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4
힐통령 324화
101장 버스터 콜
소란이 일어나자 가게에 앉아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에 귀족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래서 천한 것들은…… 감히 누구를 쳐다보고 있는 거지?”
“정리하겠습니다. 다들 고개 돌려라.”
호위로 보이는 기사들이 번뜩이는 검신을 살짝 보여주며 손님들을 위협했다.
“어, 어흐음.”
“메뉴가…….”
그 살기등등한 모습에 겁먹은 이들은 고개를 돌려 메뉴판을 쳐다보거나, 애꿎은 숟가락과 포크만 정리했다.
라샤도 어두운 안색으로 헬릭의 소매를 흔들었다.
“헤, 헬릭. 저 사람들 위험해 보이니까 자꾸 쳐다보지 마아…….”
“괜찮은 것이다. 저들이 뭘 어쩔 테냐. 이 땅을 다스리는 사람을 다스리는 자가 바로 나인데.”
어깨를 으쓱으쓱거린 헬릭은 계속 사건 현장을 쳐다보았다.
손님들이 바짝 겁에 질리자, 귀족은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쓰러진 소년을 내려다봤다.
“나는 너 같은 것들이 싫다. 어찌 너처럼 천한 것들이 귀족이라 불린단 말이냐. 그것이 나를 견딜 수 없이 괴롭게 하는구나.”
“…….”
바닥에 쓰러진 소년은 아무 말 없이, 깨진 접시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쯧쯧. 천한 것. 자존심도 없군.”
상대의 반응이 시원찮자, 귀족은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음료.”
“여기 있습니다.”
수행원이 과일 주스를 건네자, 귀족은 이를 한 모금을 마시며 소년을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생각이 난 듯, 그대로 병을 기울여 내용물을 소년의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또르르르륵.
소년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끈적거리는 액체로 뒤덮였고, 귀족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이제야 좀 봐줄 만하구나. 그렇지 않느냐?”
“예, 과연 그렇습니다.”
“도련님이 꾸며주신 덕분에 한층 더 멋있어졌습니다.”
귀족을 보필하는 시종들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아부를 했다.
여기서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을 했다간 목이 달아나기 때문이다.
가게를 관리하는 중년의 책임자가 도착한 것도 그때였다.
“이게 대체 무슨…….”
“그대가 이곳의 책임자인가?”
“……그렇습니다만.”
책임자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자, 귀족이 손찌검을 날렸다.
짜악!
“어딜 감히 평민 따위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눈을 도려낼까요?”
“쯧, 내 아량이 넓으니 한 번은 참겠다.”
“오오…… 태양신 헬릭께서도 도련님의 자비로움에 축복을 내려주실 겁니다.”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칼 라샤가 슬쩍 헬릭의 얼굴을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헬릭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날 왜 그렇게 보느냐.”
“아니…… 그냥 혹시나 싶어서.”
“어휴, 라샤여, 의심할 신을 의심해다오. 저런 망나니한테 축복이라니. 당치도 않은 것이다.”
“우응, 의심해서 미안.”
“음?”
목소리를 줄인다고 줄였지만, 주변을 걸어 다니며 손님들을 위협하던 기사 하나가 두 소녀의 대화를 들었다.
“어이, 방금 뭐라고 했지?”
기사가 눈을 부라리며 헬릭을 다그쳤다.
그 목소리가 제법 컸기 때문인지, 귀족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다.
“거긴 또 무슨 일이지?”
“이 녀석들이 도련님을 욕보이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본인의 주제를 모르는 평민들이 참 많지.”
혀를 차면서 그곳으로 다가간 귀족이 멈칫했다.
헬릭과 라샤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디자인부터 원단까지 너무 고급스러웠기 때문이다.
“……레이디들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귀족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가식적인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이에 헬릭은 크게 기분이 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나에게 말을 건 것이더냐. 네까짓 게?”
“……궁금하군요. 제가 누구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두 사람의 신경전이 시작되려고 하자,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소년이 뛰어와 그를 막았다.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눈앞에서 치워.”
“예, 도련님.”
기사들은 소년의 뒷목을 잡더니 그대로 옆으로 던져 버렸다.
“크악!”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헬릭이 라샤에게 말했다.
“라샤여. 내 눈앞의 무뢰배에게 전해다오. 다치기 전에 사라지라고.”
“이, 이미 다 들었을걸……?”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인간은 이 땅에 단 한 명뿐이라는 말도 빼먹지 말아다오.”
“다 들리잖아 바보야…….”
라샤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앞의 귀족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차가워졌고, 입가에 맺혀있던 미소조차 점점 옅어지는 중이었다.
“모루드 경.”
“예, 도련님.”
“이 레이디들을 정중히 모셔라. 아무래도 사회의 쓴맛을 알려줄 필요가 있겠어.”
“예.”
모루드라 불린 사내가 부하들을 시켜 두 소녀를 구속하려 했다.
물론 번뜩이는 곡도 두 자루가 이를 제지했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검 넣어라.”
“……음.”
모루드가 살짝 신음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최소 나와 동급의 실력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도련님을 쳐다봤다.
“왜, 천하의 모루드 경이 설마 저런 괴한 하나 상대 못 한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사실 저런 실력자를 부리는 세력이라면 척을 져서 좋을 건 없다.
하지만 자신은 일개 기사, 주인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어야 했다.
“웬 놈이냐.”
모루드가 부하들을 헤치며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괴한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자루의 곡도를 까딱이며 경고했다.
“소란은 사양이다. 검을 넣고 물러서면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
“하, 용서라? 모루드 경. 저걸 듣고만 있을 셈인가? 입을 찢어버려라.”
주인의 짜증에 모루드는 혀를 차며 검을 뽑았다.
“선택지가 없군.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두 사람의 신경이 곤두서며 검을 출수할 기회만 엿보는 순간, 헬릭이 입을 열었다.
“두 자루의 곡도를 사용하는 이라면, 그대는 블리자드로구나.”
블리자드는 그 즉시 몸을 돌려 헬릭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던 점, 죄송합니다.”
블리자드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두 소녀가 누구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안다.
‘마스터께서 지키고자 하는 분들.’
게다가 자신이 알기로는 마스터께서 극존칭을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분이다.
“으응, 아니다. 되었으니 뒤로 물러 서거라.”
“하지만 이자들은…….”
“어차피 그대 혼자서는 힘들지 않느냐. 애초에 저 비겁한 무뢰배들이 정정단단하게 싸울 것이라 생각하느냐.”
“당당이야. 정정당당.”
라샤가 슬쩍 손을 들며 깨알 같이 헬릭의 실수를 고쳐주었다.
헬릭은 이를 못 들은 척하며 입을 열었다.
“라샤여, 저기 있는 망나니에게 전해주어라.”
척.
팔짱을 낀 헬릭이 한쪽 다리를 꼬며 귀족을 쳐다봤다.
고개는 살짝 뒤로 젖힌 상태였기에, 그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되었다.
“지금 당장 모두에게 사과하고 사라지라고.”
“……라고 전해달라네요.”
모든 것을 포기한 라샤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귀족을 쳐다봤다.
그는 안면의 근육을 꿈틀대면서 자신의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이 머저리 새끼들. 제 주인이 모욕을 당하는 데도 가만히 있는 건가!”
“지금 당장 생포해서 무릎 꿇리겠습니다.”
“라샤여.”
“응.”
“반대로 말해서 네 놈이 무릎 꿇는데는 몇 분이나 걸릴 것 같으냐고 물어봐다오.”
“라고 묻네요.”
“하, 내가 무릎을 꿇어?”
귀족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이내 바닥에 쓰러진 소년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봐라. 너 같이 힘도 없고, 영지도 없는 병신들이 귀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설쳐대니까 귀족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느냐.”
“끄윽…….”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평민들은 모두 귀족을 우러러보았고, 감히 눈을 마주칠 생각조차 품지 못하였단 말이다.”
“라샤여.”
“응, 또 뭐라고 전해줄까.”
이제는 완전히 맛이 들린 라샤가 눈을 반짝이며 먼저 물었다.
“예전에는 존경 받을 일을 한 자들만 귀족이 되었으니 그랬던 것이라고 전해주어라.”
“응!”
라샤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돌려 귀족을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미 의사 전달은 끝난 상태였다.
“어린 계집이 감히 뭘 안다고 아까부터 쫑알쫑알……!”
귀족은 더 이상 말다툼을 하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끌고와라.”
“예!”
십수 명의 기사들이 블리자드를 에워쌌다.
이에 블리자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동선을 살폈다.
‘마스터께서 부탁하신 두 분은 털끝 하나도 다쳐선 안 된다. 게다가 일반 손님들도 마찬가지. 그런 와중에 저들을 모두 제압하는 건…….’
솔직히 힘들다.
단순히 저들을 모두 죽이라고 하면 치고 빠지면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운다는 건, 발목에 무거운 추를 달고 싸우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되었느니라.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것 같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헬릭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부르는 거야?”
라샤의 질문에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웅, 카이가 말했잖느냐. 무슨 일이 생기면 주저 없이 사용하라고.”
그녀는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움직여 무언가를 열심히 눌렀다.
바로 그녀가 개발했던 폰이었다.
***
“으음.”
뒤풀이를 즐기던 카이는 살짝 짜증이 나서 테라스에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건 파티에 참가한 미꾸라지 한 명 때문이었다.
‘메디프 백작이라고 했던가?’
그는 뼛속까지 귀족 사상에 물든 자였다.
물론 하인드 백작처럼 좋은 쪽으로가 아니라, 아주 나쁜 쪽으로.
은근히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태도는 카이의 심기에 크게 거슬렸다.
‘쯧, 명분이 없으니 꺼지라고 할 수도 없고.’
똥을 만나면 더러워서라도 피해야 하는 법.
카이는 슬슬 파티를 떠날 준비를 했다.
그의 폰이 울린 것도 그 때였다.
“응?”
헬릭이 직접 개조한 이 폰에 등록되어 있는 번호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다른 신들에게도 폰을 나눠줬지만, 그들과 번호를 나누려고 하면 헬릭이 기를 쓰고 막았다.
‘그대의 폰에는 나의 번호만 있으면 되느니라.’
결국 자신의 폰이 울린다는 건 딱 하나를 의미했다.
‘헬릭 님이 나한테 연락을?’
용돈도 충분히 쥐어주었기에 큰 걱정은 안 하고 있었던 터였다.
카이는 인벤토리에서 황급히 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헬릭 : 여기 넘넘 무서운 것이다. 지금 막막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니 어서 와서 구해주는 것이야.]
“음? 괴롭힘이라고?”
카이는 곧장 블리자드의 상태를 확인했다.
‘생명력은 그대론데? 만약 헬릭 님이 진짜 위험하다면 이 녀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자신의 명령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수행하는 녀석이니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헬릭에게서 이런 메시지가 왔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잘 됐네. 저 거지 같은 백작이랑 떨어질 구실이 생겼으니까.’
정말 두 번 다신 안 봤으면 좋겠다.
***
“어디 보자…….”
카이가 헬릭의 위치를 찾는 것은 눈을 감고 길을 걷는 것보다 쉬웠다.
‘저쪽이구나.’
우선 카이는 그녀와 라샤에게 얇은 신성 사슬을 달아놓았다.
그의 신성 사슬 컨트롤이 극에 올랐기 때문에, 굉장히 얇아서 눈에도 잘 띄지 않았다.
‘하지만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
헬릭과 라샤는 지상으로 내려올 때 대부분의 힘을 봉인하고 내려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성력은 독특하다.
지금 당장 지닌 신성력은 카이가 월등히 많았지만, 그들의 신성력은 그 무엇보다 정순했다.
그들의 신성력을 잘 알고 있는 카이가 위치를 찾아내는 건 쉬웠다.
“저기인가.”
멀리서 보기에도 외관이 고급스럽고 예쁜 레스토랑이었다.
하지만 카이가 다가가기도 전에, 유리창이 깨지며 웬 기사 하나가 튕겨져 나왔다.
“크윽, 저 괴물 새끼가!”
기사가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카이의 손아귀가 그의 목을 뒤에서부터 움켜잡았다.
“컥, 커어억……!”
“이것들 봐라?”
엉망이 된 가게 안을 쳐다보는 카이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