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
힐통령 344화
105. 사천왕(4)
카이는 관중석을 크게 한 바퀴 돌아봤다.
그때까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이를 쳐다보던 카이는 그제야 등을 돌려 경기장을 내려갔다.
“어…… 어어.”
확실히 프로는 프로다.
카이가 선수 대기실로 향하는 것을 본 사회자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장외 패를 당한 네스트를 쳐다보았다.
“베, 베니쉬 선수가 네스트 선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랭킹 포인트 2,237점으로 훌쩍 뛰어오릅니다!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후아.
사회자의 목소리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참아왔던 숨을 뱉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실화냐?”
“진짜로 네스트를…… 사천왕을 이겼다고?”
“베니쉬는 엄청 얻어맞는 것 같더니, 마지막에 역전하네.”
“설마 네스트가 힘에서 밀릴 줄은 몰랐는데…….”
대부분의 관중들이 위와 같은 감상을 내렸다.
물론 이에 속하지 않는 ‘일부’는 생각에 잠겼다.
‘베니쉬…… 이로써 자신의 실력이 2,000점의 무대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입증했군.’
‘경기 내내 공격을 흘리며 피해를 최소화하더니, 한 번의 공격으로 깔끔하게 끝내 버렸다.’
‘몸값이 더 뛰겠어.’
‘영입을 위해선 뭘 제안해야 하지?’
베니쉬라는 변수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서.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호오…….”
베니쉬와 네스트의 경기를 가만히 관람하고 있던 남자 하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친구네.”
무색의 자칼.
그가 베니쉬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
“흐읍! 하아, 하아…….”
카이는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휘두르는 것을 끝으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던 그는 높은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네스트의 기술을 배우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네.’
이전까지 붙었던 상대들은 며칠 정도 수련하면 그들의 특징은 제법 따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스트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무려 10일 가량을 연습하고도 이제야 겨우 감을 잡은 정도였으니까.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무기의 차이였다.
‘주먹과 검. 그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게 생각보다 힘들었어.’
때문에 카이는 그가 보여줬던 수많은 공격들을 낱낱이 분해해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만을 분류했다.
풋워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권사와 검사는 상대방과 유지해야 하는 거리마저 달랐으니까.
“끄응.”
지난 10일 동안 이론과 수련을 병행하며 이러한 고충들을 해결한 카이는 피곤함을 느꼈다.
하지만 쉴 시간은 없었다.
‘이제 슬슬 시작될 텐데.’
최근 결투장은 난리가 났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고.’
자신이 사천왕 중 한 명인 네스트를 쓰러트렸기 때문이다.
이는 결투장 컨텐츠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 바람이 가장 거세게 느껴진 곳은 단연 커뮤니티였다.
[결투장의 새로운 슈퍼 루키, 모든 기록을 역대급으로 갈아치우며 고공행진.]
[베니쉬, 그들만의 리그라 불리던 결투장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선수.]
[리미트리스 마스터 캐서린, ‘조만간 그와 맞붙을 날을 진심으로 고대하는 중’ 발언 화제.]
무패의 여제 캐서린과 그녀의 밑에 존재하는 사천왕.
이 시스템이 굳혀진 뒤로는 결투장에 뉴비가 잘 유입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누가 봐도 고여 있는 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베니쉬라는 존재의 등장은 이 고정 관념을 아주 시원하게 깨부숴 버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혹시 나도?’라는 일말의 희망을 불어넣어 줬다는 뜻이다.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이 작아지던 결투장은 순풍을 타고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흐음. 트레이닝 룸에서 나오던 카이는 자신의 스위트룸으로 배달된 신문을 들어올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결투장에서의 사건/사고나 매치 소식 등을 전해주는 배틀 뉴스.
그곳의 1면은 두 인물을 통째로 담고 있었다.
[무색의 자칼 VS 정령술사 케인 매치 성사. 자칼, 사천왕전 데뷔 상대로 케인 지명하다!]
바로 일 주일 전, 자칼이 케인을 다음 경기 상대로 지명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거짓말 같은 소식에 열광하고, 환호했으며, 또 궁금해했다.
그것은 카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사천왕끼리 맞붙는 건…… 어마어마한 리스크를 동반할 텐데. 대체 왜?”
물론 자신이 완벽하게 이긴다는 자신이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아무도 미래를 볼 수는 없다.
혹시라도 사천왕 매치에서 패배하기라도 하면, 1,000점대로 강등되는 것은 물론.
사천왕 간에 서열까지 고정이 되어버려서 명성에도 흠집이 날 수밖에 없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자칼은 존재감이 굉장히 희미한 녀석이라고 했는데…… 정보가 틀렸나?’
카이는 네스트를 지명하기 전, 네 명의 사천왕들을 모두 분석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대결 상대를 고르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가장 맞붙기 싫었던 게 자칼이었지.’
그 이유는 명확했다.
그에겐 색(色)이 없기 때문이다.
네스트는 압도적인 힘과 무술.
세이리에겐 조용한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강력한 마법.
마지막으로 케인에겐 정령술이라는 뚜렷한 특징들이 있었다.
하지만 자칼에겐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닉네임도 무색인 거겠지. 특징이 없으니까.’
그저 무난하게 공격하고, 무난하게 회피하며, 무난하게 경기를 이겨 버린다.
사천왕이긴 하지만 그의 팬층이 유난히 옅은 이유이기도 했다.
“혹시 관리인들 쪽과 뭔가 딜이 있었나.”
그 쪽에서는 결투장의 경기가 살아나자, 이 기회를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천왕 매치라면 확실히 빅 이벤트이긴 하지.’
실제로 최근 일주일을 돌아보면 메인 퀘스트나 레이드 쪽의 뉴스보다, 결투장에 대한 기사가 더 많이 나오는 중이었다.
당연히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사천왕전의 두 주역이고.
“알 수가 없네.”
카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
카이는 2,000점 이상의 선수만이 입장할 수 있는 최상급 관중석으로 안내되었다.
시원한 음료와 각종 간식들이 즐비한 안락한 장소.
그곳에는 이미 두 명의 선객이 위치한 상태였다.
“……여.”
10일전 카이에게 패배의 쓴맛을 봤던 네스트와.
“…….”
카이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경기장으로 고개를 돌려 버린 여자 하나.
‘아마 저 여자가 세이리겠지. 정숙의 세이리.’
경기를 보면서 마실 콜라와 치킨, 감자튀김을 챙긴 카이는 자리로 향했다.
관중석에는 푹신한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는데, 각각 네스트와 세이리가 끝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가운데 자리만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중앙에 앉자 네스트가 카이를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는 흠흠, 목청을 가다듬더니 입을 연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한 것 같으니 알려주지. 나는 지난 10일 동안 총 여섯 번의 경기를 치렀다. 당연한 말이지만 결과는 전승. 덕분에 다시 2,000점이라는 점수를 복구했지.”
“별로 궁금하진 않았는데.”
카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감자튀김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뭐, 고생했네.”
“누구 덕분에 안 해도 될 고생을 했지.”
가시가 있는 말을 뱉어낸 네스트가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그가 잘라낸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 씹으려는 순간, 카이가 질문했다.
“혹시 이번 경기에 대해 아는 거 있나?”
“……무슨 뜻이지?”
네스트가 고기를 먹기 위해 벌렸던 입을 다물며 대꾸했다.
“자칼의 성격에 케인을 지명했다는 게 이해되질 않아서.”
“아아…….”
포크를 내려놓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 자칼, 그 녀석은 딱히 타인과 교류가 없었으니까. 너처럼 말이지.”
“흐음.”
“굳이 추측을 해보자면 관리인들에게 모종의 제안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다. 사천왕 매치는 이목 끌기엔 더없이 좋은 이벤트니까. 최근 결투장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안 할 이유가 없지.”
어깨를 으쓱거린 네스트가 다시 포크를 들었다.
‘흠, 역시 관리인들이 연관되어 있는 건가. 이 부분은 내 생각과 비슷하네.’
카이가 재차 물었다.
“네 생각엔 누가 이길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카이에게 제법 중요했다.
다음 상대로 정령술사 케인을 염두에 뒀는데, 여기서 자칼에게 패배하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멈칫,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고기를 쳐다보던 네스트가 포크를 딱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케인.”
“왜지?”
“직접 붙어봤으니까. 나 같은 근접 계열의 클래스에게 저런 녀석은 성가시다. 그건 자칼 또한 마찬가지겠지.”
네스트가 살짝 질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드 온라인의 정령술은 정말 성가시다. 마법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지. 우선 스킬들에 쿨타임이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술사 케인은 자신이 다음 상대로 염두에 뒀기에 이미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네스트의 말대로 정령술은 성가셔.’
정령술사의 모든 스킬에는 쿨타임이 없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스킬을 난사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영원히 지속되면 밸런스 붕괴나 다름없는 법.
당연히 브레이크 또한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친화력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정령의 HP를 사용해서 스킬을 쓴다는 느낌이야. 자연친화력이 바닥나면 정령들이 역소환되니까.’
때문에 정령술사는 몇 개의 정령과 계약을 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정령과 계약을 할 때마다 자연친화력이 대폭 상승하고, 재생 속도도 증가하니까.
물론 사용할 수 있는 스킬들의 가짓수가 배로 늘어난다는 장점도 존재했다.
“케인은 몇 개의 정령과 계약했지?”
“내가 알기로는 둘. 하지만…….”
“숨겨놓은 패가 있겠네.”
카이와 네스트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장의 사천왕들은 모두 캐서린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스트가 태클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준비한 것처럼, 케인도 준비해 뒀을 터.
“뭐, 그런 거지. 그리고 말 시키지 마라. 밥 먹을 거니까.”
이번에야말로 고기를 먹겠다는 각오를 품은 네스트는 고기를 입 안으로 빠르게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입안 가득 퍼지는 육즙과 소고기의 향에 그의 표정이 해맑아지는 순간.
“자칼이 이길 거야.”
“쿨럭, 쿨럭!”
그의 입 안에서 분해되던 고기들이 다시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에 카이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세이리를 쳐다봤다.
‘결투장 역사상 그녀가 말을 한 횟수는 세 번밖에 안 된다고 하던데.’
괜히 정숙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게 아니다.
여기서 정숙이란 그녀가 여자로서 행실과 마음씨가 맑고 곱기 때문이 아니었다.
‘말을 안 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말을 안 하냐면, 그녀는 마법 스킬을 시전할 때조차 입을 열지 않는다.
마법 스킬의 숙련도가 극에 달했을 때 사용할 수 있다는 무영창의 달인인 것이다.
테이블에 흩어진 고기 조각들을 보고 입맛이 뚝 떨어진 네스트는 그릇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웬일이지? 네가 말을 하다니.”
“평소엔 입을 열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상하군. 내가 항상 먼저 인사를 했는데.”
“이해 못했니? 평소엔 입을 열 필요가 없었어.”
잠시 후, 그녀의 말을 이해한 네스트의 표정이 구겨지자 카이가 입을 열었다.
“자칼이 이길 거라니, 왜 그렇게 생각해?”
“난 그와 붙어봤으니까.”
“아, 맞아. 분명히 예전에 둘이 붙어본 적이 있었지.”
네스트가 기억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끝 차이로 겨우 패배하지 않았나? 아까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
세이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경기장 위로 올라오는 자칼을 쳐다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은 그 때 분명 전력이 아니었어. 나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설마.”
네스트가 피식 웃으며 부정했지만, 세이리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에 카이는 새로운 시선으로 자칼을 내려다보았다.
‘무색의 자칼이라…….’
회색의 가면을 쓰고 있는 그가 케인의 맞은편에 위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