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
힐통령 328화
101. 꼬리 밟기 (4)
베오르크는 다시 한 번 두 소녀를 바라봤다.
띠링!
[베오르크가 다시 한 번 절대자의 시선을 사용합니다.]
[대상들의 격이 현저하게 높습니다. 스킬이 취소됩니다.]
[베오르크가 헬릭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베오르크가 라샤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
침묵이 이어졌다.
대신들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베오르크의 눈치 보느라 바빴다.
정작 베오르크는 그 순간 카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망한 것 같은데.’
그것도 두 눈 가득 의심이라는 이름의 열매를 주렁주렁 달아놓은 상태로.
“모두 나가있어라.”
베오르크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신들은 이때다 싶어 우르르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하아.”
한숨을 내쉰 카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대신들과 함께 방을 나가려는 두 신을 붙잡았다.
영문을 모르는 두 소녀는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며 카이를 올려봤다.
“응? 왜 붙잡느냐?”
“국왕 전하가 나가 있으라고 하셨는데요?”
“……저희 빼고 나가있으라는 소리입니다.”
맞습니까? 라는 눈빛으로 베오르크를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였다.
이어서 눈을 감은 베오르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눈에 담긴 힘은 라시온 왕가의 핏줄 대대로 물려져 온 힘.’
대상이 하는 말의 참과 거짓을 파악하는 힘이었지만, 당연히 제약이 존재했다.
‘나보다 격이 높은 존재에게 사용할 때, 혹은 그와 연관된 질문을 할 때.’
그럴 때는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대상에게 제약 없이 사용 가능했다면, 지난 번 뮬딘 교 세작에 대한 조사를 시행했을 때 누구도 베오르크의 눈을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두 사람은…….’
최소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베오르크가 내린 결론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누군가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저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찬양하는지가 궁금해서 반쯤 장난으로 시험해 봤을 뿐이었다.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태양교의 사도인 카이가 데리고 다니는 이들이니 악한 이들은 아닐 것이다.
복잡한 눈빛으로 두 소녀를 바라보던 베오르크의 시선이 유독 헬릭에게 길게 머물렀다.
그러기를 잠시, 그의 동공이 점점 커져갔다.
‘……가만. 그녀의 이름이 헬리자베스라고?’
설마,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베오르크는 부정을 하면서도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조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헬리자베스라는 이름에 금발, 금안에 나보다 격이 높은 존재라고 한다면…….’
자신이 연관지을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
“맙소사.”
경악한 표정을 지은 베오르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옥좌와 이어진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헬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계단을 모두 내려온 베오르크가 떨리는 음성으로 카이를 불렀다.
“……카, 카이 백작.”
“예, 전하.”
“솔직하게 대답해주게. 이 분이 내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는가?”
들켰구나.
카이는 베오르크의 질문에 짧은 탄식을 흘렸다.
‘하긴, 단서가 이 정도나 흘러넘치는데 헬릭이라는 걸 못 알아채는 건 말이 안 되지.’
슬쩍 고개를 내려다보니 헬릭과 라샤는 아직까지도 인간인 ‘척’을 하고 있었다.
이에 카이는 살포시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헬릭 님, 인간이 아니란 거 들키셨습니다. 라샤 님은 아직 안전한 거 같고.”
그에따라 두 사람은 상반된 반응을 내비췄다.
“헉! 부, 분명 내 연기는 완벽했을 터인데……! 어째서…… 어째서인 것이냐?”
“이걸 좋아해야 할까요, 슬퍼해야 할까요…….”
정체가 들켜 머리를 붙잡고 패닉에 빠진 신 하나.
이름을 대놓고 말해도 알아주지 않아서 우울해진 신이 하나.
카이는 문득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도 심심할 일은 없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럴 리가 없지 않느냐, 분명히 내가 연기 천재라고 스필벅스라는 모험가도 그랬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그러면서 동의해달라는 표정으로 카이를 올려다본다.
이쯤되자, 카이는 그녀가 냉혹한 현실에 눈을 뜨게 도와줄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연기는 조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런…… 말두 안 되는…… 그짓말…….”
헬릭은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지은 채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항상 당당하던 어깨랑 콧대마저 조금 가라앉은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
그러거나 말거나, 베오르크 국왕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헬릭에게 예(禮)를 갖추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위대하신 분을 몰라 뵌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괜찮으니라…… 몰라 뵌 건 몰라 뵈었으니까 몰라 뵌 것이겠지…….”
헬릭이 횡설수설을 하며 베오르크의 말을 받았다.
“라샤 님.”
카이가 눈짓을 주자, 눈치 빠른 라샤가 맡겨달라는 표정으로 대꾸하고는 헬릭을 부축해 알현실 구석으로 데려가 토닥였다.
베오르크 국왕은 멀어지는 헬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으음, 내가 정체를 밝혀서 우울해지신 건가. 위대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다니 큰일이구나…… 하지만 나로서는 정말 상상조차 못 했었네.”
“이해합니다, 보통은 이런 일이 일어날거라고 상상하지 않죠? 게다가…… 아시잖아요.”
대륙인들은 헬릭을 카리스마 넘치는 중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다네. 아마 저 분의 정체가 밝혀지면 대륙의 모든 신도들은 충격에 빠질테니까.”
역시 뭘 좀 아는 국왕이다.
“그런데…….”
베오르크가 갑자기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너무 궁금해서 그러네만. 살짝 귀띔을 해주면 안 되겠나? 헬릭 님이 대체 어떤 신과 결혼하신건지.”
“……예?”
머-엉.
카이는 아무 생각없이 길을 지나가다가 느닷없이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결혼이라고? 이게 무슨…… 아!?’
설마 베오르크는 헬릭…… 아니, 헬리자베스를 헬릭 본인이 아닌 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가능성이 있어…… 아니, 지금껏 말한 걸 보면 거의 확실하잖아?’
베오르크는 헬리자베스를 헬릭 본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아마 대륙의 모든 신도들이 충격에 빠질 것이라는 말은, 헬릭에게 딸이 있다는 것을 겨냥한 말이겠지.
머리가 빠르게 굴러간 카이가 그를 한 번 떠보았다.
“결혼이라. 으음…… 어머니에 대한 건 헬리자베스 님에게 여쭤보고 와야 합니다만.”
“알겠네. 하지만 안 된다고 하시면 굳이 들을 필요는 없으니 무리하지 말게나.”
“예.”
확실하다.
그는 헬리자베스를 헬릭의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에 마음이 한결 놓인 카이는 곧장 알현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헬릭에게 다가갔다.
“너무 슬퍼하지 마. 눈치가 빠른 인간일 수도 있지. 그래도 넌 들키기라도 했잖아, 난 그거인 걸…… 들은 적도 없는…… 뭐였지.”
“흐어엉…… 듣보자압이자나…….”
“마자…… 난 듣보잡 신이야…… 들은 적도, 본 적도…… 크힝…… 없는…… 크으어엉.”
“괜차나, 괜차나아! 흐으윽. 대신 내가 널 평생 기억하니까아.”
“고마어허으허헝.”
좀 달래주고 있으라니까, 그새를 못 참고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 파티를 열고 있다.
“두 분, 뚝 안 그치세요?”
왜일까, 이 순간이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카이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는 능숙하게 두 소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우선 헬릭 님부터 뚝. 아마 베오르크 국왕은 헬릭 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아요.”
“쿨쩍…… 그게 정말이느냐? 정말 나를 헬릭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느냐?”
헬릭이 의심 가득한 두 눈으로 카이를 바라봤다.
카이는 그런 그녀의 눈빛을 올곧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확히는 헬릭 님의 딸이라고 줄 알고 있는 상태예요.”
“……딸? 내가?”
“네. 제 생각에는 헬릭 님께서 뿌려놓은 태양신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박힌 것 같아요.”
자그마치 수백 년이다.
태양신 헬릭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근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중년의 모습으로 신도들에게 숭배를 받아왔다.
‘운이 좋았지.’
뛰어난 인간일수록 자만에 빠지기 쉽다.
착각에 빠지기 쉬운 법이다.
베오르크가 딱 그랬다.
‘내가 파악한 베오르크는 머리가 좋아. 게다가 절대자의 시선이라는 사기적인 스킬까지 있지.’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대상을 찾았는데, 그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신과 특징이 비슷하다.
헌데 그 신이 헬릭이라면?
아무리 베오르크라고 해도 수백 년간 고착화된 관념을 뒤집고 그녀를 헬릭이라고 생각할까?
‘절대 아니지.’
오히려 그녀가 헬릭의 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게다가 헬릭의 반응과 자신의 반응으로 그것이 맞다는 확신까지 가졌을 것이고.
슬쩍 뒤로 돌아보니 아니나다를까, 베오르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그러니까 헬릭 님이 선택하세요. 헬릭의 딸인 척 연기를 할 것인지, 그냥 진실을 말할 것인지.”
“무조건 숨길 것이니라.”
헬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는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껴졌기에 카이는 위화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신들은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는 것을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나?’
하지만 그러자니 옆의 라샤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몰라준 것이 서럽다고 엉엉 울고 있으니까.
카이는 쓸데없는 상념을 지우며 두 사람을 달랬다.
“어쨌든 헬릭 님은 그럼 앞으로 헬릭 님의 따님인 헬리자베스인 거예요. 아셨죠?”
“응! 난 나의 딸인 헬리자베스인 것이다. 명심하겠느니라.”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카이는 고개를 돌려 칼 라샤를 달랬다.
“라샤 님도 진정하세요. 하린 씨는 유능하니까, 사도가 되면 금세 교단을 부흥시켜 줄 거예요.”
“크힝…… 그치마안…… 제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그거 어려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나가는 개미도 통과할 수 있게 쉽게 만들 걸 그랬어요…….”
아니, 지나가는 개미도 통과할 수 있으면 시련이 아니지.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제가 아는 그 어떤 모험가보다 뛰어납니다. 실력만 두고 본다면 저보다도 훨씬 뛰어나요.”
“……정말요?”
“네.”
카이의 말에 조금씩 호흡이 진정된 라샤는 소매로 눈물을 슥슥 닦더니, 언제 울었냐는듯 멀쩡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래봤자 붉게 물든 채 부어오른 뺨과 눈가는 숨겨지지 않았지만.
“알겠어요. 그럼 그녀를 믿어보는 것이에요.”
“착하십니다.”
성공적으로 두 소녀를 달랜 프로 베이비시터는 그녀들의 손을 잡고 베오르크에게 돌아갔다
“미안하지만 내 어머니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느니라.”
“앗, 괘념치 마십시오. 오히려 제가 위대하신 존재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나 싶어 송구스럽습니다.”
베오르크 국왕은 헬리자베스를 상대로 쩔쩔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어려워하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다.
‘라시온 왕국의 국교가 태양교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하자면 베오르크는 계열사의 사장이고, 헬리자베스는 그룹 오너의 딸인 셈이다.
헬릭은 잠시나마 자신을 울게 한 베오르크를 새침하게 쳐다보았다.
“……뭐어, 살다보면 오해도 할 수 있는 법이겠지. 한 번 봐주겠느니라.”
“역시 자비를 관장하시는 분의 따님답게 마음이 넓으시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카이는 베오르크가 보여주는 약한 모습에 절로 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전하아!”
벌컥!
알현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장비한 귀족 몇 명이 뛰어 들어왔다.
“음…….”
카이가 저도 모르게 침음을 뱉어냈다.
지금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