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
힐통령 319화
99장 신의 한 수 (4)
헬릭에게 바쁜 용무가 생겼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떠난 카이는 리버티아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메이드 요정들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긴 그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번뜩 떠오른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영지 컨셉은 괜찮아.’
카이는 새로운 도시의 컨셉을 유흥 쪽으로 잡았다.
‘유흥은 유흥이되, 기존에 있던 도시들과는 색다르게.’
과거 블리자드를 납치해 노예로 삼았던 몬스터 투기장이 위치하던 하란도 유흥 도시였다.
하지만 카이가 그리고 있는 도시는 하란과는 그 모습이 아주 많이 달랐다.
‘도박성 유흥 도시가 아닌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의 도시. 연극과 영화, 노래와 춤을 즐길 수 있는 흥의 도시. 이게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이다.’
기존에 없었던 컨셉인 만큼, 신선하면서도 반드시 먹힐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자, 그럼 한 번 정리를 해볼까.”
헬릭의 말을 통해 들었을 때는 연극만 해볼까 생각했지만, 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플랜만 잘 짜면 NPC와 유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엄청난 기획이야.’
사업가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인지, 사업을 구상하는 카이의 머리는 여느 때보다도 더 팽팽하게 돌아갔다.
톡톡.
검지로 종이를 가볍게 두드린 카이가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나누자.”
유저와 NPC.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선 애매한 방식으론 절대 안 되었다.
’처음부터 유저를 노리는 부분과 NPC를 노리는 부분을 확실하게 잡고 들어가야겠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됐다.”
정리를 마친 카이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놓여져 있는 두 장의 사업 구상안을 바라보았다.
’우선은 NPC들.’
그들은 미드 온라인에서 성행하는, 카이의 눈에는 제법 유치한 연극에도 재미를 느낀다.
’그렇다면 오히려 NPC들을 공략하는 건 쉬워. 연극과 영화를 주요 산업으로 밀면 되니까.’
현대의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들을 대거 고용하여 연극과 영화를 만드는 것.
그것이 카이가 NPC들을 위해 준비한 신도시 사업 중 하나였다.
“문제는 유저들인데…….”
유저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대 미디어에 크게 영향을 받은 존재들이다.
당연히 게임 안에서 접하는 연극이나 영화가 처음에는 조금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구매할 소비자층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저들은…… 춤과 노래로 사로잡는다.’
괜히 노래가 언어와 세대를 넘나드는 소통법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카이는 유저들을 위해 자신이 내밀 수 있는 최고의 패를 아낌없이 꺼내들 생각이었다.
“엘프와 인어. 노래를 잘 부르기로 소문난 두 종족을 위주로 그룹을 만들자.”
미드 온라인에서. 그것도 자신의 영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아이돌 그룹인 것이다.
’남자, 여자 그룹을 하나씩 만들고, 인지도가 쌓이면 순회 콘서트를 열고…… 굿즈도 만들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만든 구상안치고는 굉장히 짜임새 있는 기획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봤을 때 아무리 좋아 보인다고 해도, 프로 사업가들이 봤을 때는 허술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건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운 좋게도 카이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업가와 친분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두 명이나.
***
“흠. 새로운 사업이라?”
“엄마는 사업에 관련된 부분에선 많이 까다로운데.”
정우는 오랜만에 방문한 본가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마주하고 있었다.
두 분이야말로 정우가 가장 존경하는 사업가들이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거고요.”
“흐음.”
아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자신감을 읽어낸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 하나는 마음에 드는구나.”
이어서 기획안을 집어든 두 분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이를 읽어 내렸다.
잠시 후,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 머리에서 나온 기획이냐?”
“예.”
“제법이구나.”
베테랑 사업가인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인정이었다.
그 뒷말을 어머니가 이었다.
“조금 더 디테일 부분은 손을 봐야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은 확실히 마음에 드네. 가능성도 있어 보이고.”
정우는 두 분의 도움을 받아 기획안의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정리를 끝냈다.
“완벽하네요. 절대 실패하지 않겠어요.”
“방심은 금물이다. 이 세상에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사업이란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끝까지 교훈을 남겨주신 아버지가 커피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걱정인 점이라면,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경험이 칠 할은 먹고 들어가는 사업이라는 점이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두 분을 방문한 목적도 그 부분에 대한 도움을 받고 싶어서예요.”
정우가 베시시 웃었다.
“두 분 다 브랜드 광고는 많이 찍으셨으니 연예기획사 쪽이랑도 연줄이 있으실 거 아니에요.”
“이놈 봐라? 우리가 피땀 흘려서 일궈놓은 기반을 홀랑 넘겨달라고?”
“어머, 이제 보니 내 아들 도둑놈이네.”
두 분 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만 흘렸다.
때문에 정우는 오랜만에 부모님에게 애교를 피웠다.
“에이, 가족 좋다는 게 뭐예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네?”
“허, 참.”
다 큰 아들의 징그러운 애교에 실소를 터트린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한 번 이야기나 들어보자. 대체 뭘 원하는 거냐.”
“연예기획사랑 영화감독. 각각 한 곳씩 믿을 만한 곳과 연결시켜 주세요.”
“딱히 바라는 조건은 없고?”
어머니, 김현정 여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했다.
마치 무언가를 떠보는 듯한 말투에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있죠. 그쪽 시장에는 유독 돈과 명예에 영혼을 판 더러운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반면에 저는 제 영지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할 수 있으니, 유능하면서도 흙탕물에 발을 담그지 않았던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기왕 끌고 갈 거라면, 착한 사람 데리고 가는 게 좋죠.”
“호호, 맞아. 그래야 나중에 뒤탈이 없거든. 나 닮아서 정말 똑 부러지는구나.”
“무슨 소리야. 원래 아들은 아빠 닮아.”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 부모님이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보자…….”
명함 지갑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던 아버지가 낡고 볼품없는 명함을 한 장 꺼내어 건넸다.
“내 대학 동창 중 한 명인데, 조그마한 엔터테인먼트를 하나 굴리고 있다. 네 말처럼 그쪽 바닥이 조금…… 그런 경향이 있지만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하던 녀석이지.”
“결과는요?”
“말했잖냐. 그쪽 바닥이 좀 그렇다고. 덕분에 쫄딱 망해서 이번에 회사 넘기고 시골 가서 농사나 짓겠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 모양이더라. 실력 하나는 확실해. 손도 깨끗하고.”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명함을 받은 정우는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누가 보면 맡겨놓은 줄 알겠어.”
아들의 태도에 옅은 한숨을 내쉰 어머니였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그녀의 명함 지갑에서도 명함 한 장이 뽑혀져 나왔다.
“학생 시절부터 온갖 상이란 상은 다 쓸어 담던 유능한 감독이야. 다만 투자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는 죽어도 영화를 안 찍겠다는 고집 때문에 투자자들의 손길이 뚝 끊겼지.”
“그야말로 제가 찾던 사람이네요.”
“대신 예술 하는 사람이라고 성격이 좀 까다로워. 단적인 예로, 같은 장면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해서 찍고 또 찍는 습관이 있어. 당연히 그게 다 예산에서 마이너스 나거든. 요컨대 돈이 많이 든다는 소리지.”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정우가 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퀄리티의 향상을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투자할 의사가 있었다.
“제 지갑은 지금 소화 불량에 걸린 상태거든요.”
정우의 지갑은 지금도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배가 터질 것 같다고, 어서 비워달라고.
***
왜소한 체형의 남자 하나가 32평의 휑한 사무실로 들어섰다.
관리를 하지 못했는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있는 그는 사무실의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틱틱, 하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음, 전기세도 안 냈었나.”
벅벅, 머리를 긁적인 남자는 미련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항상 활기에 차있던 사무실은 조용했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추웠다.
공간이 협소해서 바쁠 때는 직원들끼리 부딪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지만, 지금은 서로의 구역을 정해놓던 파티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래도 월급은 다들 챙겨줬으니…… 다행인가.’
남자는 걸음을 옮겨 벽에 걸려있는 글자를 두 눈동자에 담았다.
퓨어 엔터테이먼드(Pure Entertainment).
아내와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게,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만 승부해보자는 생각으로 연예계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지었던 사명이었다.
한 때는 그 이름이 자랑스러웠으나, 솔직히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후회……이려나?’
뮤직 플랫폼에서 요구하는 돈을 주고 차트 상단에 곡을 노출시켜야 했을까.
아니면 드라마 작가의 요구대로 여배우와의 식사 자리를 마련해줬어야 했을까.
혹은 작곡가의 말처럼 해외 인디 밴드의 곡과 비슷한 카피곡을 만들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 자신은 다른 위치에 서있었을까.
미련이 되어 남아버린 선택의 순간들은 남자의 얼굴 위로 떠올라 연신 그를 괴롭혔다.
“후우.”
하지만 이제는 모두 끝났다.
사비를 탈탈 털어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을 모두 나누어줬고, 데리고 있던 배우와 가수들도 알고 지내던 좋은 소속사로 보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정말로 다 했구나.”
이제는 지쳤다.
다행히 부모님이 시골에 물려주신 땅이 있으니, 그곳에서 농사나 짓자는 심정이었다.
’뭘 심어야 되려나.’
그가 농작물에 대한 고민을 하며 사무실을 떠나려는 찰나.
누군가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새로운 임대자라고 보기에는 생각보다 너무 젊은…… 아니, 오히려 어려 보이는 청년이었다.
“아! 혹시…….”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정장을 차려입은 청년은 품속에서 낡은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읽더니, 자신의 얼굴을 쳐다봤다.
“혹시, 퓨어 엔터테인먼트의 최명훈 대표님 맞으십니까?”
“예? 예…… 그게 접니다만.”
밀린 전기세라도 받으러 온 구청 직원인가? 아니, 그러기엔 옷이 너무 고급인데.
최명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청년은 환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에 최명훈은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마주잡았다.
상대는 자신의 아들 뻘로 보이는 나이였지만, 그에게선 묘한 카리스마가 흘러나왔으니까.
청년은 최명훈과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제 이름은 한정우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