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50화 (350/441)

# 350

힐통령 350화

108. 무적자(1)

경기장을 가득 메우던 폭죽과 팡파레 소리가 점차 옅어지고,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관중들의 함성 소리도 희미해졌다.

그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캐서린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무패의 여제 왜 저래?”

“글쎄, 이 각도에선 베니쉬의 얼굴이 안 보이는데…… 그리고 이제 무패의 여제가 아니지.”

“아, 맞다. 그럼 이제 1패의 여제라고 불러야 하나?”

관중들 대부분이 웅성거리기를 잠시.

카이의 정면 방향에 앉아있던 관중들이 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나?”

“뭐지? 개꿀잼 몰카인가?”

그들의 눈에는 가면 속 사내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으니까.

게다가 몰라볼 수도 없었다.

그는 현재 미드 온라인에서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 중 하나였으니까.

“어, 언노운…… 언노운이다!”

“카이다!”

“뭐? 진짜야?”

그 정보는 순식간에게 입과 입을 통해 관중석 전체로 퍼져나갔다.

“베니쉬의 정체가 카이였다고?”

“아, 그럼 캐서린이 패배하는 것도 당연한 건가…….”

“그런데 카이가 뭐가 아쉬워서 여기서 놀고 있지?”

“그야 모르지.”

“끄응. 결국 고인물을 상대하려면 고인물이 오는 방법 밖에 없다는 건가.”

“에이 그건 아니지. 베니쉬 이후로 대거 유입된 뉴비들이 벌써 성적을 내고 있잖아.”

“음음. 이유야 어쨌든 그의 등장이 죽어가는 결투장을 활성화시킨 건 사실이지.”

놀람과 환호, 그리고 의문.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는 관중들을 뒤로한 카이는 바닥에 떨어진 투구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쯧. 아주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나버렸어.’

물론 현재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치가 떨어지는 장비였다.

그래도 정이라는 것이 있다.

언노운 시절 이 가면 하나로 넘겼던 고비들을 생각하면 애착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리버티아로 가서 카밀라나 드워프한테 고쳐달라고 할 수밖에.’

한숨을 내쉰 카이가 투구 조각들을 인벤토리에 넣는 그 순간까지 캐서린은 바짝 얼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리로드에게 속삭였다.

“이, 이제 나 어떻게 해? 막 혀도 차고 한숨도 푹푹 내쉬는데?”

“……사고는 혼자 다 치시고 왜 그런 것만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그게 네 일이잖아.”

“전 길드의 부마스터지, 베이비 시터가 아닙니다.”

“좀 도와주라! 그리고 들어봐봐. 카이한테 절을 하면 좀 봐줄까?”

“후우…… 길드 망신 다 시킬일 있습니까.”

살짝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마스터를 쳐다본 리로드는 그녀의 부축을 풀고 카이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리미트리스 길드의 부 마스터, 리로드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끄덕.

카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와는 이미 비르 평야전 때 한 번 만나본 적이 있었다.

“설마 베니쉬의 정체가 카이님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정체가 밝혀지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 부분에 있어선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리로드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에 카이는 딱히 곤란해진 건 없으니 괜찮다고 말을 하려다가.

‘……잠깐만.’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에 스페셜 칭호인 ‘챔피언’의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챔피언 칭호는 챔피언 자격을 박탈 당한 순간 자동 소멸된다.’

당연히 모든 스킬 레벨 +1이라는 사기스러운 효과 또한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난 웬만하면 더 이상 결투장에 올 일이 없어. 그렇다는 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챔피언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자신은 챔피언 칭호를 잃게 될 것이라는 소리!

그런 카이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우선 캐서린과 리로드는 지금 나와의 관계가 악화되는걸 꺼려하고 있어.’

여태까지 자신과 관계가 안 좋았던 길드들이 크게 네 군데가 있었다.

바로 붉은 노을과 붉은 주먹, 검은 벌과 타이탄이 그 주역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었지만, 최종적으로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자신의 손에 의해 멸망한 길드라는 것.

‘이게 리미트리스 길드가 나와 안 좋게 엮이는 걸 기피하는 이유겠지.’

랭킹 1위이자 세계 10대 길드 중 두 곳을 말아먹은 존재와의 관계 악화.

그건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뒤가 너무나도 찜찜할 수밖에 없다.

현재 자신이 지닌 존재감과 강력함이 너무 강대했으니까.

‘그렇다면 일단 바람을 잡는다.’

카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분을 팍팍 티냈다.

“솔직히 기분이 조금…… 아니, 많이 불쾌합니다. 제가 왜 굳이 정체를 숨긴 채 결투장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리로드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자, 시선이 마주친 캐서린이 핫! 하고 놀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들이 취하는 저자세를 확인한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좋아. 하지만 장소가 별로다. 협상이란 조일 때 조이고 풀어줄 때 풀어줘야 하는 것이니까.’

카이는 살짝 노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자리를 옮깁시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고개 숙이는거, 미관상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배,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설마 카이가 이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챙겨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걸까?

리로드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기실로 가시죠.”

그를 따라 선수 대기실로 향하자, 아까보다 더 조용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 정적에 위축이라도 된 것일까.

리로드와 캐서린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채 카이의 입만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은 내가 잘 알고 있지.’

마치 부모님에게 혼날 때, 아무 말도 않고 무게만 잡고 계시면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순간이다.

어릴 적 누구나 겪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카이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할 줄 알았다.

“후우…….”

때문에 짙은 한숨을 한 번 푹 내신 뒤 선수용 벤치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

“…….”

캐서린과 리로드는 서로를 쳐다보더니 카이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분위기 좋고.’

이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저들의 어깨를 누를 것이다.

하지만 침묵이 너무 오래 이어지면 그 또한 좋지 못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저들이 곧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에 적응될 것이고, 그 때부터는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카이는 그들이 생각할 틈을 주기 싫었다.

“……우선.”

그것이 그의 입이 열린 이유였다.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전 제 정체를 밝히기 싫었습니다.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면 애초에 투구를 쓰지 않았겠죠.”

“이해합니다.”

리로드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카이는 말끝을 흐리며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그녀의 몸이 작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캐서린 님이 제 투구를 박살내버렸기 때문이죠.”

그 말에 리로드는 다시 한 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그, 그건 미안하다니까.”

캐서린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카이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좋습니다. 제 의도와는 달리 정체가 밝혀지긴 했지만. 리미트리스 길드는 비르 평야전 때 저를 도와줬던 곳이니 저도 계속 쓴소리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진짜?”

캐서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 그러니 가벼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지요.”

“부탁? 어떤 부탁?”

“전 챔피언이었던 캐서린 님이라면 챔피언 타이틀이 지닌 효과를 아실 겁니다.”

“물론 알아. 모든 스킬 레벨을 하나씩 올려주지.”

“맞습니다. 솔직히 전 이 타이틀을 원해요. 하지만 이 타이틀을 지키고자 결투장에 상시 거주하는 건 싫습니다.”

“그건 그렇지.”

캐서린은 카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언제 경기가 잡힐지 몰라서 숙식도 항상 결투장에서 해결해 왔으니까.

“매우 피곤한 일이야. 때로는 짜증나기도 해.”

“맞습니다. 더군다나 전 랭킹 1위. 솔직히 많이 바쁜 몸입니다.”

“뭐야, 재수 없…… 아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뭔데?”

“사죄의 대가로 게임 시간 일 년을 받겠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저에게 도전하지 마세요.”

“뭐? 일 년은 너무 길어!”

“만약 그 기간이 끝나기 전에 도전한다면. 리미트리스의 선전 포고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카이가 차가운 눈빛으로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리로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분위기가 딱딱해지려는 순간.

‘채찍 다음에는 당근을 줘야겠지.’

카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어색함을 풀어버렸다.

“생각해보세요.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저에게 도전을 해봤자 승산은 없습니다.”

“……끙.”

캐서린이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오늘만 해도 자신은 카이의 검법 하나를 피하지 못해 처참하게 참패하지 않았던가.

‘수준 차이가 너무 커.’

게다가 지금의 카이는 챔피언 타이틀 효과로 그 매섭던 검술이 한 단계 더 상승했을 터.

자신이 몇 번을 도전한다 해도 승리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캐서린은 카이의 조건을 수용했다.

“좋아…… 게임 시간으로 일 년. 그 때 동안은 도전하지 않겠어.”

그녀의 동의가 떨어지자 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안을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덤으로 그 기간 동안 제 방패가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 방패?”

캐서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너에게 도전하려는 선수들을 내가 중간에서 전부 쳐내라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아주 잘 들으셨습니다. 제 랭크 포인트는 이제 2,742점. 그러니까 캐서린 님이 2,242에 도달하는 선수들을 중간에서 처리해줬으면 좋겠네요.”

“그건 싫어. 난 내 실수에 대한 대가로 이미 일 년이라는 시간을 지불했잖아.”

빚을 청산한 캐서린의 태도가 급 불량해졌다.

‘하긴. 고작 투구 하나 쪼갰다고 이 정도 조건까지 수용하는 건 말도 안 되지.’

물론 카이도 맨 입으로 해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별개의 제안입니다. 당연히 보상도 드릴 겁니다.”

“뭘 줄 수 있는데?”

“돈.”

카이가 짧게 말했다.

이에 캐서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우리 길드의 스폰서 숫자가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나도 아직 돈 많거든?”

“선금 2만 골드. 이후로 선수 한 명을 막아주실 때마다 천 골드씩 드리죠.”

선금 20억, 그리고 선수 한 명을 막아줄 때마다 1억씩.

아무리 돈을 잘 버는 캐서린이라고 해도 눈동자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액수였다.

심지어 그녀는 이제 챔피언이 아니기에, 이전에 받던 어마어마한 대전료도 받을 수 없다.

그런 부분까지 생각해보면 카이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이건 내 입장에서도 손해가 아니지.’

왜냐하면 캐서린과의 내기를 통해 파이트머니만 3억을 넘게 챙겼고, 배팅으로 40억을 더 챙겼기 때문이다.

결투장에서 번 돈을 활용해서 챔피언 타이틀의 어마어마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은 지출이었다.

“어차피 일 년 동안은 저에게 도전하지 못하잖습니까. 그 기간 동안 적당히 몸도 풀고, 돈도 챙기고. 이 얼마나 좋습니까.”

“…….”

캐서린은 말없이 리로드를 쳐다봤다.

그는 알아서 선택하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결국 잠시 동안 고민을 이어가던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좋아. 하지만 선금으로 2만 2천 골드 줘.”

‘풋.’

그 귀여운 협상에 카이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2만 5천 골드 드리겠습니다.”

“고, 고마워라.”

이렇게 쿨하게 거래가 될 줄은 몰랐던 캐서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카이는 그녀에게 골드 주머니를 건네주며 당부했다.

“그럼 게임 시간으로 일 년 뒤에 뵙겠습니다.”

“그래. 그때까지 타이틀은 내가 잘 지켜줄게.”

“예. 잘 부탁드립니다.”

거래를 끝낸 카이는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

카이는 관리인들에게 배팅 골드와 대전료를 모두 받아낸 뒤, 결투장을 나섰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그의 메시지 창이 울렸다.

“음?”

메시지 창을 켠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발신자가 생뚱맞은 사람이었으니까.

[미네르바 : 카이 님, 혹시 무슨 범죄 같은거 저지르셨나요?]

카이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카이 : 아니요? 갑자기 왜요?]

[미네르바 : 그럼 왜 그렇지…… 요즘 태양교 본단이랑 카이님 영지에서 카이님의 뒤를 캐고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이 교단에서 간간이 들려서요.]

[카이 : 제 뒤를 캐고 다닌다고요?]

[미네르바 : 예.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들 중에…….]

카이가 메시지를 거기까지 읽었을 때.

화르르르륵!

그의 머리 위로 작열하는 불덩이가 떨어졌다.

[미네르바 : 랭킹 2위 마법사. 크리스도 있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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