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힐통령 318화
99장 신의 한 수 (3)
“갑자기 왜…….”
카이가 다가가자, 유하린은 그 거리만큼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앞으로 내민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횡설수설했다.
“이, 일단 진정하세요 카이님. 진정해주세요.”
“……뭐, 네. 진정했습니다.”
카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신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상대방에게 자신이 진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확실히 그 모습은 유하린에게 약간의 안정감을 심어주었다.
“후, 후아……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던 유하린은 제 손톱을 깨작거리며 뭔가를 고민하더니, 카이를 바라봤다.
시선을 내리자 그의 손에 잡혀 있는 반지함이 보인다.
‘하으…….’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고 발언한 점, 게다가 굳이 자신이 사냥하는 곳까지 몸소 찾아온 점.
마지막으로 그의 손에 잡힌 고급스러운 반지함.
‘이건…… 사, 사귀자는…….’
화악!
귀 끝까지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든 유하린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일러. 너무 빨라, 너무 급해!’
카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아직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것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렇게 성격이 급하신 분인 줄은 몰랐는데…….’
여기선 아무래도 더 이성적인 자신이 브레이크를 걸어야겠지.
유하린은 무언가 단단히 각오를 굳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카이님.”
왜 부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유하린은 미안함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우선…… 죄송해요. 물론 카이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아마 처음에 행복 보육원을 찾아오신 것도 저를 찾아오신 것일 테지만…… 그 의도가 어쨌든, 제가 직접 겪어본 카이님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제가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저는 친구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카이님처럼 대화도 잘 통하고, 관심사도 맞는 좋은 분이랑 대화하는 게 즐겁고, 행복해서…… 일주일 중 화요일만 손꼽아 기다린 것도 사실이에요.”
“……?”
뜬금없는 유하린의 고백에 카이가 눈만 깜빡였다.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거지?’
갑자기 왜 저런 말들을?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저 안쓰럽고도 미안한 눈빛은 대체?
카이가 그녀의 말을 잠시 멈추려 했지만, 그녀는 선로 위를 달리는 기관차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하지만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요. 저희는…… 솔직히 저희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더 많잖아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예?”
카이가 당황한 음성을 뱉어냈다.
카이, 23세. 고백 경험 0회, 차인 횟수 1회.
나열하고도 이해가 안 되는 기적적인 데이터의 보유자, 카이가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다지만, 그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이해했다.
‘지금…… 내가 고백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해할 만하다.
카이는 난처해진 표정으로 유하린을 쳐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린 씨의 이불이 무사하지?’
오늘 밤 수도 없이 걷어차일 그녀의 이불이 벌써부터 걱정되는 카이였다.
“흠흠.”
잠시 생각을 정리한 카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하린 씨.”
“마, 말씀하세요.”
바짝 긴장을 한 유하린.
그녀는 카이가 마음을 접어주기를 바라며 긴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우선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해요?”
“네, 오해요.”
카이의 목소리는 절대 고백하는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했다.
“오늘 하린 씨를 부른 건 딱히 고백하려고 부른 게 아니거든요.”
“그, 그런…… 그치만 그 반지함은!”
“확인해 보세요.”
카이가 반지함을 열자, 유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들어올렸다.
“칼…… 라샤의 인도자 반지?”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한 유하린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고백하려던 게…… 아니었어?’
그렇다면 자신이 카이에게 했던 말들은?
유하린은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협곡의 바위에 주저앉았다.
“아으…… 아으으…….”
바위 위에 쭈그려 앉아 고개를 무릎에 처박고는, 연신 앓는 소리를 흘리는 유하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5분 전으로 되돌리고 싶은 그녀였다.
카이 또한 이 상황이 머쓱한지 괜히 협곡 너머 나무들의 수만 세고 있었다.
“그…… 직업을 추천드리려고 했어요. 칼 라샤의 이단심판관…… 영웅 등급의 히든 클래스거든요. 오늘 하린 씨가 근접전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뜻 깊은 직업을 가지고 싶다고 하셔서.”
“그, 그러셨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뒷머리를 가볍게 긁던 카이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직업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에? 아, 직업…… 그러니까…….”
가출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자, 유하린은 다시 한 번 반지의 내용을 살폈다.
‘칼 라샤 교단…… 변화의 신……?’
이미 망해버린 교단이었지만, 무려 이단심판관으로 전직을 할 수 있는 반지였다.
경매장에 올린다면 구매자가 트럭도 아닌 비행기 채로 설 것이 분명한 아이템.
유하린이 잠시 고민에 빠져있자, 카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혹시 고민되신다면, 한 번 만나보시는 건 어떠세요?”
“……누구를요?”
“칼 라샤. 하린 씨가 전직을 하게되면, 모시게 될 신 말입니다.”
카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변화의 농장.
그곳은 다름 아닌 칼 라샤가 거주하는 천계의 장소 이름이었다.
그녀가 변화를 관장하는 신인 만큼, 변화의 농장에는 매일매일 색다른 꽃과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예뻐요…….”
유저 중에선 두 번째로 천계에 방문하게 된 유하린이 황홀한 표정으로 농장을 둘러봤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그녀를 놔둔 카이는 곧장 농장의 안쪽에 위치한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자 졸린 듯한 음성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흐아아암, 누구세요오.”
“칼 라샤님, 저 카이입니다.”
“헬릭의 대리자?”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리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칼 라샤가 서 있었다.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아, 다름이 아니고 칼 라샤의 교단을 부흥시킬 인재를 추천드리고 싶어서요.”
“헉!”
깜짝 놀라는 칼 라샤의 푸른 눈동자가 더없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조그마한 고양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나볼래요. 어디 있어요?”
“농장을 구경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직 본인은 마음을 못 정한 것 같아서…… 칼 라샤 님이 확신을 주셔야 할 겁니다.”
“그런 거라면 저에게 맡겨주세요. 저 말 잘하니까요.”
문 밖으로 뛰쳐나간 칼 라샤는 치맛단을 올리고는 다다다 걸으며 농장 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가.”
중간에서 다리를 이어주는 일.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후로 전직을 하는지 마는지는 유하린과 칼 라샤가 알아서 협의를 해야 할 부분이겠지.
카이는 잠시 농장 쪽을 바라보다가, 지상으로 떠났다.
***
카이는 오랜만에 카밀라를 찾아갔다.
그녀는 자탄의 중력 장갑을 만든 이후에도, 리버티아에 거주하며 드워프 장인들과 활발한 정보 교류를 하는 중이었다.
“간만이네.”
그녀가 작업 두건을 벗자, 언제나처럼 땀에 젖어있던 붉은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으아, 더워 죽겠다. 왜 왔어?”
“장비 좀 의뢰하고 싶어서.”
“나 비싼데…… 하긴, 넌 돈 많지.”
낄낄거리며 혼자 질문하고, 대답까지 마친 카밀라가 손을 내밀었다.
“재료부터 줘봐. 아무리 너라고 해도 난 재미없으면 작업 안 할 거야.”
카이는 대꾸도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할리의 비늘을 꺼내들었다.
“어?”
단숨에 비늘의 가치를 알아본 카밀라의 눈이 둥그렇게 뜨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해츨링이었던 시네라스의 비룡과는 다르게, 이건 성체의 비늘이었으니까.
“다 자란 용의 비늘이잖아? 이건 또 어디서 났대.”
“저번에 잠시 마을 비웠을 때 가서 잡았어.”
“무슨 잡몹 재료 구해온 것처럼 말하냐. 아무튼 이런 재료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스킬 숙련도 올리기도 좋으니까. 그래서 뭐 만들 건데?”
그 질문에 카이는 할리의 비늘을 몽땅 넘겨주며 의뢰했다.
“경갑 풀 세트가 필요해.”
“백룡 세트 만들어준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안 쓰고 내 소환수 입힐 거야. 아! 그리고 엉덩이 쪽에 꼬리 구멍도 내주면 좋겠다.”
“잠깐, 소환수에 꼬리 구멍이라면…… 혹시 그 리자드맨한테 입힌다고?”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카밀라가 뜨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진짜 대박이다. 아마 이런 재료를 소환수 장비에 투자한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제발 소환수로 삼아달라고 줄을 설걸?”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당장 미드 온라인의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장비들의 수준만 봐도, 만들어진 재료들은 할리의 비늘은커녕 카이가 옛날 옛적에 잡은 자탄, 사룡의 재료만도 못한 것들 투성이었다.
그녀에게 장비에 대한 요구를 마친 카이가 공방을 나왔을 때,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맛 들리셨네.”
헬릭에게 문자가 오는 소리였다.
그녀는 폰을 손에 넣은 뒤로는 정말 쉴 새 없이 문자를 보내왔다.
물론 대부분은 일상 생활을 보고하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예를 들자면.
[헬릭 : 지금 사탕이랑 차를 먹고 있느니라(사진)]
[헬릭 : 끄아앙, 뛰다가 넘어졌는데 무릎이 까졌다.]
[헬릭 : 모해? ٩(๑❛ᴗ❛๑)۶]
이런 식이었다.
보통 답장을 해주지 않으면 알아서 시들시들해질 만도 하건만, 헬릭은 새롭게 손에 넣은 문명의 도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덕분에 카이는 그녀가 하루 종일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가 새롭게 보내온 문자를 읽던 카이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헬릭 : 헉! 카이여 큰ㅇ일낫따 뮬딘교가 나타나넉 같다.]
오타가 작렬하는 그녀의 문자에 카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뮬딘 교가 나타났다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둠 추적자의 일원인 카이가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곧장 신출귀몰을 이용해 천상의 정원으로 이동하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헬릭이 보였다.
“헬릭님, 뮬딘 교가 나타났다는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이가 주변을 경계하며 묻자, 헬릭이 지상을 가리켰다.
그러자 카이의 눈앞으로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시야가 공유되었다.
[크하하, 나는 뮬딘 교의 대주교. 대륙을 정복하러 왔다.]
[……내 이름은 패트릭, 광휘의 성기사. 정의의 이름으로 네놈을 처치하겠다.]
[오오, 태양교의 전설, 광휘의 성기사. 그가 헬릭의 이름으로 정의를 퍼트리네.]
그것은 몇 세대가 지나도 NPC 아이들에게 큰 인기가 있는, 광휘의 성기사에 관한 동화였다.
헬릭이 보았던 것은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연기를 하고, 옆에서는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며 호응을 유도하는 형태의 연극이었다.
‘난 또 뭐라고.’
별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카이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건 연극이라는 것이에요. 실제로 뮬딘 교가 나타난 것이 아니고, 그 역할을 흉내 내면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겁니다.”
“그럼 저 까만 가면을 쓴 사람도 나쁜 사람이 아닌 것이냐?”
“물론이죠. 지상에 내려가시면 저런 연극이야 널리고 널…….”
말을 잇던 카이가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저런 식의 연극이 흔하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던 카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음유시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등의 연극은 흔하지 않았으니까.
‘분명히 귀족들이 좋아하는 분야이기는 해.’
그들은 자신들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기품 있는 취미 생활을 원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연극은 최고의 취미 생활 중 하나였다.
실제로 이번 베오르크의 탄신 파티에서도, 무대에서는 악단이 연주를 했고 소소한 연극을 하는 배우들이 있기는 했다.
물론 현대의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던 카이에게는 별다른 감흥이나 재미를 주지 못했다.
‘그렇다는 말은…….’
수요가 있으나 공급이 없다는 뜻.
동시에 카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