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
힐통령 331화
102. 북부탈환전 (3)
퇴로를 차단당해 갈 곳을 잃어버린 뮬딘 군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진형을 방어 형태로 바꿔라! 마법사들은 쉴드 마법을 사용해서 적들의 마법을 막아!”
바로 방어였다.
메디프 백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 병사들은 검을 집어넣고 방패를 꺼내 머리를 보호했다.
콰와앙, 핏! 콰앙!
수백, 수천 개의 마법과 화살이 방패를 두드렸다.
“카이 님. 적들이 생각보다 너무 잘 버팁니다.”
보고를 하던 시리스의 젊은 영주인 아덴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은 적들을 몰아붙이고 있다지만 이 현상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시리스 협곡에 매복한 인원은 고작 5천.
적군이 퇴로를 뚫고 탈출해 버리면 아군은 추격에 나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저들이 본대와 합류를 해버리면 하인드 사령관님이 위험해질 겁니다. 저 방벽도 1분이 한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러게요. 생각보다 잘 버티네요.”
카이는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뮬딘 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현재 그들은 병사와 기사 모두가 방패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대체 왜 저렇게 방패병의 비율이 높은 건지…….”
아덴의 혼잣말에 대한 답을 카이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의 역할이 이곳을 점령한 뒤, 본대가 돌아올 때까지 왕실군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겠지.’
적들의 본대 쪽에는 방패병의 비율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높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동성이 좋고, 검과 창을 잘 다루는 병사들 위주로 편성이 되어 있을 터.
‘저들이 본대와 합류하면, 확실히 귀찮아져. 그전에 끝내야해.’
복싱으로 따지자면 이제 상대는 코너에 몰려서 더 물러날 구석도 없는 상황이다.
‘잽 가지고는 안 돼. 여기서 큰 걸 한 방 먹여야되는데.’
자잘한 공격보다는 묵직한 스트레이트 한 방으로 적들을 그로기 상태에 빠뜨려야 했다.
‘그렇다면…….’
카이는 허공에 두둥실 떠올려놓은 헬 파이어를 쳐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아직 사용해 보지 않은 절대영도를 제외하면, 내가 지닌 마법 스킬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게 헬 파이어야.’
단 네 개의 헬 파이어.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웃는 자와 우는 자가 갈려진다.
어깨가 무거워진 카이는 석화 상태의 지속 시간을 확인했다.
“45초.”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앞으로 45초 뒤면 적들은 할리를 죽이고, 퇴로를 만들어 도망칠 것이 분명했다.
“쯧, 석화 시간의 지속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 음?”
순간 적들을 내려다보던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덴이 그를 재촉한 것도 그 때였다.
“카이 백작님, 어서 지시를……! 이대로는 모두 놓쳐버리고 맙니다!”
“……물리세요.”
카이의 명령에 아덴이 눈을 깜빡였다.
“예, 예?”
“아군을 모두 뒤로 물리세요.”
“……예!”
아덴은 모든 공격을 퍼부어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카이 백작님이 따로 계획하신 작전이 있으시겠지.’
전쟁에서 상명하복은 절대적이다.
게다가 현재 카이는 베오르크 국왕에게 이번 작전의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
심지어 스스로도 굉장한 무용담들을 쌓으며 백작의 자리에까지 올라선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그렇기에 아덴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전군 공격 중지! 모두 협곡에서 물러나라!”
뿌우우움-!
전투 중단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협곡을 가득 메웠고, 쉼 없이 들려오던 굉음이 멎어 들었다.
카이의 지휘 아래에서 라시온 왕국의 병사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협곡에서 멀어졌다.
“14초.”
할리의 석화 시간이 제법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카이는 아군이 충분히 안전한 위치까지 물러났다는 것을 확인했다.
동시에 손을 뒤집어 네 개의 헬파이어를 모두 하늘 높이 올려보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메디프 백작은 줄곧 신경 쓰고 있던 거대한 불덩이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자, 바짝 긴장했다.
‘퇴로는 막혔다. 계속해서 공격했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었을 텐데…….’
석화 스킬에 지속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그는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러기를 잠시, 그는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미 전투에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귀족법에 따라 나를 생포할 셈인가.’
보통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패배한 귀족들을 생포해 돈을 받고 풀어주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메디프 백작의 안색이 살짝 밝아졌다.
‘뮬딘교 측에서 내 몸값을 지불할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이곳이 내 무덤이 될 것 같지는 않군.’
그가 안심을 하는 순간.
하늘 높이 치솟았던 불덩이들 중 하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상식을 벗어난, 아득히 빠른 속도로.
“허, 허억……!”
“마법사들, 쉴드량 최대로!”
“방패를 들어! 피해를 최소화시켜라!”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진동이 협곡을 뒤흔들었다.
하나 헬 파이어가 강타한 것은 뮬딘교의 군대가 아닌, 협곡이었다.
“비, 빗나갔다…….”
“뮬딘께서 우리를 보살피신다!”
카이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뮬딘 군이 기뻐하며 저들의 신을 찾았다.
하지만 메디프 백작의 낯빛은 다시 흐려졌다.
‘저놈 저거…… 일부러 우리를 노리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협곡 위에 오연하게 서서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카이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스킬을 조합하면 대충 이 정도 파괴력인가.’
카이는 방금 전 실험해 본 결과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드 온라인에선 스킬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장비, 스킬 숙련도, 스탯을 지닌 유저가 파이어볼을 사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단순히 코앞의 적을 공격하는 것과,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는 것이 다르고.
급소를 공격하는 것과 급소가 아닌 곳을 공격하는 것이 다르다.
같은 조건이어도 운용법에 따라 더 큰 효과를 불러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카이는 현재 그 조건을 실험하는 중이었다.
‘이번엔 중력을 5배로 걸어볼까.’
손가락을 까딱이자, 구름 밑에서 대기 중이던 헬 파이어 하나가 그의 부름을 받고 낙하했다.
“중력장.”
그 위로 중력장을 덧씌우자, 헬 파이어는 마치 엑셀을 한계까지 밟은 스포츠카처럼 가속했다.
콰아아아앙!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거대한 진동과 굉음이 협곡을 뒤흔들었다.
카이의 공격은 이번에도 불발, 애꿎은 협곡을 두드렸다.
꿀꺽.
하지만 뮬딘 군의 병사들은 더 이상 뮬딘의 이름을 부르며 안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얼굴 위에는 누가 봐도 공포라고 느낄 만한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폭음으로 인해 멍해진 귀, 흔들리는 반고리관 때문에 몸의 중심을 잡기조차 버겁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드드드드.
온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진동은 그들의 심리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지켜보던 카이는, 마침내 세 번째 지옥불에게 명령했다.
떨어지라고.
“거기에 중력장, 여덟 배로.”
솨아아아아아.
마치 밑 빠진 독에서 물이 새는 것처럼, 마나가 술술 빠져나간다.
고작 네 개의 헬파이어를 소환하고, 중력장을 세 번 걸었을 뿐인데 마나의 절반이 사라졌다.
하나 그만한 투자를 감행할 정도의 가치는 있었다.
아니, 오히려 차고넘쳤다.
꽈-아아아아아앙!
정확히 세 번.
카이는 협곡의 같은 장소에, 같은 스킬로, 말도 안 되는 데미지를 누적시켰다.
그 결과, 충격량을 견디지 못한 협곡의 끝자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 무너진다!”
“피해!”
“피, 피할 곳이 없어!”
뮬딘 군의 5만 군세.
그 거대한 머릿수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협곡 아래에서 우왕좌왕하던 뮬딘 군의 병력들은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바위에 무참히 깔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0초.”
[크롸아아아아아!]
동시에 지속 시간이 끝난 할리가 석화 상태에서 풀려났다.
하나 뮬딘 군은 도망을 칠 수 없었다.
“퇴, 퇴로가……!”
협곡의 한쪽이 무너지면서 떨어진 바위들은, 할리의 뒤를 이어 새로운 방벽이 되었으니까.
심지어 그 바위들은 할리의 거대한 몸뚱이를 가려주는 방패막이 역할까지 해주었다.
“전군, 위치로.”
카이가 손을 들며 명령하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덴이 눈을 빛내며 목청을 높였다.
“전군! 위치로!”
뿌우부우우우-!
뿔나팔이 울리자, 5천의 마법사와 궁수들은 협곡 아래를 향해 온갖 스킬을 퍼부었다.
***
두두두두두두.
대군이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수만 무려 10만.
게다가 전원이 기마병으로 이루어진, 극한의 기동성을 자랑하는 군대였다.
“알데바란 쪽에서의 연락은?”
입을 연 자는 뮬딘 교의 이단심판관 중 하나인 크롬이었다.
그는 10만의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특별히 본단에서 파견된 상태였다.
“블랙드래곤의 전언에 의하면 하인드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여전히 국경선에 있다고 합니다. 그게 불과 15분 전이었으니 아직 성안에 있을 겁니다.”
“뒤를 잡은 건 확실하군.”
크롬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이면 시리스 점령전이 한창 진행 중일 터, 어쩌면 벌써 점령했을 지도 모르겠어.’
길었다.
정말이지 긴 세월이었다.
수백 년.
크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그의 가문은 혈족 대대로 뮬딘 교를 따른 신도들이었다.
조상님들은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하에 숨어지내며 오늘 같은 날만을 기다려왔다.
‘그러니 보여주겠다. 우리가 지난 수백 년간 모은 힘과 각오를. 더러운 대륙의 애송이들. 이번에는 다를 거다.’
그들은 단일 세력으로는 본교를 감당할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들이다.
‘조상님들께서는 실패하셨지만, 이번에는 우리의 준비도 완벽하지.’
이미 모든 왕국과 제국, 상단에 세작을 심어놓았다.
사실 메디프 백작이 들키지만 않았다면, 이 전쟁도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크롬은 오히려 그의 멍청함을 환영했다.
‘어차피 본교의 준비는 완벽하다. 이 기회에 대륙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우드득!
크롬이 쥐고있던 고삐를 더욱 힘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어둠의 정수를 품은 그의 전투마가 거친 투레질을 하며 초원을 내달렸다.
“……음?”
라시온의 국경선이자, 자국을 보호하는 최후의 성채.
허스트 성에 도착한 크롬이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뭔가 이상하군.’
태어날 때부터 뮬딘교의 전투 기계로 육성된 그의 오감이 외쳤다.
저 성은 뭔가 이상하다고.
‘너무 조용하다. 5만 명이 주둔하고 있는 성인데, 저토록 조용하다니?’
그곳은 마치 유령의 성처럼 조용했다.
그때 크롬의 시선이 성채 위쪽으로 향했다.
“……하인드 백작.”
그 위에 서있는 것은 분명 하인드 백작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그를 따르는 북부의 귀족들도 함께 있었다.
다만, 성채 위로 보이는 병사들은 기껏해야 백 명 남짓.
‘이거, 확실히 뭔가가 잘못됐…….’
이상한 낌새를 느낀 크롬이 미간을 좁히는 순간.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곳, 두 곳, 세 곳…….
그것도 무려 세 방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