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
힐통령 346화
106. 무색의 자칼(2)
최근 카이의 하루 스케줄은 매우 간단했다.
동이 트는 시간에 접속해서 가볍게 트레이닝을 한 뒤, 샤워를 마치고 밥을 먹는다.
보통 배틀 뉴스가 배달되는 것도 이 때, 밥을 먹고 있는 아침 시간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꿀꺽, 꿀꺽.
카이는 간단하게 조리된 모닝 토스트와 우유를 먹으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분명 자칼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겠지.’
어제 있었던 자칼과 케인의 사천왕 매치.
거기서 자칼은 사람들에게 기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어제의 경기 하나로 자신의 전성기를 스스로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
때문에 카이는 오늘 배틀 뉴스의 테마가 자칼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예상은 쏙 들어맞았다.
[자칼, 정령술사 케인을 상대로 12분 만에 압승. 업계의 평론가들 최고 평점 부여.]
[무패의 여제 캐서린, ‘자칼의 경기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극찬]
[경기 한 번으로 자칼이 벌어들인 파이트머니는 얼마?]
“음음.”
신문 1면의 상단에는 뒷 페이지에 기재된 기사들의 제목과 페이지가 함께 적혀 있었다.
“자, 그럼 대문의 소식은…… 푸웁!”
신선한 우유를 마시며 시선을 내리던 카이의 입에서 그대로 흰색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쿨럭, 쿨럭!”
몇 번이고 기침을 토해낸 카이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우유에 젖은 신문지를 들어올렸다.
신문의 1면에는 자칼과 베니쉬, 즉 자신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었다.
[무색의 자칼,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다음 먹잇감은 베니쉬.]
“이게 뭔 개소리야…….”
카이는 휴지로 신문을 닦아내며 빠르게 기사를 읽어 내렸다.
[정령술사 케인과의 경기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된 자칼이 다시 한 번 경기를 성사시키며 화두에 올라섰다. 이번 상대는 슈퍼 루키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베니쉬. 두 사람의 경기 결과를 예측하는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며, 배당률은 자칼과 베니쉬가 각각…….]
기사를 읽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더 읽었다.
“그 녀석…… 대체 뭐야.”
카이는 어젯밤 그와의 만남에서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냥 집에 들어와 버려서 그런가? 차라도 대접해 줄 줄 알았나?’
그럴 리가.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낀 카이는 식사를 서둘러 마친 뒤, 그대로 방을 나섰다.
***
방을 나서자 복도의 벽에 한 사람이 기대어 서 있었다.
자칼이었다.
“…….”
그를 보는 카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인기척을 느낀 자칼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카이를 쳐다봤다.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은데, 가면 때문에 보이지가 않았다.
“오늘도 쉬고 있는 겁니까?”
“네. 이젠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 복도 벽이 제일 편하네요.”
‘익숙해져?’
고개를 갸웃거린 카이는 벽을 툭툭 두드리는 자칼에게 다가갔다.
카이는 들고 있던 신문을 흔들며 말했다.
“아침부터 깜짝 놀랐습니다.”
“서프라이즈가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후우…… 솔직히 그쪽이랑 경기하는 건 괜찮습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어차피 무패의 여제에게 도전하려면 저도 포인트를 모아야 하니까요.”
“예, 그런데요?”
“너무 궁금해서 이유 정도는 알고 싶네요. 왜 저입니까? 혹시 어제의 만남에서 제가 뭔가 실수를…….”
“아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검지를 펼친 자칼이 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물론 베니쉬 님과 경기를 하고 싶다고 결심한 건 어제의 만남 이후가 맞아요.”
“역시 어제의 만남에서 뭔가 변화가 있었군요.”
“뭐,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낮은 웃음을 흘리던 자칼이 말을 이었다.
“사실 2주 전부터 베니쉬 님을 기다렸거든요. 이 복도 벽에 기대서 말이지요.”
“……저를요? 이 복도에서요?”
살짝 소름이 돋은 카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모르고 있었다.
게임에 접속을 하면 트레이닝 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다 보냈었으니까.
“예. 그런데 소문대로 정말 열심히 연습하시는 것 같더군요. 한 번도 나오질 않으셨으니까.”
툭툭.
자칼은 손가락으로 벽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래서 어제 경기를 했던 겁니다. 사천왕 매치라면 보러 나오실 줄 알고.”
“……잠깐만요. 정령술사와 경기를 한 이유가 저 때문이라고요? 제가 숙소에서 나와서 관람을 할까봐?”
“맞습니다. 어제 경기가 끝나자마자 인터뷰도 모두 무시하고 달려온다고 제법 고생했지요.”
그의 목소리에선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이 녀석, 대체 뭐하는 녀석이야?’
자신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사천왕 한 명과 경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치르다니.
이에 자칼은 카이의 머리를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달에 캐서린과 경기를 치룰 생각이었습니다. 결투장이 슬슬 재미없어지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빠르게 포인트를 모으고 그녀와 싸우려고 했는데…….”
자칼이 카이를 빤히 쳐다봤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을 카이의 얼굴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그의 투구를 쳐다봤다.
“베니쉬 님이 나타나셨죠.”
“……그래서요? 어차피 저보다는 무패의 여제랑 경기하는 편이 훨씬 더 재미있을 텐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캐서린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고작 결투장 랭킹 1위. 반면에…….”
말 끝을 흐린 자칼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일주일 뒤의 경기. 정말 기대되는군요. 그때 뵙겠습니다.”
카이는 서둘러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확신했다.
‘저 녀석…… 설마 내 정체를 알아챈 건가?’
아무래도 어제 무언가 말실수를 한 모양이다.
그랬으니 알아차렸겠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베니쉬의 정체가 카이라는 것이 알려졌다면, 결투장은 이렇게 조용할 리는 없을 테니까.
“눈썰미 좋네.”
아무도, 심지어 직접 만난 적이 있었던 캐서린조차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카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은, 보통 눈썰미가 아니라는 뜻.
“……졸업이 생각보다 빨라지겠어.”
자칼과의 경기에서 이기면 자신의 랭크 포인트는 2,500점을 넘어선다.
그 후에 벌어질 일은 불 보듯 뻔하다.
‘여기서 승리하는 사람이 챔피언 매치인가.’
캐서린, 그녀는 간만에 찾아온 먹잇감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
***
지난 일주일간 카이는 다시 방에 칩거했다.
물론 그의 칩거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쓰임새가 좀 많이 달랐다.
“흐음.”
그 시간 동안 숙소의 넓은 벽에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띄워놓고, 자칼의 모든 경기 영상을 보며 분석했으니까.
‘확실히 무색이라는 말이 어울려.’
그의 싸움에는 특징이라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패턴조차 없었다.
‘내가 결투장에 온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지.’
패턴도 없고, 특징조차 없다.
완벽한 무(無).
카이는 자칼의 영상 수십 개를 돌려보면서 그 어떠한 약점도 찾아낼 수 없었다.
보다보면 존재감마저 흐릿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전투법.
그것이 자칼이라는 선수였다.
똑똑.
누군가가 숙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이는 디스플레이를 껐다.
문을 열자 익숙한 관리인 하나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바로 카이에게 이 숙소를 제공해 줬던 관리인, 라딘이었다.
“베니쉬 님, 대기실로 가실 시간입니다.”
“가시죠.”
그를 따라 대기실에 들어서자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자리에 앉자 경기장 쪽을 바라보던 라딘이 입을 열었다.
“베니쉬 님. 저희가 케인 선수와 자칼 선수의 경기 전에 관중석을 증축한 거 아십니까?”
“알지요.”
“사실 그 때만해도 증축된 관중석이 꽉 차는 장면은 당분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일주일밖에 안 걸리는군요.”
“오늘 많이 왔습니까?”
“이 소리 안 들리십니까? 난리 났습니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라딘은 기분이 몹시 좋아보였다.
그는 꾸벅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모두 베니쉬 님 덕분입니다. 저희 결투장이 제 2의 부흥기를 맞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굳이 제가 아니었어도 결투장은 꾸준히 잘됐을 겁니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라딘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희 스스로가 가장 잘 압니다. 결투장의 매출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고, 파이트머니를 적게 지급할 수밖에 없으니 많은 선수들이 결투장에게서 등을 돌렸지요. 그 모든 원인은 새로운 선수가 유입되지 않아서 생겼었습니다.”
신규 유저가 유입되지 않아 고인물들만이 남는 현상.
그건 수많은 게임이 망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저희도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정면에서 타파해주신 것이 바로 베니쉬 님입니다.”
고인물이 아니어도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
수많은 유저들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던 것을 증명한 것이 바로 카이였으니까.
“여담이지만 전 결투장의 새로운 슬로건이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라딘의 눈빛이 대기실 벽에 걸려 있는 포스터로 향했다.
그곳에는 무패의 여제, 캐서린의 뒷모습과 함께 강렬한 폰트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도전하라. 승리하라, 그대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불과 몇 주 전에 걸렸다면 비웃음을 샀을 테지만, 이젠 아니었다.
“베니쉬 님이 모든 기록을 깨며 2,000점까지 올라오신 뒤로, 신규 선수들이 대거 늘어났습니다. 그 중에서 1,000점대 영역까지 올라간 이들도 벌써 수십 명이나 되구요. 당연히 관중들도 늘어났습니다.”
“여태까지 고생하신 보상을 받는 겁니다.”
카이의 말에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인 라딘은 시계를 확인했다.
“이런, 10분밖에 안 남았군요. 저는 이제 나가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부디 건승하시길. 전 베니쉬 님 팬입니다. 꼭 이겨주세요.”
카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응원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물론입니다.”
패배할 것을 목표로 싸우는 투사는 없다.
적어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2,000점대의 벽을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우…….”
라딘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대기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스르릉. 카이는 자신의 검을 뽑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눈을 감고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을 때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카이는 그 상태에서 지난날들을 돌이켜 봤다.
‘짧다면 짧은 시간.’
결투장에서 보내왔던 수련의 시간들.
따지고보면 카이가 미드 온라인에서 수련을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처음은 여명의 검술관에서, 두 번째는 바닷속에서 흰수염 사범에게.
세 번째는 라시온 왕궁에서 바체와 수련을 했을 때였다.
‘이번이 네 번째.’
여태까지 했던 수련들 중 기간이 가장 길었고, 가장 많은 것을 배웠으며, 가장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자칼, 그 다음은 캐서린.’
고지가 멀지 않았다.
‘우선은 한 걸음부터.’
카이는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눈을 떴다.
번뜩. 정순한 눈을 빛낸 그는 검을 갈무리하고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와아아아아아!”
“베니쉬! 베니쉬!”
“자칼! 자칼!”
“우직하게 재미없는 기술만 사용하는 녀석과 요란한 흉내쟁이의 대결이라…….”
“그야말로 무색과 다색의 승부로군. 아주 흥미롭다.”
관중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은 카이는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자칼을 쳐다보았다.
“오셨군요.”
“시간이 되었으니까.”
“일주일 동안 잠을 설쳤습니다. 기대되어서.”
연신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자칼이 말을 이었다.
“일주일 전, 제가 왜 그리 급하게 자리를 떠났는지 아십니까?”
“글쎄, 화장실?”
“큭, 그럴 리가요.”
스르릉.
자칼의 검집에서 검이 살짝 빠져나왔다.
“조금 더 대화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버릴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건 좀 별론데.”
“예,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재미도 없었을 거예요. 무드도 없고.”
후우우.
심호흡을 한 자칼은 다시 검을 검집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제 입장에선 챔피언 매치를 치루는 기분이네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결투장에선 모든 마스크와 가면을 무료로 대여해 주니까.”
“아…….”
자신이 실수한 점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카이가 작게 탄식했다.
동시에 사회자의 소개가 끝났고, 두 사람은 거리를 벌렸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자칼이 정중하게 인사했고, 카이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는 허공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홀로그램 숫자를 보며 생각했다.
‘제법 긴 시간이었어.’
결투장에서의 수련은 재미있었고, 얻은 것 또한 많았으며, 재미있었다.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자칼과 같은 실력자를 상대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움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무엇을 배웠는지를 스스로에게 증명할 시간이었다.
파악!
카이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날카롭게 파고드는 자칼을 쳐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신성 폭발.”
그의 몸에서 관중석의 뜨거운 분위기를 덮어버릴 정도의 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