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
힐통령 341화
105. 사천왕(1)
드록과의 경기를 끝낸 카이는 승리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트레이닝 룸으로 향했다.
지금의 감각을 잊어버리기 전에, 검을 계속 휘두르면서 몸이 기억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 카이의 시야로 트레이닝 룸 입구에 말끔한 정장을 입고 서있는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왠지 나한테 말 걸 것 같은데.’
그 예상은 적중했다.
카이가 트레이닝 룸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그가 앞을 가로막았다.
“베니쉬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카이는 웃는 얼굴로 말하는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길드 가입 권유라면 사양입니다.”
이런 식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은 게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미드 온라인의 주 콘텐츠가 사냥과 퀘스트라지만, 결투장 또한 파이가 큰 콘텐츠다.
베니쉬는 그곳에서 떠오르는 슈퍼 신인이니 제법 덩치가 큰 길드에서도 관심이 갈 수밖에.
제2의 리미트리스 길드를 꿈꾸는 그들은 베니쉬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달콤한 조건을 제시했다.
물론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사람들아. 그 조건들의 10배를 제시해도 가입할 생각이 없네요.’
자신의 돈과 명성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렇게 거절을 해대는 데도 정말 끊이지를 않네.’
이제는 귀찮다는 것을 넘어, 짜증이 날 정도였다.
실제로 카이가 트레이닝 룸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길드 스카우터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비켜주시죠.”
“아, 이런 오해를…… 전 이런 사람입니다.”
정장의 남성이 품속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카이에게 건넸다.
의심스런 눈초리로 명함을 받아들자, 그곳에는 의외의 정보가 쓰여 있었다.
[결투장 관리인, 라딘]
“결투장 관리인……?”
그들은 모두 NPC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말 그대로 결투장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존재들이었다.
“예. 인사가 늦었습니다.”
“결투장 관리인이 왜 저를?”
우선 그가 길드 스카우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카이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에 라딘 또한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우선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손가락을 튕겨 포탈을 만든 라딘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포탈로 들어서자,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연상케 하는 넓은 방이 나왔다.
“앉으시지요.”
푹신한 소파에 앉자, 라딘이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관리자들끼리 내부 회의를 거친 결과, 베니쉬 님에게 조금 더 큰 혜택을 드려도 될 것 같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더 큰 혜택이라뇨?”
카이가 눈을 깜빡였다.
결투장에서 스스로를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은 랭크 포인트가 전부다.
랭크 포인트가 높아지면 대기실이나 숙소, 트레이닝 룸의 퀄리티가 높아진다.
뿐만 아니라 입에 들어가는 음식조차 더 고급스러워진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부러우면 랭크 포인트를 높이라고 은근히 종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분명히 1,000점을 넘겼을 때 이미 등급이 한 번 올랐는데?’
카이가 알기로는 1,000점 단위로 선수 대우가 확 달라진다.
우선 전체 비율의 90%를 차지하는 1~1,000점의 선수들.
이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결코 루키 취급을 벗어날 수 없다.
물론 대우 자체는 나쁘지 않다.
삼시세끼 밥을 주고, 잘 곳도 제공해주니까.
물론 그 환경이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 수십과 같은 방을 쓰는 것이 편할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고생은 1,000점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막을 내린다.
PVP를 관람을 하러 결투장을 찾는 관중들도 수준 높은 싸움을 보는 것을 원하지, 허접들이 투닥거리는 것을 보는 걸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즉, 결투장의 주 수입원은 모두 랭크 포인트 1,000점 이상의 선수들이 만들어 낸다는 뜻.
때문에 그들은 경기를 치룰 때마다 결투장으로부터 소정의 파이트머니를 받는다.
이것이 사냥을 등지고 결투장에만 목숨을 거는 유저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랭크 포인트를 1,000점 이상만 유지해도, 월 3~400만 원 정도는 손에 쥘 수 있으니까.
잠시 생각을 하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전 이제 겨우 랭크 포인트 1,500점이고. 혜택 상승은 이미 1,000점을 돌파했을 때 한 번 받았습니다만.”
그 말에 라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겸손하시군요. 물론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조금 더 큰 혜택을 드린다고 한 건, 당연히 그 위의 혜택입니다.”
“그 위의 혜택이라면……?”
“저희 관리인들은 베니쉬 님이 최소 2,000점 이상의 선수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닷새 만에 1,500점을 찍은 선수는 결투장 역사상 베니쉬 님이 최초니까요. 이건 굉장한 업적입니다. 무패의 여제조차 1,500점을 달성하는데 일주일이 걸렸지요.”
“그럼 지금 저에게 2,000점 선수들이 누리는 혜택을 주겠다. 이 소리입니까?”
“맞습니다.”
라딘이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카이를 더욱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잘 이해되지 않는군요. 저에게 혜택을 준다고 결투장에 무슨 이득이 남습니까?”
“가장 큰 것은 홍보 효과이지요. 우리 결투장에 무패의 여제조차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달성한 루키가 나왔다. 다들 결투장에 와서 돈을 써라……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베니쉬 님을 적극적으로 홍보할 겁니다.”
“잠깐만요. 지금 하시는 말씀은…….”
대놓고 자신과 무패의 여제.
즉 캐서린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겠다는 말 아닌가.
라딘도 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베니쉬 님. 결투장은 결국 쇼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저희는 관중들이 찾아와야 돈을 벌 수 있는 구조이지요. 선수들의 파이트머니도 당연히 관중들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 더욱 많은 관중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법을 매일 같이 고민합니다.”
“그 고민의 결과가 저라는 겁니까?”
“예.”
흐음, 카이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혜택이 올라가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우선 이 방입니다.”
라딘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현재 베니쉬 님은 2인실을 쓰시잖습니까? 물론 결투장에서 잠을 주무시지 않으니 소용은 없는 듯하지만요. 아무튼, 이 방을 드릴 겁니다. 혼자 사용하시면 됩니다.”
“흐음.”
한참 부족하다.
솔직히 자신이 푹 쉬는 것을 원한다면, 귀찮긴 해도 영지의 저택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으니까.
“다음은 식사입니다. 일류 셰프가 식사 시간마다 베니쉬 님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 줄 겁니다.”
“그리고요?”
“트레이닝 룸.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는 개인 트레이닝 룸이 제공될 겁니다.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훈련하실 수 있지요.”
이건 확실히 구미가 좀 당겼다.
안 그래도 훈련을 하고 있으면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져 집중이 끊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장 큰 혜택은…… 역시 지명권이지요.”
“지명권이요?”
“예. 아시다시피 랭크 매치의 경기 상대는 랜덤으로 결정됩니다. 하지만 2,000점을 넘긴 선수들은 자신의 상대를 지명할 수 있습니다.”
“호오.”
카이가 눈을 빛냈다.
한 마디로, 자신이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 상대를 고를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경기 상대로 지명할 수 있는 대상은 자신의 점수에서 위아래로 500점까지입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결투장 측에 얽매이는 건 하나도 없는 것 맞습니까?”
“예. 그저 홍보만 하게 허락해 주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하지요.”
카이는 라딘과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
“확실히 좋긴 좋네. 사람이 이래서 출세를 해야 돼.”
결투장에 고작 네 명만이 존재한다는 2,000점 대의 선수들.
그들에게만 제공되는 개인 트레이닝 룸은 확실히 좋았다.
최신식 설비는 물론이고, 혼자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공용 트레이닝 룸보다 더 넓었다.
카이는 트레이닝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드록과의 전투를 복기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후우.”
이미지 트레이닝이 끝나면 자신의 경기 동영상을 재생했다.
자신이 직접 경기할 때 느낀 상황과, 이렇게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아, 저 때 화살이 다른 때보다 더 빨리 나왔다 했더니…… 방패 올리면서부터 준비 들어갔었구나.”
“환검과 매화검을 섞은 기술은…… 전용 스킬이 없어서 그냥 눈대중으로 따라하는 것뿐이지만 효과는 제법 좋네.”
"쓰읍. 저기선 현란한 쾌검이 아니라 무거운 중검을 사용해서 가드를 한 방에 뚫어버렸어야 했네. 그랬다면 드록이 저렇게 석궁을 미친 듯이 쏘지 못했겠지.”
영상을 보고, 필기를 하고.
그것을 외운 뒤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잡는다.
그 상태에서 자신이 새롭게 익힌 점을 의식하며 검을 휘두른다.
카이는 흐르는 시간조차 잊은 채 그런 훈련을 이어나갔다.
[고급 여명의 검법 스킬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어깨 관절이 살짝 유연해집니다. 검을 더 부드럽게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폭풍성장의 시간이었다.
***
현재 세계 8대 길드의 위상은 민들레와 다를 바 없었다.
얼핏 보면 제법 거대해 보이지만, 입김만 후 불어도 홀쭉해지는 거품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말만 세계 8대 길드지, 그들을 유명무실해진 과거의 유산이라 생각하는 유저들도 많았다.
사실 검은 벌이 몰락했을 때만해도 인식이 이렇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천화라는 존재가 그들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채웠으니까.
하지만 타이탄 길드가 무너지는 것을 기점으로 세계 10대 길드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타이탄의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길드는 많았지만, 그들은 뚜렷한 실적이나 성과를 내보이지 못한 상태였다.
오히려 저들끼리 경쟁을 하며 제 살 깎아먹기를 반복.
결국 세계 10대 길드 중 한 자리는 공석으로 굳혀져 세계 9대 길드라 불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느냐, 아니면 한없이 추락하느냐.
선택의 기로에 놓인 상황에서, 뜬금없이 니혼이치 길드가 자멸했다.
세계 10대 길드 시절부터 뚜렷한 실적을 보여주지 못해 꾸준한 의심을 받던 그들이, 무리해서 자탄 레이드를 시도하다가 대패한 것이다.
니혼이치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고, 회생은 불가능했다.
이미 대중들은 그들이 세계적인 길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결국 사람들은 그들을 제외하고, 세계 8대 길드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이 세계 8대 길드라는 말을 쓰면서도, 그 단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된 것은.
-걔네는 말만 세계 8대 길드지, 카이한테 걸리면 죄다 털릴걸?
└제가 뉴비라서 몰라서 그런데, 그래도 개인이 길드한테는 안 되지 않나요?
└그런데 쨔쟌. 절대라는 건 없더군요. 실제로 세계 10대 길드였던 검은 벌과 타이탄 길드는 카이, 단 한 사람의 손에 찢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세계 8대 길드보다 카이를 더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저들의 공포로 군림하는 길드가 단 한 곳 있었다.
바로 세계 10대 길드 시절부터 조용히 활동하던 신비 길드, 적색여명회가 그 주인공이었다.
소수 정예를 추구하는 적색여명회에 대해 알려진 바는 크게 없다.
회원 수가 21명이라는 것 외의 모든 정보는 비밀이었으니까.
그런 이들이 세계 10대 자리를 차지했던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적색여명회에 의뢰하면, 대상은 죽는다. 그게 설령 랭킹 1위라고 해도.
현재까지 여명회의 암살 의뢰 실패율은 0%.
실제로 초창기 시절 랭킹 1위였던 유저들도 여럿 죽였다.
어찌 보면 유하린이 랭킹 1위를 차지하게 만들어준 은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다.
“부회장. 벌써 고민만 2주야. 저쪽에서도 슬슬 재촉하고, 결정 내려야 해. 언제까지 회장만 기다리고 있을래. 벌써 네 달 동안 잠수 중인데. 매번 그랬듯이 이거 반년은 간다니까.”
“…….”
부회장이라 불린 이는 띄워놓은 메시지 창만 빤히 쳐다보며 말을 아꼈다.
그의 메시지 창에는 수천 개의 의뢰가 와있었지만, 그가 지난 2주 동안 고민했던 의뢰는 단 하나뿐이었다.
-의뢰자 : 골리앗과 스팅
의뢰 내용 : 랭킹 1위 카이의 무한 척살
보상 : 한 번 죽일 때마다 5만 골드
난이도 : 측정 불가
눈을 감은 부회장은 고민했다.
고민의 이유는 당연히 돈 때문이었다.
1골드면 한화로 10만 원.
10골드에 100만 원.
100골드에 천만 원.
……
5만 골드면 50억이다.
그는 간만에 받은 초대형 의뢰에 2주라는 시간 동안 고민했다.
‘이럴 때 회장이 있었어야…… 젠장.’
방랑벽이 심한 회장은 가끔씩 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훌훌 떠나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회장을 제외한 전력으로 카이를 상대한다라…….’
고민이 이어지기를 잠시.
탁.
돌연 자리에서 일어난 부회장은 걸어놨던 망토를 걸치며 말했다.
“받자.”
“오케이~ 그럼 애들 몇 명이나 부를까?”
그 질문에, 부회장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싹 다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