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
힐통령 353화
109. 동행(1)
화르르르륵.
크리스가 네 개의 불덩이로 얼음상을 녹이면, 고스트는 여명회원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쯧쯧. 크리스가 회원들의 생명력을 보며 혀를 찼다.
“이 녀석들 피 남은 거 봐라. 지나가던 슬라임이 한 대 툭 쳐도 죽겠네.”
“으으, 말도 마라. 조금만 늦게 꺼냈으면 죽었을걸.”
“정신은 멀쩡한데 빙결 상태라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니…… 짜증난다고.”
“춥기도 진짜 더럽게 추워. 한겨울에 반바지랑 반팔 입고 한강에 나간 기분.”
“그 새끼…… 아니, 걘 대체 뭐하는 놈이냐?”
모닥불 주변에 옹기종기 모인 여명회원들이 담요를 뒤집어쓴 채 투덜거렸다.
“뭐긴 뭐야. 랭킹 1위지.”
“아니, 그렇게 따지면 여기 랭킹 2위도 있는데. 얘는 왜…….”
“시끄러워. 다음에 만나면 내가 이겨.”
“퍽이나…… 앗, 뜨겁잖아!”
신경질적으로 화력을 높인 크리스와 이를 뜨거워하는 여명회원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스트가 옆에 있던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잘못이 뭔지는 알고 있지?”
“……죄송합니다. 회장.”
골리앗과 스팅으로부터 이번 의뢰를 맡은 부회장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면 함부로 자리도 못 비우겠네.”
고스트의 중얼거림에 모든 여명회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회장. 그럼 이제 잠수 끝내고 복귀하는 겁니까?”
“진짜?”
“이렇게 빨리 복귀한다고? 말이 안 되는데.”
하지만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는, 아기새 같은 회원들의 눈빛에 고스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가, 지금 막 끝났다.”
***
결투장을 떠난 카이는 과자점과 옷 가게를 들려 헬릭과 라샤의 선물을 샀다.
두 손 가득 커다란 종이백을 주렁주렁 든 카이는 곧장 신출귀몰을 사용했다.
한결 같이 평화로운 천상의 정원.
“음?”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던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분…… 대체 뭐하시는 거지?’
헬릭과 라샤는 잔디 위에 놓인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헌데 두 사람 사이에서 감도는 알 수 없는 전운은 무엇.
‘설마 싸움인가?’
표정이 심각해진 카이는 몸을 낮춘 채 수풀 뒤에 몸을 숨겼다.
그녀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엿듣기 위해서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헬릭이었다.
“라샤여…… 그대는 나의 소중한 벗이니라. 인간들의 옛말에 따르면…… 그래. 뷰우웅신. 그대와 나 사이에는 도리와 믿음이 있다고 항상 믿고 있는 것이다.”
“붕우유신이야. 뷰우웅신이 아니고, 욕 같이 들리잖아.”
“앗, 미안…….”
항상 한 두 글자씩 틀리는 헬릭이 사과를 하자, 라샤가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네 말에는 동의해. 너와 나는 아주 가까운 친구지. 하지만…….”
“그래. 지금은 서로를 적으로서 대우하자꾸나.”
고개를 빼꼼 내밀어 쳐다보자, 두 소녀의 눈빛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이번만큼은 절대 봐주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두 소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몸을 휙 돌린 그녀들은 각자 앞으로 두 걸음을 내딛은 뒤, 다시 서로를 쳐다봤다.
“먼저 갈까?”
“선공은 양보하겠느니라.”
이거 큰일났다.
‘진짜 싸움이잖아?’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카이가 그녀들을 말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라샤가 두 팔을 파닥거리며 크게 소리쳤다.
“덧셈뺄셈하자! 덧셈뺄셈하자! 15 더하기 37!”
“오, 오십이이이!”
꽥! 소리를 지른 헬릭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팔을 파닥거리는 중이었다.
‘아니 저건…….’
누가봐도 구구단의 자세다.
‘예전에 신들의 연회에서 신들에게 구구단 게임을 가르쳐준 적은 있긴 했는데…….’
설마 그걸 저런 식으로 변형했을 줄이야.
카이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구경하는 것도 모르는 소녀들은 열심히 공방(?)을 주고받았다.
“덧셈뺄셈하자, 덧셈뺄셈하자! 42 빼기 18!”
‘위협적인 공격!’
라샤가 어려워하는 뺄셈 공격을 날리다니.
잔인하다 헬릭님.
하지만 라샤는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대꾸했다.
“이십사.”
그녀들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서로에게 덧셈과 뺄셈 문제를 던지고, 풀면서 놀았다.
체력이 방전된 것일까, 30분 가까이 덧셈 뺄셈을 하던 그녀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잔디 바닥에 쓰러졌다.
“헤헤헤.”
“후훗.”
그리고 서로를 쳐다보며 좋다고 웃는다.
그 사랑스럽고도 사이좋은 모습을 푸근한 미소로 바라보던 카이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수풀에서 카이가 쑥하고 튀어나오자 두 소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벌떡 일어난 그녀들은 도도도 달려와서 카이의 허벅지에 매달렸다.
“카이여!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이냐?”
“피. 오셨으면 왔다고 말씀이라도 해주시지.”
“하하. 죄송해요. 두 분이 너무 인상 깊은 놀이를 하고 계시길래.”
차마 싸우는 줄 알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두 분 모두 피곤하실 텐데 달달한 거라도 드시면서 휴식하세요.”
카이가 두 손 가득 들고 있던 종이백을 흔들어보였다.
“와아아아! 역시 그대밖에 없느니라!”
“혹시 레모네이드도 있나요?”
“물론이지요. 얼음 세 개 동동 띄워진 놈으로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잔디 밭은 순식간에 피크닉판이 되었다.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케이크와 과자, 맛있고 시원한 음료를 세팅했다.
우물우물, 쪼르르륵.
두 소녀가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먹고 마시는 소리만이 들렸다.
헬릭이 자신의 빵빵해진 배를 통통 두드릴 즈음, 카이가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공부 열심히 하셨나 보네요. 덧셈 뺄셈도 완벽하게 구사하시고.”
“열심히 했느니라.”
“저도요.”
으쓱으쓱.
어깨를 들썩거린 헬릭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엣헴. 헛기침을 했다.
“카이여. 나에게 있어서 공부란 이런 것이었느니라.”
누가 보면 거의 수능 만점자 인터뷰하는 줄.
하지만 카이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어떤 것이었나요?”
“예에에엣날에 다 배워뒀는데, 시간이 흘러서 가물가물해지는 공부들이 있지 않느냐.”
“아…… 그런 거 있죠. 분명히.”
카이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도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시험 성적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때의 시험을 치라고 하면…… 글쎄?
‘국사나 사회, 지리 같은 암기 과목도 그렇고…… 방정식 같은 것도 좀 가물가물하네.’
그녀가 말하는 바의 요점을 파악한 카이가 이에 동의했다.
“저도 그래요. 학교…… 그러니까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과목들이 잘 생각 안 나네요.”
“그렇지? 나와 라샤도 그런 것이니라. 분명히 예에전엔 다 알았느니라. 정말이니라.”
아무리 그래도 덧셈 뺄셈을 까먹을 수가 있나?
다분히 의심이 되는 발언이었지만 카이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뭐죠. 마치 카이 님이 저희를 의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막막 들어요.”
“……착각입니다. 라샤 님.”
뜨끔한 카이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다른 과목들은 진행 상황이 어때요?”
그 질문에 헬릭과 라샤가 서로를 쳐다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다 배웠느니라.”
“맞아요.”
그 말에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배웠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이니라. 전부 다 배웠느니라.”
“지식의 신인 리지한테 가서 인간들의 문화와 역사, 그들의 학문을 전부 배웠어요.”
“응응.”
그녀들의 말에 카이가 입을 쩍 벌렸다.
“아니, 겨우 한 달이 지났는데 그걸 다 배웠다고요?”
“카이여. 그대는 가끔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이야.”
“저희, 신이에요.”
“아…… 그랬죠.”
카이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사람, 신이었지.
백치미를 뿜뿜 하는 것을 워낙 자주보다 보니 잊고 있었다.
“그럼…… 지금 바로 입학 수속을 밟아도 상관없겠네요?”
“물론이니라.”
“저도요.”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카이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
눈앞으로 웬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띠링!
[대륙을 덮은 어둠의 전조가 살짝 흐려집니다.]
[칼 라샤 교단이 부활합니다!]
[칼 라샤 교단의 이름이 대륙 전역에 약간 퍼집니다.]
[플레이어들은 이제 ‘칼 라샤’ 교단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음?”
난데없이 떠오른 메시지에 카이가 눈을 깜빡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쳐다보기를 잠시.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잠깐만. 칼 라샤 교단이라면…… 그냥 라샤 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 생각이 들어 고개를 휙 돌려 라샤를 쳐다보니, 그녀는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로 카이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카, 카이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아니……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해요.”
“하지만 갑자기 힘이 막막 돌아오는…… 아! 혹시 하린 님이 뭔가를 하셨나……?”
“하린 씨가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유하린에게 메시지를 바로 보내봤다.
[카이 : 하린 씨, 혹시 메시지 보셨어요?]
[유하린 : 무슨 메시지요?]
[카이 : 음? 아닌가…… 칼 라샤 교단 부활에 관한 메시지요.]
[유하린 : 헉. 그거 글로벌 메시지였어요? 전 저한테만 보이는 줄…….]
“아하.”
역시 그녀가 연관된 것이 맞았다.
[유하린 : 지금 막 전직 퀘스트 끝났거든요. 뮬딘 교 때문에 전직 난이도가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카이 : ……뮬딘 교요? 걔네가 갑자기 왜 나와요?]
[유하린 : 저도 몰라요. 전직 시험을 받으려고 잊혀진 옛 칼 라샤의 신전을 방문했는데 뮬딘 교가 여기에 거점을 차리고 있더라구요.]
[카이 : 엥? 그럼 어떡해요?]
[유하린 : 괜찮아요. 이제 없어요.]
카리스마 무엇.
살짝 식은땀을 흘린 카이가 대화를 이어갔다.
[카이 : 자, 잘 하셨네요. 그럼 이제 이단심판관이 된 건가요?]
[유하린 : 아, 저도 처음에는 칼 라샤의 이단심판관으로 전직하는 줄 알았는데…… 하다보니까 난이도가 계속 어려워져서…….]
[카이 : 어려워져서?]
[유하린 : 결국엔 변화의 기사로 전직했어요.]
“……변화의 기사?”
카이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칼 라샤가 흠칫! 고개를 들며 물었다.
“카이 님이 변화의 기사를 어떻게 아세요?”
“……하린 씨가 변화의 기사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헉. 진짜요?”
아니, 이 신은 자기 일인데 왜 이렇게 모르는 거야.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잊혀진 옛 칼 라샤의 신전을 뮬딘 교가 점령하고 있었다네요.”
“……감히?”
항상 순하고 부드럽던 라샤의 눈매가 돌연 앙칼지게 변했다.
“정말 웃기는 놈들이네요. 거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놓는데요? 기분 나빠요. 그리고 하린 님은 그놈들을 그냥 두고봤대요?”
“아뇨. 싹 다 잡은 듯.”
“아주 엑셀런트. 역시 변화의 기사다워요.”
“그런데 변화의 기사가 대체 뭡니까.”
“그대 같은 사람이니라.”
옆에서 케이크 위에 올려진 체리만 쏙쏙 빼먹던 헬릭이 대신 말을 받았다.
“태양교에 사도인 태양의 사제가 있듯, 라샤의 교에도 변화의 기사라는 사도가 있느니라.”
“아…… 그럼 강하겠네요?”
“내가 아는 바로는.”
“호오.”
유하린이 그런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니, 뭔가 오묘한 기분이 든다.
‘잠깐만, 그럼 혹시……?’
카이는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카이 : 저기 하린 님. 변화의 성기사의 등급이 혹시……?]
답장은 금방 왔다.
[유하린 : 어…… 저도 처음 보는 등급인데. 신화 등급이라는데요?]
“오우…….”
초보자의 몸으로 랭킹 2위까지 올라왔었던 아주아주 강력한 라이벌에게 날개가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