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35화 (335/441)

# 335

힐통령 335화

103. 조금만 쉬자(1)

아군 전사자 2,764명.

부상자 17,236명.

적군, 생존자 없음.

보고서를 읽던 베오르크 국왕은 기쁨을 드러내기보다,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군의 전사자가 3천에 가깝군. 모두 왕국의 인재들이거늘…….”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회의실의 모든 귀족이 고개를 푹 숙이며 잠시동안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흐르자 눈을 뜬 베오르크가 카이를 쳐다봤다.

“카이 백작, 그대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 정도 피해로 그친 거라고 알고 있다. 만약 그대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피해가 발생했겠지.”

“정말 고맙네.”

“자네가 이 나라를 구한 것이나 다름 없어.”

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은 카이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 표정을 보고 오해를 한 베오르크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조금 더 당당해도 되네.”

“그래, 물론 전사자가 발생한 것은 안타깝지만…… 이것은 전쟁이었네. 한 명도 죽지 않는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 죄책감을 가지지 마십시오, 카이 백작님.”

“……예?”

이어지는 귀족들의 위로에 정신을 차린 카이가 눈을 깜빡였다.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생각은 단연 아트록이었다.

그가 대체 누구일까, 어둠의 신성력을 쓰던데 뮬딘 교에서는 어떤 위치일까. 과연 본체는 얼마나 강할까.

이에대해 생각하던 카이는 다시 회의에 집중하며 그들의 위로를 대충 받아넘겼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것도 하인드 백작님이 제 말을 믿어주셨기에 이룰 수 있는 쾌거였지요.”

이에 하인드 백작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믿음을 얻고 싶다면 너 자신을 내보여라. 옛 성현의 말씀이지. 그대는 지난 나날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었지. 난 그 모습들을 보고 그대를 믿겠다고 판단을 내린 것뿐이야. 그러니 모든 씨앗은 그대가 뿌린 것일세.”

좋은 말이지만 조금 부끄럽다.

카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베오르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회의실 안을 가득 채운 귀족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를 부러트리지 못하는 공격은 오히려 우리를 담금질해 줄 뿐이라고. 오늘이 그러했다 . 뮬딘 교의 비열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갔고, 우리는 승리했다. 동시에 왕국에 심어진 그들의 세작 또한 뿌리를 뽑아냈지. 덕분에 우리는 더욱 강해졌다. 라시온 왕국은 거친 태풍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상대가 그 뮬딘 교라고 해도 이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모두 그대들이 있기에 가능한 위업이었다.”

“라시온에 영광을!”

“라시온을 위하여!”

귀족들이 구호를 외치며 베오르크의 말에 열띤 성원을 보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역경을 이겨낸다고 생각했던 42명의 선원들은 간자였다. 나는 그들과 티끌만큼이라도 관계있는 이들을 모조리 멸할 것이며, 이것은 라시온의 새로운 시작을 세상에 알릴 것이다.”

베오르크는 철혈 군주라는 말에 걸맞게, 42명의 귀족과 관련된 모든 친인척의 말살을 명했다.

“그리고 카이 백작.”

“예, 전하.”

베오르크가 명령했다.

“이번 전쟁에서 그대가 보여준 전술 능력과 지휘 능력, 그리고 상황판단력은 이미 시작된 뮬딘 교와의 대전쟁에서 라시온이 꼭 필요로하는 능력이라고 판단된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카이는 으레 그렇듯 고개를 숙이며 겸손했다.

그저 그런 칭찬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베오르크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기만한 뮬딘 교를 작살내기로 단단히 작정한 듯싶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주인을 잃고 비어버린 동부 영지의 절반을 그대에게 맡기겠다.”

“저, 전하!”

“아니되옵니다!”

“다시 한 번 재고해 주시옵소서.”

귀족들이 깜짝 놀라며 반발했다.

‘아니, 고맙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저래? 대체 영지가 몇 개나 되길래?’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카이가 살짝 짜증이 나려던 찰나.

시종 하나가 2미터 크기의 전국 지도를 가져와 촥 펼쳤다.

지도는 평범했지만 다른 지도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동부의 절반가량이 푸른색 빗금으로 칠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어? 저긴 내 영지…….”

그 빗금 안에 리버티아와 아르칸 등, 자신의 영지가 모두 속해 있는 것을 파악한 카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베오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 조용. 이미 결정한 사항이다. 카이 백작이 아니면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베오르크 국왕은 자신의 말에 딴지를 건 귀족들을 꾸짖었다.

“정신 차려라! 이미 평화의 시대는 지나가고 격전의 시대가 도래했다. 뮬딘 교는 확실히 돌아와서 언제고 대륙을 먹어치울 준비를 하는 중이거늘, 어찌 귀족이라는 자들이 끝까지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가!”

“…….”

“크, 크흠.”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 모드.

카이는 새삼스럽게 베오르크의 위엄을 확인하며 고개를 빨리 숙였다.

괜히 불똥이 튈까봐 겁났으니까.

“카이 백작, 지금부터 그대는 이 영지들을 모두 관리해야 하느니라.”

“……예?”

카이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지도를 확인했다.

설마, 아까의 그 푸른 빗금에 포함된 영지들이 전부……?

진심이세요? 눈빛으로 묻자, 베오르크가 턱을 한 번 묵직하게 내린다.

동시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띠링!

[라시온 왕국의 동부 지역 장악력이 51%를 달성했습니다.]

[스페셜 칭호, ‘로드 오브 이스트’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탯 포인트를 15개 획득했습니다.]

[명성 725,600을 획득했습니다.]

“어…… 음…….”

카이는 눈앞의 인터페이스 창을 쳐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로드 오브 이스트? 내가 동부의 지배자라고?’

아니었는데요, 맞았습니다.

벙쪄있는 카이의 어깨를 두드리는 베오르크의 눈빛에는 신망이 그득했다.

[베오르크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베오르크가 당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합니다.]

“오, 제발…….”

안 그래도 영지 관리가 벅차서 탈모가 오는 것이 아닐지 걱정되는 마당이다.

그런 와중에 저 영지들이 대체 몇 개란 말인가?

친절한 베오르크는 묻지도 않았는데 답을 해주었다.

“이로써 자네는 총 74개의 영지를 다스리는 대영주가 되었네. 물론 그대라면 충분히 잘해내리라 믿네. 부탁하네.”

“아…… 네…….”

마음 같아선 그 부탁, 거절하고 싶다.

하지만 카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진짜 죽어도 하기 싫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대박은 맞아.’

카이는 아무리 몸과 정신이 힘들다 해도,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차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악착같이 노력해서, 호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요리를 마스터하는 편이었다.

‘우선 스페셜 칭호가 달려 있잖아. 이건 못 놓치지.’

카이는 베오르크가 귀족들에게 훈계를 내리느라 바쁜 것을 확인하고 칭호 도감을 확인했다.

[로드 오브 이스트(Lord of East)]

내용 : 국가의 한 쪽 지방을 장악한 지배자에게 주는 칭호.

효과 : 모든 스탯 +50 증가, 위엄 +50 증가. (이 효과는 칭호를 장비하지 않아도 적용됩니다.)

*주의사항* : 이 칭호는 동부 영지의 장악률이 일정 비율 이하로 떨어지면 자동 소멸됩니다.

‘과연.’

하긴, 최소 50레벨을 공짜로 시켜주는 것과 다름없는 칭호를 그냥 줄 리는 없다.

게다가 칭호의 이름만 해도 ‘동부의 지배자’다.

‘더 이상 동부를 지배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칭호는 소멸되거나……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다 이거구나.’

더더욱 베오르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생긴 셈이기도 했다.

‘나쁜 제안은 아니야.’

오히려 좋은 편이다.

왜냐하면 라시온의 동부는 당장 맞닿아있는 국가가 없기 때문이다.

동부와 맞닿아있는 지역이라고 해봤자, 라시온의 북부와 남부, 중앙뿐이다.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둘러져있기에 외세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나 해군이 쳐들어오더라도, 인어족과 할리의 힘을 빌리면 쉽게 정리할 수 있어.’

외세의 침입에 대한 걱정은 끝.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내부 통치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할 차례였다.

‘흠.’

3초 정도 고민했을까,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는 결론을 내렸다.

‘맡겨야겠다.’

누군가에게 맡기자.

굉장히 유능한 인재들에게 싹 맡겨버리자.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마침 뇌리를 스친 곳도 있었다.

‘아르칸 아카데미!’

그곳이야말로 전 대륙의 모든 유능한 이들과 왕족, 황족이 모이는 곳이 아니던가.

그중에는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 가문을 물려받을 수 없거나, 애초에 서자 출신인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오, 생각해 보니 진짜 괜찮은데?’

정보를 뽑아낼 곳도 많다.

알버트 교황부터 시작해서 각 과목의 교수들.

그들에게 월급을 주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좋아, 고민 끝.’

탈모 현상이 20년 정도 미뤄진 것 같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

***

카이는 오랜만에 아쿠에리아 영지로 향했다.

수로 위의 카누에서 꽁냥거리는 연인들이 많은, 걷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옆구리가 시려오는 도시.

그곳을 방문한 이유는 타르달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생각해보니 정말 오랜만이네.’

그에게 마지막으로 임무를 받았던 것이 아오사 때였던가, 아니면 사룡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어서 오십시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예전에는 그의 저택을 한 번 뚫어보겠다고 진짜 별짓을 다 해야 했지만, 그때와 지금의 대우는 천지차이였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의 계급은 백작.

게다가 무려 동부를 다스리는 ‘대영주’였으니까.

카이는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이라도 손목에 부착한 것마냥, 아무런 제지 없이 타르달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당연히 그의 서재였다.

똑똑똑.

[음? 이 시간에 누가……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이를 확인한 타르달이 눈을 크게 떴다.

“자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든 카이가 안부를 전했다.

타르달은 카이의 방문이 의외였는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잘 지내고 있었네. 자네에 대한 소식은 제법 자주 들리더군.”

“그, 그렇습니까?”

“물론이지. 내 기억이 맞다면 최근 몇 년 동안 왕국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에서 자네가 활약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일을 벌리거나 휘말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단물 다 빠진 늙은이한테는 무슨 용무인가?”

타르달은 짧게 코웃음을 치더니,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음, 정말 많이 화나셨나 본데?’

하긴, 먹고 살만 하다고 그를 찾아오지 않은 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카이는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구슬렸다.

“헤헤…… 제가 한동안 제법 바빠서 못 온 게 서운하셨군요.”

“서운은 무슨. 나 바쁜 사람이다. 용무 없으면 가던 길 가게나.”

“끄응.”

옆머리를 긁적인 카이는 하는 수 없이 용무를 꺼냈다.

“혹시 아트록이라는 자에 대해서 알고 계신 바가 있으십니까?”

멈칫.

책장을 넘기던 타르달의 움직임이 뚝하고 멈췄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이를 쳐다보더니, 돋보기안경을 천천히 벗었다.

“그 이름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카이는 그의 반응을 보며 확신했다.

‘헛걸음 한 건 아니네.’

타르달, 그는 아트록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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