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
힐통령 332화
102. 북부탈환전 (4)
예로부터 수많은 명장들에게 사랑을 받은 전술 중 하나가 바로 포위진이다.
포위진이 가지는 의의는 간단명료했다.
-한 번 발동하면 아무도 살려보내지 않는 것.
그것이 포위진이라는 전술이 세상에 나타난 의의였다.
물론 위력적인 만큼 활용하기 어려운 전술이고, 때문에 까다로운 전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기본적으로 아군의 숫자가 적보다는 많아야 할 것.
그것이 포위진의 기본 조건 중 하나였다.
병력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을 억지로 둘러싸봤자, 각개격파를 당할 뿐이니까.
두 번째는 병사들의 수준이었다.
특히 그것은 미드 온라인에서는 더욱 더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1만 명의 병사로 1천의 기사를 둘러싼다?
그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무식한 행위였다.
세 번째는 병사들의 합이다.
기본적으로 포위진은 한 번 자리를 잡는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계속 변화를 줘야한다.
당연히 병사와 그들을 지휘하는 자들의 손발이 맞아야 박수 소리가 나는 고난이도 전술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기동력.
적들이 빈틈을 찾아 도망치려고 해도, 이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재빠른 기동력이 요구된다.
그것은 뮬딘 교의 이단심판관인 크롬도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황당한 감정을 넘어, 당황한 감정을 느낄 정도였다.
‘……이건 대체 뭘 하자는 거지?’
크롬은 고개를 돌려 본대를 품(品)자 형태로 포위한 라시온 군을 쳐다보았다.
인원 수는 대략 5만가량.
1만 5천, 1만 5천. 2만으로 나누어져 있는 군대였다.
‘하인드 백작이 이끈다는 5만 명의 군대가 바로 저들이군.’
하지만 성에 꽁꽁 숨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매복을 하고 있다?
크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꼴사납게 굶어죽기는 싫으니, 싸우다 죽겠다는 건가.”
그의 눈에는 적들이 전장에서 죽기 위해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병사들의 수준이나 기동력은 제쳐두더라도, 숫자는 이쪽이 압도적이었으니까.
‘실망이군. 하인드 백작이라면 라시온의 북부 사령관으로, 제국조차 애를 먹는 명장이라고 들었는데…….‘
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감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뭐, 귀찮지 않아서 잘된 건가.”
뮬딘의 이름을 거부하는 모든 적들을 쳐부숴버리는 것.
그것이 크롬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었다.
“전군, 무기를 들어라.”
크롬의 명령이 떨어지자, 챙!
단 한 번의 소리가 평원의 공기를 베었다.
어둠의 정수를 품은 암흑 기사들은, 의식이 어느정도 연결되어 있다.
’공포를 모르는 군대. 그야말로 뮬딘 님의 이름에 걸맞는 군대지.‘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당연히 뮬딘 교의 고급 관리자들이었다.
오늘 같은 경우는 크롬이 그 영광스러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삶은 포기한 개들에게 인사 따위는 필요 없겠지.”
짧게 중얼거린 크롬이 투구 가리개를 내렸다.
그의 좁아진 시야로, 자신들을 포위하는 머저리들이 보였다.
크롬은 자신의 무기를 높이 들어올리며 고삐를 힘차게 휘둘렀다.
“뮬딘 님의 이름으로!”
“뮬딘 님의 이름으로!”
평원을 새카맣게 물든 대군이 정면.
2만의 군대를 향해 돌진했다.
***
두두두두두.
“사령관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작전은…….”
“믿어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귀족들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하인드 백작은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는 성을 향해 돌진하는 10만의 대군이 들어왔다.
허나 하인드 백작은 한치의 의심도 없는, 올곧은 눈으로 그들을 내려보았다.
“카이 백작은 허언을 일삼는 이가 아니다. 믿어도 좋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무래도 시리스 성채에 변고가 생긴 것이…….”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자살 행위나 다름 없습니다. 지금 당장 성문을 개방하여 군을 불러들여야 합니다.”
“이미 포위진은 완성되었다. 물릴 수는 없어.”
부드러운 말투로 귀족들을 다독인 하인드 백작이 허허 웃었다.
“10만이라…… 허허, 많기도 하지.”
이 나라에 뮬딘 교의 잔당들이 저토록 많이 숨어 있었던가.
자신은 저런 자들을 보호하고자 북부를 그토록 열심히 막았던 것이 아니었다.
하인드 백작은 그 사실을 떠올릴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한지고.”
눈빛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은 하인드 백작이 시선을 평원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모든 통신 마법이 사용 불가 상태라고 했나?”
“예.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나의 흐름을 틀어놓고 있습니다. 아마 뮬딘 교의 사술이라고 판단되며, 현재 통신 마법과 텔레포트 모두 사용 불가인 상태입니다.”
“흐음. 카이 백작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모험가로군.”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유롭게 왕도와 북부 사이를 오고가는 신통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헌데 카이 백작이 돌아오면 정말 판이 뒤집힐까요?”
“그렇게 큰 소리를 쳐놨으니 뭐…… 믿는 바가 있으시겠지.”
“아무래도 지원군을 불러온다는 소리 아니겠소?”
“으음, 지원군이라……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과연 몇 명이나 불러올런지.”
귀족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우두커니 평원을 바라보던 하인드 백작이 입을 열었다.
“조용히.”
그 한 마디에 합죽이가 된 귀족들은 하인드 백작을 따라 평원을 바라보았다.
“……격돌이군요.”
귀족들은 곧 부딪칠 두 군대의 전투를 똑똑히 목격하고자, 눈을 부릅떴다.
***
이단심판관 크롬은 특이하게도 검이나 메이스가 아닌, 낫을 주무기로 삼는 자였다.
그것도 날이 양쪽으로 돋아난 것이 특징인 거대한 낫이었다.
낫이라는 무기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이미지는 날카롭다는 것이 전부.
하지만 그는 낫을 마치 대검처럼 사용하는 이였다.
그의 거력이 담긴 낫은 상대방의 검과 방패는 물론, 갑옷까지 잘라내기로 유명했다.
“진정한 신의 말씀을 거부하는 우매한 자들이여, 죽음으로 사죄하라!”
마치 양 떼에게 달려드는 호랑이처럼, 크롬은 홀로 돌진하며 군대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뿜어내는 광포한 기세를 코앞에둔 2만 명의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을 정도였다.
’전쟁은 사기로 시작해 사기로 끝난다.‘
크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첫 격돌.
그것은 전쟁에서 양측 군대의 사기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였다.
때문에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자신의 낫은, 그 무엇이 가로막든 모두 갈라버리고 적들의 목을 벨 수 있었으니까.
“흐랴아아아압!”
그가 잔뜩 움츠러든 하인드 백작의 군대로 뛰어들기 직전.
갑자기 그의 앞에서 사람 두 명이 툭 튀어나왔다.
“어엇……!”
고라니를 목격한 운전자의 심정이 이러할까.
그 말도 안 되는 현상에 크롬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현재 라시온의 북부 전체에선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도, 다른 곳에서 올 수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다니?
크롬의 눈이 그들을 빠르게 훑었다.
각각 순백의 사제복과, 청색의 비늘 갑주를 입고 있는 이들이었다.
물론 크롬은 그들을 굳이 피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길은 패도,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는 것에 있었으니까.
“재수도 없는 놈들. 원망은 하늘에 가서 하거라!”
크롬의 군마는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눈앞의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쯧, 일격에 열 명 이상은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하는 수 없지.‘
첫 격돌의 임팩트는 상당히 줄어들겠지만 우선은 두 명으로 만족할 수밖에.
크롬은 허리를 크게 비틀더니, 그 회전력이 담긴 낫을 그대로 휘둘렀다.
부아아아아아아앙!
낫에서는 마치 거대한 비행기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그 소리를 듣고서야 크롬의 존재를 의식한 순백의 사제는 옆에 있던 전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블리자드. 저거 맡아.”
“예, 마스터.”
군마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지만, 블리자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주 달려갔다.
그리고 거대한 낫이 자신의 목에 드리워지는 순간.
블리자드는 다리를 땅에 단단히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카운터.”
이어서 상대방의 낫이 블리자드의 곡도를 두드렸다.
누가 봐도 블리자드가 저 멀리 튕겨져 나가야 정상이었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콰드드드득!
“커으…… 억?”
공격이 날아오는 것을 알고 맞는 것과, 불시에 맞는 것의 괴리감은 천지차이다.
크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의 자세는 철저히 방어를 위한 자세.
당연히 고통 따위는 예상조차 하지 않았다.
헌데 공격과 동시에 명치 부근에서 엄청난 격통이 느껴졌다.
잠시지만 정신이 가출할 것 같은 아득한 충격과 동시에, 그와 군마는 나란히 뒤쪽으로 날아갔다.
쿠우우우우웅!
크롬은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군마의 아래에 그대로 깔려 버렸다.
“…….”
“…….”
연신 함성을 토해내던 양 측의 군대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쓰러진 이는 뮬딘 교를 이끄는 총대장이었으니까.
터벅, 터벅.
그 엄청난 일을 태연스럽게 해낸 블리자드는 곡도를 집어넣더니, 곧장 카이에게 걸어갔다.
“해치웠습니다, 마스터.”
마치 화장실 청소를 하고 왔다고 보고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이에 대꾸해주는 카이의 목소리도 상당히 심드렁했다.
“응, 수고했네. 그런데 저거 안 죽었는데?”
“예?”
고개를 돌린 블리자드는 군마 아래에서 꿈틀대는 적을 확인하며 작게 감탄했다.
“보기보다 터프한 놈이군요. 솔직히 끝난 줄 알았습니다만.”
“그러게. 혹시 뮬딘 군에서 한가락 하는 녀석 아닐까?”
“글쎄요. 저 녀석이 말입니까?”
크롬은 자신을 두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가, 감히…… 뮬딘 교의 이단심판관인 나 크롬을 상대로 저딴 망발을 지껄여?’
콰드드드득!
도움도 안 되는 애마의 목을 비틀어버린 크롬은 제 몸 위에 늘어지는 녀석을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군마 중에서도 좋은 품종만을 교배시킨 말이었고, 말 주제에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장비하고 있다.
심지어 어둠의 정수를 품어 덩치가 더 커져 있던 군마는 약 1,000kg.
무려 1톤에 육박하는 무게였다.
그토록 무거운 군마를 한 손으로 던져버린 크롬은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 놈들…… 잠깐, 네놈은?”
순백의 사제복에 더해 익숙한 얼굴.
크롬은 그제야 카이를 알아봤다.
“카이! 더러운 잡신의 사제 놈이군!”
이에 깜짝 놀란 카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눈치를 살폈다.
“……휴, 다행이다. 못 들으셨구나.”
툭툭.
블리자드의 어깨를 두드린 카이가 크롬을 쳐다보며 빠르게 명령했다.
“저 녀석 저거 바로 처치해. 함부로 입 못 열게 만들어. 고운 말 바른 말만 들으셔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이것 참…… 알아서 내 앞에 나타나주다니, 고마울 지경이군.”
크롬은 땅에 떨어진 낫을 발로 차서 들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교단의 주적인 카이의 목을 따면 주교의 신분으로 상승되는 것은 따 놓은 당상.
허나 이를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조금 전, 기묘한 기술로 자신을 날려버린 청색의 기사였다.
물론 카운터 스킬의 쿨타임은 5분이었기에, 이번에는 블리자드도 처음부터 맹공을 퍼부었다.
“네까짓 놈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후우우우웅!
거대한 덩치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부드럽게 한 바퀴 돌린 크롬이 낫을 쏘아냈다.
낫의 끄트머리에는 뾰족한 날이 붙어 있어, 지금처럼 창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채앵!
가까스로 이를 막아낸 블리자드는 두 자루의 곡도와 꼬리를 활용해 싸우기 시작했다.
“흠.”
블리자드와 이름 모를 엑스트라 하나가 싸우는 사이, 카이는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아군이 5만, 적군은 10만이겠지.‘
두 배의 전력 차이.
자신의 신출귀몰은 몇 명의 사람과 함께 이동할 수는 있어도, 대규모의 군단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카이는 이 전투를 아주 팽팽하게 만들어 줄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반짝!
카이의 왼쪽 약지.
그곳에 박혀 있던 반지 하나가 영롱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