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8
힐통령 348화
107. 값진 패배(2)
자칼과 베니쉬의 경기는 사천왕 매치만큼은 아니지만, 결투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주목하던 경기였다.
그건 캐서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지구 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이 경기를 기다려왔다.
“으흐흐흥.”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를 쳐다보던 리로드가 입을 열었다.
“마스터,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으응? 그야 물론이지.”
촤악!
캐서린이 멋드러지게 배틀 뉴스를 펼치며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베니쉬와 자칼의 경기가 열리잖아. 솔직히 난 오늘 누구 이기던 상관없어.”
어차피 이 경기의 승자는 랭크 포인트 2,500점을 넘게 된다.
‘그러면 나도 간만에 경기를…… 흐흐흣.’
그것이 그녀가 경기 시작 일곱 시간 전부터 팝콘과 피자, 음료를 구비한 채.
리로드를 끌고 챔피언 관람석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유였다.
마스터의 전화에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 게임에 접속한 리로드는 하품을 하며 물었다.
“오늘 누가 이기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물우물.”
캐서린은 쭉쭉 늘어나는 치즈 피자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자칼이겠지? 베니쉬 녀석은 재미있긴 하지만…… 아직 완성이 덜 된 것 같은데.”
“자칼…… 그렇죠. 솔직히 지난 주 정령술사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기량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건 나도 인정. 그게 결투장이 재미있는 이유지.”
“결투장이 재미있는 이유라니요?”
“어휴, 그걸 또 설명해줘야 돼?”
캐서린이 손에 묻은 끈적한 치즈를 휴지에 닦더니, 경기장을 내려보았다.
“저 사각의 전쟁터에선, 항상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변수가 튀어나오기 마련이거든.”
“변수라…… 그렇다면 의외로 오늘 게임에서 이기는 건 베니쉬가 될 수도 있겠군요.”
“글쎄, 그건 그거 나름대로 재미있겠지. 아마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녀가 피자 한 조각을 더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
경기가 끝났을 때, 캐서린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두 배가량 더 커져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경기장을 바라보면서, 주먹으로 리로드의 팔뚝을 연신 두드렸다.
“야…… 야야, 리로드. 지금 자칼이 진 거야?”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아픕니다. 그만 때리십시오.”
자신의 팔을 문지르던 리로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에 캐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말이 안 되는데……? 저런 실력자가 왜 지금까지 개허접 흉내를 내고 있었지?”
“사각의 전쟁터 위에선 변수가 튀어나온다면서요. 그거겠죠.”
“아니 그래도 정도가 있지. 미친…… 이런 변수를 누가 예상해.”
“그건 그렇지만.”
확실히 베니쉬가 오늘 보여준 경기력은 딱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Crazy. 미쳤다고.
이 정도 평가는 절대 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령술사 케인을 압살했던 자칼에게 가볍게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뭐, 어쨌든 마스터의 다음 상대는 베니쉬로 정해졌군요.”
“그렇지. 빨리 싸우고 싶…… 응? 쟤 지금 뭐하는 거야?”
캐서린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리로드가 고개를 내밀어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순간.
베니쉬가 쏘아낸 검풍이 그들의 관람석을 향해 쏘아졌다.
쩌저적!
날아든 검풍에 얻어맞은 강화 유리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이런 미친놈이, 감히!”
발끈한 리로드가 눈에 불을 켜며 일어나는 순간.
“스탑.”
한기 가득한 캐서린의 목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옆을 돌아보자, 입 꼬리를 쭉 찢은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는 중이었다.
“저걸 왜 멈추려고 해. 재미있는데.”
“이게 재미있으십니까?”
“그럼 안 재밌어? 저거 지금 나 도발하는 거잖아.”
후우. 캐서린 덕에 이성을 되찾은 리로드가 논리정연하게 말을 이었다.
“마스터. 굳이 이런 도발에 걸려드실 필요 없습니다. 저런 놈은 결투장 측에 항의해서 페어플레이 정신에 대한 페널티를…….”
“헛소리 좀 하지마. 저 밑에 인간들 안 보여?”
캐서린의 손가락은 관중석을 가득 채운 유저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애들 다 보는 앞에서 버젓이 시비 걸렸는데, NPC한테 고자질해서 징계 주자고?”
하! 그녀가 찢어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개소리지. 안 그래도 세계 8대 길드의 위명이 땅에 떨어진 상태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네 말이 맞겠지만, 다른 유저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나만 웃음거리가 되겠지. 쫄보라고.”
캐서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베니쉬를 노려봤다.
“저 놈은 그걸 알고 있고, 그걸 알면서도 날 도발하는 거지. 아주 영리한 새끼야. 그레윗.”
베니쉬는 그녀에게 묻는 중이었다.
이래도 도망칠 수 있겠냐고.
명예 따위는 땅에 쳐박아도 괜찮은 거냐고.
당연한 말이지만 캐서린은 이런 종류의 모욕을 견딜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 참을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리미트리스 길드가 세계 8대 길드 중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주제도 모르는 멍멍이에겐 매가 약이지.”
콰아아앙!
캐서린의 발차기가 강화 유리에 작렬했다.
카이의 검풍에 의해 이미 금이 가있던 유리창은 그대로 깨지며 후두둑 떨어졌다.
“후우.”
짝다리를 짚고 난간에 선 그녀의 금발은 상공의 바람에 연신 흩날렸다.
“좋아, 받아줄게.”
오연한 눈빛으로 베니쉬를 내려다보던 캐서린이 그대로 경기장을 향해 뛰어내렸다.
***
쿠우우우웅!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거대한 굉음이 경기장을 울렸다.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보기에도 아찔한 높이에서의 점프.
아무리 가상현실게임 안이라지만, 어지간한 담력이 아니라면 절대 뛰어내릴 수 없는 높이였다.
그런 높이에서 안정장치 하나 없이 뛰어내린 캐서린은 태연한 표정으로 먼지를 털어내더니, 쿨하게 포션 한 병을 쭉쭉 들이켰다.
얼마나 비싼 포션이었는지, 고작 한 병에 떨어졌던 생명력이 모두 회복되었다.
그녀의 등장에 관중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채, 챔피언이다.”
“무패의 여제…….”
“캐서린!”
동시에 결투장 관리인들이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베니쉬 님. 지금과 같은 공격 행위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중시하는 결투장에서…….”
“잠깐.”
그들에게 다가온 캐서린이 손을 들어 관리인들을 말렸다.
“난 괜찮으니까 그냥 넘어가.”
“하, 하지만…….”
“왜, 싫어?”
그녀가 눈매를 살짝 찌푸리자 관리인들이 쩔쩔 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야지. 그리고 나 얘랑 경기할 거니까 준비해.”
캐서린의 얇은 손가락이 카이를 가리켰다.
이에 관리인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반색했다.
“그건 물론 준비해 드려야지요. 그럼 경기 일자는 언제쯤…….”
“지금 당장.”
“예에에에?!”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는 챔피언의 행동에 관리인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관리인 라딘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캐서린 님. 하지만 무릇 챔피언의 경기라면 품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갈라진 경기장도 보수해야하고, 관중들에게 티켓 값도 받아야…….”
“경기장은 상관없어. 그리고 티켓 값이라면 지금 해결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냐는듯 눈을 치켜뜬 캐서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 지금부터 경기할 건데! 티켓 안 사는 녀석들은 전부 꺼져!”
이에 관중석의 유저들은 골드를 꺼내고 팝콘을 머리 위로 던지며 호응했다.
“사, 사겠습니다!”
“Take my money!”
“장난하냐? 당연히 사야지!”
“얼만데! 다 사줄게!”
그들의 열렬한 반응을 쳐다보던 캐서린이 시크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제 됐지?”
“으음…….”
할 말이 사라진 라딘은 고개를 돌려 베니쉬를 쳐다봤다.
“베니쉬 님은 어떠십니까. 이제 막 경기를 끝난 직후라 피곤하실 테고, 경기장 상태도…….”
라딘의 눈빛에는 제발 자신들에게 시간을 좀 달라는 애원이 담겨 있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카이는 자신을 구세주처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저버렸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캐서린과 의견이 같았으니까.
애초에 도발을 한 것도 이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저도 상관 없습니다. 챔피언이 대결을 원하는데 꼬리를 말 수는 없지요.”
“하, 지가 먼저 시비 걸어놓고 뭐래.”
코웃음을 친 캐서린이 우드득, 목을 돌렸다.
“어떻게, 쉬는 시간 좀 줘? 나중에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니 어쩌고 하면서 언론 플레이하는 거 짜증나서 싫거든.”
“아뇨, 굳이 휴식이 필요한 상대도 아닌 것 같고…… 됐습니다.”
도발에는 더 큰 도발로.
이에 캐서린은 살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관리자들을 독촉했다.
“어이, 관리자들. 티켓 값 걷는 거 아직이야? 나 지금 좀 급한데.”
“자,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관리인들은 관중석을 돌며 티켓 값을 일일이 거두는 중이었다.
잠깐 붕 떠버린 시간 동안, 카이를 쳐다보던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그냥 경기하는 것도 재미없을 것 같은데, 내기나 할까?”
“내기라면?”
“이기는 쪽한테 파이트머니 전부 몰아주기. 어때?”
카이는 그 말에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됩니까.”
“관리인~?”
캐서린이 목소리 끝을 높이며 턱을 까딱였다.
그러자 관리인이 다가와 서류를 확인했다.
“어…… 챔피언인 캐서린 님의 1회 대전료가 3천 골드입니다. 베니쉬 님은 500골드입니다.”
“어머! 액수가 너무 차이가 나버리잖아? 하긴, 그래도 잘 나가는 내가 좀 참아야지.”
캐서린은 과장된 손짓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는 눈빛으로 ‘이게 너와 나의 격차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3천 골드면 3억인가.’
그녀의 유치한 도발에 헛웃음을 터트린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받아줘야지.’
인벤토리에서 골드 주머니를 꺼내 관리인에게 건넸다.
“이 돈은……? 헉!”
금액을 확인한 라딘이 입을 벌린 채 숨을 들이켰다.
카이의 입에서는 별거 아니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만 골드. 제 앞에 배팅해 주세요.”
3만 골드.
한화로 무려 30억이나 되는 말도 안 되는 금액.
그 엄청난 액수는 캐서린의 눈꺼풀마저 파르르 떨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괜히 성을 냈다.
“허, 허세 보소. 인벤토리에 3만 골드를 넣어 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
“3만 골드, 확인되었습니다. 베니쉬 님의 승리로 배팅되었습니다.”
“……지 않나……?”
하지만 라딘이 확실하게 보증까지 서자, 캐서린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말끝을 흐린 그녀는 이내 성을 냈다.
“진짜 제대로 또라이네 이거! 너 지금 3만 골드를 땅에 내버린 거야! 저게 얼만 줄 알고!”
“땅에 버린다……? 아니죠.”
전광판에 표시된 현재 배팅률을 쳐다보던 카이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은 이런 걸 투자라고 부릅니다.”
베니쉬 2.34배.
캐서린 1.16배.
경기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저 돈은 70억 2천만 원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
갈라진 경기장 사이를 대충 메우고 티켓 값을 모두 걷은 뒤, 두 사람은 경기장 위에 섰다.
무패의 여제 캐서린.
그녀가 경기장 위에 서있을 때 뿜어내는 존재감은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하긴, 전체 랭킹 12위의 유저니까. 강하겠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랭킹 2위의 강력한 유저조차 1위라는 이름 앞에선 그 색이 바래는 법이다.
“자존심에 걸맞는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내가 확인해 줄게.”
차가운 경고를 날린 캐서린이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달려들었다.
하지만 카이는 침착하게 검을 휘둘러 그녀의 단검을 쳐냈다.
소드 패링, 흘리기, 어깨 차징, 체술, 풋워크…….
그가 결투장에서 배웠던 모든 기술이 한 번에 뿜어져 나왔다.
“저건 내 기술인데…….”
“새끼가. 허락도 안 받고 막 가져가다니.”
“그래도 뭔가…… 기분이 좀 오묘한데?”
경기를 지켜보던 기술의 원작자들이 저마다 감상을 늘어놓았다.
베니쉬는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해 결투장의 챔피언과 호각으로 싸우는 중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베니쉬를 응원하는 중이었다.
“임마! 그거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좀 더 강하게 휘둘러야지!”
“아오! 야, 끝나고 나랑 한 판 더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가르쳐 준다!”
그들의 목소리는 관중석의 수많은 소음을 뚫고 카이의 귓가로 들어왔다.
물론 캐서린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녀는 한 자루의 단검을 귀신처럼 다루며 카이를 압박했다.
“그거 알아?”
까드드드득!
캐서린의 단검이 카이의 검신을 발톱처럼 긁었다.
카이가 황급히 그녀의 검을 흘리려고 했지만, 귀신같은 단도술은 이를 뚫고 그의 심장을 찔렀다.
푹!
[급소를 공격받았습니다. 24,11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윽.”
카이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캐서린은 오연한 표정으로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네가 흉내내고 있는 그 기술의 주인들. 전부 내 앞에서 무릎 꿇었어.”
현재 카이가 사용하는 기술들은 모두 캐서린이 굴복시켰던 것들이다.
그런데 그 기술들을 사용해 그녀를 뛰어넘는다?
“그런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어.”
카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자신이 아무리 타인의 기술을 따라하고 모방한다고 해도, 그건 주력이 될 수 없다.
‘나 자신의 기술을 믿고 완성시키는 것이 중요한 거지. 이런 기술들은 그걸 거들 뿐이야.’
애초에 그가 결투장을 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자신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
지금 캐서린이 범하는 실수처럼, 상대방을 혼란, 방심시키기 위해서.
“그래? 그럼 더 볼 것도 없겠네. 끝낸다.”
캐서린이 날렵한 고양이처럼 카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후우우…….”
카이의 검이 가장 익숙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명의 검술.’
자신이 처음으로 배운 검술이자, 유일한 검술.
수백 레벨을 올리면서 사용해 온 친구 같은 녀석이다.
검술의 초보자처럼 투박하던 베니쉬의 검술이 단번에 달라졌다.
마치 경운기를 보는 것 같던 그의 검로가 스포츠카의 그것처럼 세련되고, 깔끔해졌다.
제대로 된 명문 검술이 지닌 파괴력과 속도 또한 발군이었다.
서걱!
결투장에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날카로운 이빨은 순식간에 캐서린을 물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