘 교가 활약할 때를 기억하십니까?”

카이의 뜬금없는 말에 대부분의 귀족들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뮬딘 교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이들.

뮬딘 교에게 치욕을 당했다는 건 그들의 가문이 지닌 오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 말을 꺼내는 저의가 뭐지?”

베오르크의 날카로운 질문에 카이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마치 국사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시작된 설명이었다.

“먼 옛날, 뮬딘 교가 대륙의 모든 세력을 적으로 돌리고 사투를 벌였을 때.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습니다. 혹시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

“흠흠.”

베오르크는 물론이고 귀족들마저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르니까.

여태까지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당시 뮬딘 교가 도망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습니다. 열세인 상황을 손바닥처럼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이었지요. 바로 본인들이 만들어낸 강력한 바다의 군주를 보내 인간들의 왕국을 배후부터 공격. 수도를 함락시켜 버리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증명할 수 없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네.”

“그런 삼류 망상은 집에서나 혼자 해라.”

서부 귀족들의 반발에 카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쳐다봤다.

“증명을 하라고요? 좋습니다. 제가 어떤 식으로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카이의 질문에 서부 귀족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그들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그 바다의 군주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나…… 바다의 군주를 직접 잡아오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렇군요.”

서부의 귀족들은 카이가 당연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지금 카이에겐 그들의 요구가 감사하게까지 느껴졌다.

“베오르크 전하, 제가 잠시 눈을 어지럽혀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증명을 위함인가?”

“예.”

“허락한다. 이쯤 되니 과인도 궁금해지는군.”

베오르크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이는 몸을 돌려 연회장의 테라스로 천천히 걸어갔다.

기품있는 남작의 걸음걸이가 한 걸음, 두 걸음.

그 걸음이 테라스의 난간에 도착하는 순간.

카이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빛의 군단, 할리 소환.”

동시에 허공에 빛무리가 터져 나왔고, 백색 비늘을 지닌 거대한 해룡이 궁 밖에 그 찬란한 신체를 드러냈다.

“헉!”

“괴, 괴물!”

“그, 근위병!”

생전 처음 용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목격한 귀족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스텐 백작처럼 귀족이란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나, 하인드 백작처럼 평생 검과 함께 살아온 무장들뿐이었다.

“호오.”

역시 한 나라의 국왕일까. 베오르크는 흥미가 동한 듯 테라스로 나와 해룡을 올려다보았다.

“이 생명체인가? 자네가 말한 인류를 멸할 뻔했다는 비장의 한 수가.”

“예. 아주 무시무시한 녀석이지요.”

카이는 대답을 하는 와중, 인벤토리에서 고급스러운 상자 하나를 꺼내 베오르크에게 내밀었다.

딸깍.

상자가 열자, 그 안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은은한 비늘이 몇 개 들어있었다.

“해룡 할리의 비늘입니다. 베오르크 전하의 탄일을 기념하여 드리는 저의 선물이옵니다. 부디 거절하지는 말아주시길.”

“……거절할 리가 있겠는가.”

천천히 상자를 받아든 베오르크의 입가로는, 파티가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미소가 걸렸다.

“고맙군.”

“아닙니다. 오히려 더 좋은 선물을 해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이지요.”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은 한 폭의 그림처럼 훈훈했다.

[…….]

물론 제 비늘을 눈앞에서 타인에게 선물하는 주인을 목격한 할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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