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
힐통령 336화
103. 조금만 쉬자(2)
자리에 앉은 카이는 자신이 아트록과 만났던 일을 최대한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이를 모두 들은 타르달은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옅은 한숨을 흘렸다.
“으음…… 아트록. 세월마저 그 괴물을 꺾을 수는 없었던가.”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타르달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
카이는 그 고요함 속에서 묵묵히 타르달을 기다렸다.
그 상태가 유지된 것은 10분 정도였다.
“만약…….”
인내심에 대한 보상일까.
지그시 감겨있던 눈을 반개한 타르달이 말을 이어갔다.
“만약 자네가 말하는 아트록이 내가 아는 인물과 동일하다면…… 그는 뮬딘 교의 추기경일 걸세. 수백 년 전, 뮬딘 교가 대륙을 침공했을 때 추기경의 위치에 있던 괴물의 이름이 아트록이라는 것을 문헌에서 본 적 있네.”
“……예? 수백 년 전 인물이라고요?”
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 대마법사나 검술의 경지에 오른 이들의 수명이 길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말 길어봐야 150년이 한계다.
한데 수백 년이라니?
카이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타르달이 입을 열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게. 나도 지금 굉장히 당황스러운 상태니까.”
“인간이 수백 년이나 살고 있다니…… 솔직히 믿겨지지가 않는데요. 그냥 사칭범 아닐까요?”
“사칭범?”
“예. 타르달님이 문헌에서 읽었다던 아트록은 이미 죽었고, 그의 정신을 계승하거나…… 아니면 후손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르달이 그럴 수 있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일리는 있군. 아트록이라는 이름은 이미 잊혀진지 오래지만, 알 만한 이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이름이다. 다른 건 몰라도 각 왕국과 제국이 보관 중인 뮬딘 교에 대한 책자에는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들어가니까. 확실히 뮬딘 교에 대한 두려움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방법이지.”
“그렇다면 아마 제 예상이 맞을 겁니다. 솔직히 인간이 수백 년이나 살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음.”
카이의 말을 속으로 몇 번 곱씹어보던 타르달이 대꾸했다.
“물론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겠지. 하지만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하는 입장이라네.”
“최악의 상황이라고 하신다면……?”
카이의 질문에 타르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트록, 그가 수백 년 전의 인물과 동일 인물이라는 상황이겠지.”
“에이, 설마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카이가 웃음을 흘리며 손사래를 쳤지만 타르달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이를 확인한 카이도 표정을 굳혔다.
“어…… 진심이세요?”
“그래.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질문을 하지. 그대는 스스로를 아트록이라 밝힌 존재와 결투를 하면서 그의 실체를 본 적이 있나?”
“아니요.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크롬이라는 이단심판관의 몸을 조종해서 저와 대결한 것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그의 실물이나 실체를 보지 못했고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게 가장 큰 문제일세.”
타르달이 눈살을 찌푸리며 턱을 어루만졌다.
“당장 그가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니까.”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니요?”
그 말의 뜻이 이해되지 않은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타르달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생각해 보게. 평범한 인간이 수백 년 동안 살아남는 방법은 단연코 없네. 이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마족이라도 되거나, 흡혈귀에게 물리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야.”
“그렇죠.”
“하나 저 두 가지 방법은 단점이 뚜렷하지. 마족이 되면 신성력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생기고, 흡혈귀가 되면 태양 아래에서 신체 능력이 크게 떨어지니까.”
“맞습니다.”
카이가 동의했다.
참고로 빛의 전사가 된 데스몬드는 이런 약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나 저 둘과는 달리 장점만을 지닌 채 영생을 하는 방법이 존재하네.”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있네. 바로 리치가 되는 것이지.”
“리치…… 그렇군요.”
리치.
여타 게임과 영상 매체에서 나오는 리치는 보통 죽음을 거부한 대마법사들이 스스로의 몸을 개조하여 언데드가 된 존재다.
나이를 먹지도 않고,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으며, 자신의 영혼을 봉인해 놓은 ‘영혼함’이 파괴되지 않는 한 절대로 죽지 않는 영생의 존재다.
여기서 의문점이 발생했다.
“하지만 아트록 추기경은 뮬딘 교의 사제잖습니까? 리치는 대마법사들만 되는 존재 아니었어요?”
“문헌에 따르면 아트록 추기경은 희대의 천재였네. 그에 대한 설명으로 붙어있는 문장을 듣게 된다면 이해가 쉽겠지.”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아트록. 그는 뮬딘이 인간계를 정복하고자 낳은 존재로 묘사되어있네. 그는 무예와 신성 마법에 정통했으며, 흑마법사의 영역에도 손을 뻗어 수많은 괴물들을 만들어냈다고 알려져 있지.”
“그런…….”
카이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아오사와 자탄, 할리 같은 생명체들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라는 말이 아닌가.
게다가 붙어본 바로는 무예 또한 결코 자신의 밑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뮬딘 교의 신성 주문까지 사용한다고?’
말 그대로 무결점의 최종 보스 같은 느낌이다.
“물론 진위 여부는 파악하지 못했네. 벌써 수백 년 전의 일. 사실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과장이 되고, 부풀어지기 마련이지. 하지만 이번 일로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았군.”
타르달이 눈을 빛냈다.
“그가 진짜 아트록이든 아니든, 무예 실력만큼은 뛰어나다는 것.”
“……만약 그가 진짜 아트록이라면 더 심각한 문제겠죠?”
“물론일세. 그가 어떤 방식을 사용했든 수백 년 동안 죽지 않고 힘을 쓸 수 있는 상태라면……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았을 것 같군.”
“큰일이네요. 뭔가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 그러니 자네는 우선 힘을 키우게.”
타르달은 힘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강조했다.
“언제, 어디에서 그와 만나더라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게.”
“힘이라…… 알겠습니다.”
“나는 독자적으로 아트록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아 보겠네.”
***
카이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천상의 정원이었다.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에, 헬릭의 볼살이라도 늘리며 힐링을 할 요량이었다.
“앗! 카이다!”
의자에 앉아 떠다니는 구름만 멍하니 구경하던 헬릭이 반색했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이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강아지 같았다.
“위에서 다 봤느니라! 전쟁에서 이긴 걸 축하하는 것이야.”
“다 보셨어요?”
“웅. 그런데 마지막이 조금 이해되지 않더구나. 어째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상대에게 당한 것이냐?”
“아, 그게…….”
카이는 그 상대가 아트록이라는 말을 넌지시 해주었다.
“헉! 아트록이?”
헬릭이 머리카락을 쭈뼛 세우며 질색했다.
“어라, 누군지 아세요?”
“알다마다! 그 나쁜 녀석! 나쁜 뮬딘의 나쁜 부하 아니더냐!”
나쁘다는 단어를 세 번이나 연속해서 사용한 헬릭은 두 볼에 바람을 넣어 빵빵하게 만들었다.
무언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마치 복어를 연상케하는 그 모습은 가히 위압적……이긴 커녕 귀여울 뿐이다.
“그 녀석이 그대에게 뭐라고 했느냐?”
“별 얘기 안 하던데요. 니가 태양의 사제냐? 나는 아트록이다. 뭐 대화는 이 정도 나눴네요.”
“그것 참 싱싱한 녀석이구나.”
“싱거운 녀석이겠죠.”
헬릭의 말을 정정해 준 카이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고는, 두 손을 뻗어 헬릭의 볼을 쭉쭉 당겼다.
‘어라.’
며칠 전보다 조금 더 늘어나는 기분이다.
카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헬릭 님. 살 찌셨어요?”
메이저리거 급의 몸 쪽 꽉 찬 돌직구였다.
“흐에익!”
이에 헬릭은 괴상한 소리를 내뱉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시, 신을 상대로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대 지금 좀 무례해!”
‘찌셨네, 찌셨어.’
짜게 식은 눈으로 헬릭을 바라보던 카이는 건네주려던 과자를 당분간 인벤토리에 보관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인벤토리에서 몇 가지 새로운 아이템들을 꺼냈다.
“……그것들은 다 무엇이더냐?”
새로운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자, 그새 또 관심이 생긴 헬릭이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왔다.
“운동 기구예요. 이건 줄넘기, 저건 훌라후프, 그리고 이건 고정형 자전거.”
헬릭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건강을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이로구나. 응원할 테니 열심히 하거라.”
“이거 제 거 아닌데요.”
“그럼 누구 것이더냐?”
“그야 당연히 헬릭 님이죠. 살 빼시기 전까지는 간식 없습니다.”
“끄아앙!”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헬릭이 구슬픈 목소리로 소리쳤다.
“가, 갑자기 이러는 것이 어딨느냐. 내가 먹는 것만 봐두 배부르다구, 그대가 나를 막막 이쁘다구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많이 먹은 건데! 그대는 거짓말쟁이냐!”
“그야…… 이렇게까지 조절을 못하실 줄은 몰랐죠. 건강 나빠지시니 운동은 조금 해주세요.”
카이가 꺼낸 아이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몇 권의 책을 더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건 기초 과목들의 교과서예요. 지난번에 학교 다녀보고 싶다고 하셨죠? 여기 있는 책들은 미리 다 배우셔야 해요.”
슈우우웅.
때마침 포탈이 하나 열리며, 하늘색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소녀 하나가 걸어나왔다.
“어라, 카이님.”
“안녕하세요, 라샤 님.”
헬릭은 자신의 절친을 보자마자 그녀의 뒤로 도망쳤다.
“으아아앙! 라샤, 들어보거라. 카이가 나에게 너무한 짓을 하는 것이다.”
속닥속닥.
헬릭의 고자질을 모두 들은 라샤가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거봐. 내가 조금 자제하면서 먹으라고 했지?”
“그런데 너무 맛있는 걸 어떡하느냐.”
라샤는 마치 언니 같은 모습을 보이며 헬릭을 토닥였다.
“으이구. 운동은 나도 같이 해줄 테니까 열심히 한 번 해보자?”
“웅…….”
딸 아이 키워도 소용없다더니, 친구 말을 훨씬 더 잘 듣는다.
카이는 살짝 서운함을 느끼며 공부 책자를 들어보였다.
“아참, 헬릭 님은 인간들의 학교에 한 번 다녀보고 싶다고 하시던데. 라샤 님은 어떠세요?”
“학교…… 요?”
눈을 둥그렇게 뜨는 그녀에게 아르칸 아카데미에 대해 설명해 주자, 그녀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도 다녀볼게요. 헬릭을 혼자 보내면 걱정되기도 하니까요.”
“네, 그럼 라샤 님도 이걸로 같이 공부하세요.”
그녀에게도 기초 산수와 역사, 마법과 검술 관련 책자들을 건네주었다.
헬릭이 다시 한 번 볼을 부풀렸다.
“카이는 나를 너무 어린 아이로 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나이에 기초 산수 공부라니…….”
이에 라샤가 산수 책을 훑어보며 꺄르륵 웃었다.
“뭐야, 덧셈부터 배우는 거네. 너 이거 못하잖아.”
“아, 아니거든.”
헬릭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를 놓치지 않은 카이는 불시에 질문을 던졌다.
“9 더하기 16은?”
“어? 어어……?!”
그녀의 눈이 더욱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인줄.
“9…… 9는 8 다음이고…… 16은 15 다음이니까…….”
자신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 열 개를 내려다보며 눈빛을 출렁이던 헬릭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물론 이를 쳐다보는 카이도 살짝 패닉 상태에 빠졌다.
‘……생각보다 심각하신데? 애초에 저걸 보고 답이 나올 리가 없지.’
질문의 답은 25, 손가락을 모두 사용해도 셀 수 없는 숫자였으니까.
“푸후훗!”
이를 지켜보던 라샤는 고개를 돌린 채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다.
카이는 그녀에게도 한 번 물어봤다.
“라샤 님, 25 더하기 7은?”
“절 바보로 아시나요? 32잖아요.”
“오오…… 정답.”
우아하게 고개를 돌린 라샤가 거만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카이는 살짝 감탄하며 다른 문제도 내보았다.
“15 더하기 23.”
“38.”
“57 더하기 13.”
“아이 정말. 70이잖아요.”
라샤의 콧대는 정답을 맞출 수록 점점 높아졌다.
슬슬 재미가 없어진 카이는 마지막 문제를 냈다.
“음. 진짜 잘 맞추시네. 그럼 마지막으로 26 빼기 12.”
“…….”
라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꿀꺽, 목울대도 크게 한 번 출렁거린다.
심지어 본인이 헬릭의 절친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와 똑같은 속도로 눈동자를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옅은 한숨을 내쉰 카이는 교과서를 돌돌 말고는, 두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아얏!”
“아!”
카이는 두 손을 들어 정수리를 문지르는 바보 신들에게 말했다.
“두 분 다 공부하세요. 나중에 시험 칩니다.”
두 소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착하게도 고개만큼은 천천히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