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
힐통령 320화
99장 신의 한 수 (5)
정우와 인사를 나눈 최명훈은 그를 따라 사무실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니,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자세한 이야기는 카페에서 나누자고 했으니 가보면 알 것이다.
카페로 향한 정우는 그를 구석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음?”
자리에 도착한 최명훈의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다.
그곳에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제야 한정우를 슬쩍 쳐다본 최명훈이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이렇게 젊은 청년이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을 리 없지.’
정우가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한 최명훈은 눈앞의 남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최명훈입니다.”
“아, 네. 제 이름은 박상수라고 합니다.”
“……?”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동시에 그것을 느꼈다.
‘이 사람은 딱히 사업가처럼 느껴지지 않는데?’
‘뭐지. 투자자라면 이보다 훨씬 더 고압적인 자세로 나와야 할텐데.’
서로를 쳐다보며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던 두 사람을 일깨운 것은 정우였다.
“자, 두 분 다 앉으시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요. 우선 음료부터 시킬까요.”
세 사람의 음료수를 시킨 정우는 자리에 앉으면서 서로를 소개시켰다.
“우선 이분은 퓨어 엔터테인먼트의 최명훈 대표님, 그리고 이분은 박상수 영화감독님이십니다.”
정우의 소개에 두 사람은 서로를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퓨어 엔터테인먼트라면…… 트윈걸즈의 소속사 아닙니까?”
“이제는 다 지난 일이지만 맞습니다. 그나저나 박상수 감독님이라면 ‘해가 떨어지는 곳’을 찍으신 분 아닙니까?”
그들은 정우에게 이끌려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정우는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자신을 쳐다보자 입을 열었다.
“오늘 두 분을 모신 이유는 말씀드린대로 사업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 전에, 우선 날 어떻게 알고있는지가 궁금하군.”
박상수 감독이 살짝 날 선 목소리로 캐물었다.
“제 어머니에게 들었습니다. 김현정 대표님이라고, 기억하십니까?”
“김현정 대표님이라면…… 아아!”
박상수 감독이 기억났다는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영화를 찍을 때 아웃 도어를 지원해줬던 의류 브랜드의 사장님이셨지. 그분이 어머니인가?”
“예. 맞습니다. 그리고 최명훈 대표님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 들었습니다.”
“그랬군. 태호의 아들이었어.”
김현정이 자신의 친구인 한태호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있던 최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모님에게 두 분에 대해서 소개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안을 드릴 것이 있어서요.”
“제안?”
박상수 감독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경우를 숱하게 겪어본 그였던지라 이 자리가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이 녀석도 그런 부류인가? 부모님의 돈으로 감투를 쓰고 싶어하는 투자자.’
개중에는 그런 녀석들이 있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회사를 차리고는 자신을 찾아와서 감놔라 대추놔라 명령하는 녀석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녀석들은 찢어버린 계약서와 함께 쫓아냈었다.
“예. 두 분을 고용하고 싶습니다.”
정우의 직설적인 요구에 박상수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역시나였군. 난 또 뭘 기대하고 이런 자리에 나온건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정우가 한 마디로 그를 멈춰세웠다.
“도망치시는 겁니까?”
“……뭐?”
박상수 감독이 날카로운 눈매로 정우를 노려봤다.
“이 자리는 두 분을 고용하고 싶은 제가 제안을 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조건을 들어보지도 않고, 그냥 도망치시는 겁니까? 언제나와 같이 제가 부모님의 힘만 믿고 까부는 투자자라고 생각해서?”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만.”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박상수의 의견이 옳았다.
이제 겨우 23살 된 청년이 누구나 다 알고있는 값비싼 명품 브랜드의 옷을 입고, 업계의 실력자들에게 고용을 운운하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저 사람…… 맞지?”
“어머, 맞는 것 같은데.”
“실물이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말 걸어볼래?”
카페의 손님들이 그들을 보면서 수근대자, 박상수 감독이 헛기침을 뱉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크흠. 얼굴 몇 번 팔렸다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군.”
“그러게요.”
스윽, 박상수와 최명훈이 손바닥으로 자신들의 얼굴을 가렸다.
두 사람 모두 TV에 얼굴 몇 번 씩은 비춰본 이들이었으니 당연히 자신을 알아본 것이라 생각한 탓이었다.
“미안하다. 아무래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으니 자리를 좀 옮겨야 될 것 같은데.”
최명훈이 낮게 속삭이자,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설명을 다 못 드리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죠.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죠.”
“다음 장소?”
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을 이끌고 향한 곳은 캡슐 방이었다.
캡슐 방은 가상현실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장소로, 현대에는 PC방이 대부분 문을 닫은 대신 캡슐 방이 그 위치를 이어받고 있었다.
딸랑.
문이 열리자 데스크의 알바생이 방긋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오세…… 꺄악!”
문을 들어서는 손님을 목격한 알바생이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으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 맞죠? 그쪽…… 맞으시죠?”
알바생이 소란을 일으키자, 화장실을 가거나 먹거리를 구입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던 손님들이 시선 또한 그들에게 몰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글쎄, 갑자기 소리를…… 헉! 언노운이다!”
“이런 미친…….”
“야, 여기 이온 캡슐방인데 미쳤어. 언노운, 카이 떴다고!”
순식간에 캡슐방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언노운? 카이? 그게 뭐길래?”
박상수와 최명훈은 사람들의 반응에 멀뚱거리며 정우를 쳐다봤다.
“사인 해주세요!”
“사진, 사진 한 번만 찍어주세요 오빠!”
언노운의 팬을 자처하는 손님들이 길을 막아서자, 정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물론 게임에서야 자신이 도시에 떴다하면 이보다 더한 인파가 몰아친다.
하지만 설마하니 현실에서까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이건 내가 잘못 생각했네. 캡슐 방이니 당연히 게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정우가 다가오는 인파를 바라보며 땀을 흘리는 순간.
딸랑.
캡슐 방에 검은 양복을 갖춰입은 사내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척척, 절도있는 자세로 정우의 주변을 에워싸며 보호하기 시작했다.
“정우님,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자자, 모두 일정 거리를 유지해 주십시오.”
당황한 정우가 물었다.
“누구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천화 그룹의 김현태 실장입니다. 편하게 김 실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천화 그룹?”
그러고보니 그런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내가 겪을 모든 귀찮음을 그룹 차원에서 커트해 준다고 했었지.’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보디가드들이 주변을 도사리고 있었을 줄이야.
상황을 파악한 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 분들 다치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나중에 나오면서 시간되면 사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역시 마음 씨도 넓으십니다.”
김 실장의 아부를 뒤로한 정우는 최명훈, 박상수를 이끌고 패밀리 룸으로 들어섰다.
패밀리 룸은 말 그대로 캡슐 방을 방문한 가족을 위한 방이었는데, 그들이 배정받은 방에는 세 개의 캡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정우라고 했지, 너…… 대체 뭐냐?”
최명훈 대표가 복잡한 눈빛으로 정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도 나름 잘나간다는 연예인들을 이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일반인이 이 정도의 인기를 누린다?
심지어 개인 경호원까지 달고 다닐 정도라니?
“아까 카페에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두 분이 저에게 거부감을 느끼시는 것 같아서 먼저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보여주다니, 무엇을 말이지?”
박상수의 질문에 정우는 헤드기어를 쓰며 대꾸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어떤 놈인지 말이예요. 정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녀석이라고 생각되신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떠나시면 됩니다. 그리 추천드리는 방법은 아니지만요.”
“……궁금하다면?”
“그럼 들어오시죠.”
툭툭, 헤드기어를 쓴 정우가 캡슐을 두드렸다.
“미라클 드림 온라인, 들어는 보셨죠?”
“알다마다. 우리 소속사 연예인들도 거기에 빠져서 스케쥴 펑크 냈던거 생각하면…….”
“끄응, 그것 때문에 촬영 스케쥴이 꼬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
두 사람 모두 미드 온라인에 그리 좋지 않은 감정들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들어와서 캐릭터부터 만드세요. 그리고 시작 도시는 하베로스로 설정해 주시구요.”
“하베로스…… 하베로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속는 셈치고 들어가보지.”
서둘러 헤어기어를 쓰는 두 사람이었다.
***
“이게…… 정말 게임이라고?”
“허, 영상으로 보던 것과 실제로 느끼는건…… 차이가 크군.”
게임에 들어선 최명훈과 박상수의 벌려진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대가 제법 있는 두 사람은 요즘 유행한다는 가상현실게임을 접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보기는 했지만…….’
거기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이렇게 현실감이 넘칠 줄이야.
“대단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영화 산업의 파이가 줄어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연신 감탄만 뱉어내던 두 사람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현재 하베로스, 한정우가 시작 도시로 설정하라던 장소에 도착한 상태였다.
“흠. 게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영상 같은데서 보던 도시는 삐까번쩍 하던데.”
“여기는 황무지나 다름없군요.”
하베로스는 예전에 개발을 하기 전의 아르칸보다 훨씬 더 낙후된 영지였다.
물론 장점은 있었다.
바로 영지의 크기가 넓다는 것.
그것도 보통 넓은게 아니라, 아르칸 영지의 두 배는 족히 될 정도로 넓었다.
“두 분 도착하셨네요.”
두 사람은 뒷쪽에서 음성이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한 사람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옆구리에 백룡 투구를 낀 채, 찬란한 백색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펄럭이고 있는 카이였다.
“오, 오오…….”
“멋있군.”
그들은 시선을 내려 자신들의 허름한 옷을 한 번 보더니, 카이의 장비를 쳐다보았다.
감히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차이가 나버리는 장비의 퀄리티.
“자네는 이 게임의…… 그 소위 말하는 랭커라는 건가?”
“랭커!”
최명훈이 묻자, 박상수가 그 말을 받았다.
“그래. 분명히 랭커라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본 적 있지.”
“예, 랭커 맞습니다.”
두 사람이 새삼 귀엽게 느껴진 카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언했다.
“궁금하시다면 시스템 메뉴 열어서, 랭킹표 한 번 눌러보실래요?”
“어…… 이렇게인가?”
“여기있다, 찾았어!”
처음 해보는 게임의 재미에 푹 빠진 두 사람은 랭킹표 하나를 찾고는 시시덕거리며 웃었다.
그러기를 잠시, 박상수가 자신들의 눈앞에 떠오른 랭킹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아이디? 닉네임은 뭔가? 참고로 난 스필벅스라네. 존경하는 영화감독의 이름에서 따왔지.”
“내 아이디는 퓨어사장이야.”
두 사람의 개성 넘치는 아이디를 귀에 담은 카이가 입을 열었다.
“카이, 제 아이디는 카이입니다.”
“카이…… 엇?!”
본격적으로 랭킹표를 뒤지려던 두 사람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야 카이라는 닉네임은 스크롤을 내릴 것도 없이, 가장 위쪽에 박혀있었으니까.
“랭킹…… 1위?”
“자네가 말인가?”
경악하는 두 사람을 상대로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소개드리죠. 랭킹 1위, 카이 백작입니다.”
물론 그의 자기 소개는 거기서 끝나질 않았다.
“그와 더불어서, 저의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이는 기품 있는 동작으로 가볍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