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22화 (322/441)

# 322

힐통령 322화

100장 문화의 도시 (2)

방문한 천상의 정원에는 꽃단장을 마친 두 소녀가 카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여!”

꾸벅.

헬릭은 카이를 발견하자마자 밝은 미소를 지으며 도도도 달려왔고, 칼 라샤는 은은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의도 바르지.

‘신이니까 날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카이는 고개를 돌려 헬릭이 입고 있는 붉은색 드레스를 쳐다보았다.

미드 온라인에 진출한 부모님의 의류 브랜드, 위즈덤에서 만든 초 고퀄리티 드레스였다.

물론 가족 협찬을 받았으니 가격은 공짜.

카이는 물개 박수를 치며 그녀를 칭찬했다.

“와, 이 화려한 옷을 완벽하게 소화하시네. 우리 헬릭 님 오늘 진짜 예쁘다.”

“정말이느냐? 정말로 진짜진짜 이쁜 것이냐?”

“물론이죠.”

“헤헤.”

칭찬에 약한 헬릭은 머리 위의 광채를 반짝거리며 기분이 좋다는 것을 표현했다.

“칼 라샤 님도 아름다우시네요.”

“감사한 것이에요.”

그녀는 한 쪽 손으로 푸른색 드레스의 밑단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아, 그런데 하린 씨는 같이 안 갑니까? 요즘 연락이 안 되던데.”

같이 봉사 활동을 가기로 한 화요일에도 연락이 없어서 혼자 다녀온 것이 2주째였다.

“하린 님은 시련을 받고 있어요.”

“시련?”

고개를 갸웃거리자, 칼 라샤도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본인이 정정당당하게 가고 싶다고…….”

“아하.”

정말이지 너무나 정직한 여자다.

자신이 건네준 인도자 반지가 있으면 그런 과정은 모두 스킵하고 전직을 할 수 있을텐데.

“그럼 그녀가 칼 라샤 님의 사도가 되는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네요.”

“네. 그래도 워낙 유능한 분인지라 잘 해주고 계시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뭘요. 그나저나 두 분 다 준비되신거면 바로 출발할까요? 약속 시간에 좀 늦은 것 같은데.”

“우리는 그대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그렇게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말을 마친 칼 라샤가 헬릭을 쳐다보며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헬릭은 카이님이 보고 싶다고 계속 칭얼거리기는 했지만요.”

“내, 내가 언제 그랬느냐! 카, 카이여. 이건 모함인 것이다.”

헬릭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고, 칼 라샤는 그런 헬릭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오케이. 믿어드릴게요. 그럼 바로 출발하죠. 아, 그리고 미리 말씀드렸지만 두 분의 정체는?”

“난 헬리자베스. 그대의 먼 친척 동생이니라.”

“전 라샤. 헬리자베스의 소꿉 친구인 것이에요.”

“아주 훌륭합니다.”

그녀들의 자기 소개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카이가 손을 내밀었다.

헬릭과 라샤가 그 손을 잡은 순간, 그들은 시끌벅적한 도시의 뒷골목으로 이동해 있었다.

“와아, 이 그림들은 다 무엇이냐?”

“너무 예뻐요.”

그들이 위치해 있는 뒷골목은 일반적인 도시의 더러운 뒷골목과는 차원이 달랐다.

골목마다 위치한 새하얀 벽을 도화지삼아 그려진 수많은 그래피티는 이 도시가 문화를 상징하는 자유로운 장소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줬다.

형형색색의 아름답고, 자유로운 그림들을 보고 있던 헬릭이 카이의 소매를 흔들며 재촉했다.

“나도 이곳에 그림을 그려보고 싶구나. 하지만 지금은 다른 곳부터 구경하자꾸나.”

그녀보다 성숙한 라샤도 카이를 올려다보며 빨리 다른 곳도 구경시켜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알겠어요. 그럼 이동하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카이는 혹시라도 그녀들을 놓칠까봐 신성 사슬을 소환해 그녀들의 배를 한 바퀴 묶고, 그 사슬을 자신의 배에도 둘렀다.

그야말로 완벽한 미아 방지법!

물론 헬릭은 찜찜한 표정으로 투정을 부렸다.

“이것이 무엇이냐?”

“혹시라도 길 잃어버리실까 봐요.”

“완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니더냐. 그대는 내가 어린 아이인 줄 아느냐?”

툴툴거리는 헬릭을 달래는 방법은 간단했다.

“자자, 여기가 광장입니다. 헬릭 님.”

골목길을 나서자 깨끗하고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이미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인파가 한 가득이었다.

“초상화 그려드립니다! 그림 그리기 스킬은 중급 5레벨이에요, 5분 만에 그려드려요! 5실버 받습니다.”

“장비에 이름 새겨드립니다! 자신만의 장비를 가지고 싶으신 분 오세요! 20실버입니다!”

“230레벨의 바드가 노래로 버프를 걸어드려요! 50실버 모일 때마다 노래 한 곡 갑니다!”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나 다름없는 도시의 풍경.

활기와 생기가 가득 차있는 광장에서는 에너지가 듬뿍듬뿍 쏟아져 나왔다.

헬릭과 라샤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우, 우아앙, 이곳이 그대가 만든 문화의 도시인 것이냐?”

“제가 미리 알아봤어요. 여기가 하베로스라는 곳이지요?”

“예.”

카이는 신성 사슬에 대한 것을 잊은 채 잔뜩 신난 두 사람을 데리고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우선 콘서트부터 보러가지요. 저희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카이여. 나아 솜사탕 먹고 싶으니라. 그것이 먹고 싶어서 일주일이나 기다린 것이야.”

“알겠어요. 그거 콘서트장에도 팔아요.”

“빨리 가자꾸나.”

그녀들을 데리고 도착한 장소는 거대한 돔이었다.

무려 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초대형 콘서트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좌석들에는 모두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와아.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보느니라.”

“저도요.”

“그야…….”

말이 좋아서 신이지, 미드 온라인의 신들은 절대 다수가 자신의 섬에 틀어박혀있다.

‘가끔 보면 신인지, 은둔형 외톨이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지.’

그런 신들 중에서도 아싸 of 아싸가 두 명 존재하는데, 한 명이 헬릭이요. 다른 한 명이 칼 라샤였다.

“아으…… 카이여.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느낌이니라.”

“저도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지러운 것이에요.”

두 명의 은둔형 외톨이 소녀들은 어마어마한 인파를 마주하자 질린 표정을 지으며 카이의 뒤에 숨었다.

“그럼 무대 뒤편으로 가죠. 거긴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으니 사람이 별로 없을 거예요.”

가는 길에 솜사탕을 사서 하나씩 들려주자, 언제 기분이 나빠졌냐는 듯 헤실헤실 웃는다.

“오, 영주님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무대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무대 뒤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스필벅스와 퓨어사장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평소보다는 약간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오늘이 결정의 날이니까.’

두 사람에겐 오늘이 시험 당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카이가 계속해서 지원을 해줄지, 말지가 오늘 결정되었으니까.

“두 분 다 긴장 푸세요. 얼굴에 다 드러나시네.”

“하하…… 티 났습니까? 이런 기분이 오랜만이라 그런가 봅니다. 자신은 있는데 말이죠.”

멋쩍게 대답한 퓨어사장은 시선을 내려 카이의 다리 뒤에 숨은 두 명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분들은……?”

“아, 먼 친척 아이랑 그 친구입니다. 인사해야지?”

카이가 슥슥, 그녀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에 헬릭은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예의 바르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니라, 헬리자베스라고 하니라.”

“칼 라샤예요.”

“오오!”

퓨어사장과 스필벅스의 눈빛이 단번에 변했다.

마치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 아니, 그냥 대놓고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혹시 이 분들은 아역 배우로 활동하실 계획 없으십니까?”

“아이돌 연습생은요? 몇 년만 더 지나면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실 것 같습니다만!”

‘응, 아니에요. 몇 년 지나도 둘 다 꼬맹이일걸.’

물론 그런 속내를 밝힐 수 없는 카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하, 아쉽지만 두 분 다 그런 곳에는 관심이…… 응?”

카이는 자신의 왼쪽 소매가 흔들리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소매를 연신 당기고 있던 헬릭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연기 잘하는데.”

“해보신 적도 없잖…….”

“의사와 환자 놀이 때 그대가 잘 한다고 했는데.”

“그거야…….”

당연히 립 서비스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헬릭의 연기력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오오, 그럼 간단한 연기 하나만 보여주시겠습니까?”

신이 난 스필벅스가 그녀를 부추기자, 헬릭은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척을 하며 기침했다.

“흠흠, 그러면 짧게 보여주겠느니라.”

헬릭은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카이를 올려다보며 연기를 시작했다.

“그대여, 나에게 줄 콜라는 어디에 있는가? 목이 마르니 지금 당장 가져오너라!”

연기가 아니잖아.

그냥 지금 목이 마른 것 같은데.

하지만 스필벅스는 다르게 받아들였나보다.

“이, 이럴 수가. 저 나이에 이렇게 고압적인 말투를 완벽히 소화할 줄이야…….”

“예?”

“영주님. 이 아이는 배우 시킵시다.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럴 리가요…… 얘 사실은 연기 진짜 못해요.”

뒷말은 헬릭이 들을 수 없게끔, 스필벅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영주님도 방금 연기하는 것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천재입니다.”

“천재는 맞는데. 소위 말하는 천재(天才)가 아니라 천재(天災)라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헬릭은 자연 재해처럼 처참한 수준의 연기력을 지니고 있었다.

뭐라고 변명을 하려던 카이는 헬릭을 쳐다보며 손뼉을 쳤다.

“아! 그리고 머리 위에 떠있는 광채, 저것도 너무 눈에 띄지 않습니까?”

“이거? 끄면 되느니라.”

파앗.

헬릭이 머리 위에서 항상 반짝이던 광채를 끄고는 카이를 올려다봤다.

마치 ‘이제 됐지? 할 말 없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헐.”

저거 마음대로 키고 끌 수 있는 거였나.

충격을 받은 카이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연기도 안 되고, 노래도 안 시킬 거예요.”

“쩝. 영주님께서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두 사람은 아쉬움을 삼키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 연극은 이제 곧 시작될 겁니다.”

“문제될 부분은 없죠?”

“완벽합니다.”

스필벅스 감독은 극의 주연을 인어와 엘프들에게 배분했고, 기타 조연이나 엑스트라에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배우들을 대거 기용했다.

한 마디로 이 연극은 NPC와 유저들의 합작품이라는 뜻.

‘기대되네.’

자신이 대충 줄기만 잡아서 건넨 연극이 어떤 식으로 완성되었을지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 모든 지휘를 맡긴 카이는 아예 터치 자체를 안 했으니까.

“바로 이동하시지요.”

스필벅스와 퓨어사장이 카이 일행을 3층으로 안내했다.

돔 형태의 무대는 총 세 가지 구조로 나뉘어져 있었다.

1층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일반석.

2층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고급석.

마지막으로 3층에 위치한 VIP룸이었다.

VIP룸에는 확대 마법이 내장된 창이 달려있어 오히려 1층석보다 무대를 잘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음향 증폭 마법이 깃들어있는 마법 스피커가 네 개나 설치되어 있는 상태.

“기대되느니라.”

“심장이 막 콩닥콩닥 거리기 시작했어요.”

생애 처음으로 연극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게 된 두 신들이 떨리는 심정을 고백했다.

“귀족들의 참여율은 어떻습니까?”

카이의 질문에 스필벅스가 보고서를 읽어내렸다.

“영주님이 힘을 써주신 덕분에 귀족들의 참여율이 굉장히 높습니다. 이 비싼 VIP석을 거리낌 없이 구매하더군요.”

“그야 그렇겠죠. 귀족이니까.”

자신들이 평소에 무시하는 모험가와 나란히 앉아서 극을 볼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남작 67명, 자작 22명, 마지막으로 메니프 백작이라는 사람이 방문했습니다.”

“많이도 왔네요.”

카이가 백작으로 승작한 이후,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카이는 문화의 도시를 오픈하기 전부터, 꾸준히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홍보를 해왔다.

‘덕분에 첫 날부터 이렇게 시끌벅적한 거겠지.’

물론 확 바뀐 하베로스가 유명무실하다면,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재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었다.

“연극을 관람한 관객들이 다시 한 번 이 무대를 찾아오게 만들 자신. 있으시죠?”

그 질문에 스필벅스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프로는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결과물로 말한다고 하셨죠.”

“예. 그러니 직접 봐주십시오.”

자신감을 드러낸 스필벅스 감독이 전면을 쳐다봤고, 돔을 밝게 비추던 불이 하나씩 꺼졌다.

사르르륵.

동시에 무대를 가리고 있던 두꺼운 주황색 커튼이 천천히 양옆으로 갈라졌고.

제국 수도를 구현한 멋드러진 무대가 드러났다.

별 기대 없이 연극을 보러 온 영지민.

카이 백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하베로스를 방문한 귀족.

게임에서 연극을 본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방문한 유저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이 섞여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무대 위로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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