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
힐통령 354화
109. 동행(2)
한창 유하린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데, 칼 라샤가 아기 강아지처럼 주변을 맴돈다.
계속 신경이 쓰였기에, 카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라샤 님? 혹시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안색이 화악 밝아지는 라샤.
고개를 주억거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네. 혹시 귀찮지 않으시다면 하린 님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주실 수 있을까요?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예전에 듣기로 칼 라샤는 헬릭과는 다르게 신력이 많이 동났다고 했다.
헬릭이야 대륙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신이니 신력이 매우 풍부하다.
덕분에 신출귀몰 같은 사기급 스킬도 턱턱 내놓을 수 있지만…….
‘인간들에게 잊혀진 라샤 님은 그게 안 되니까.’
이 놈의 빈부격차는 신들조차 거스르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조금 더 부지런해지는 수밖에.
“아마 하린 씨가 제대로 활동을 시작하면 칼 라샤교도 태양교 부럽지 않게 부흥할 거예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라샤가 봄날의 꽃처럼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유하린에게 지금 어디 있는지 물어보자, 답은 3초 만에 돌아왔다.
카이는 신출귀몰을 통해 그 근처의 마을로 향했다.
“미믹 소환.”
그녀가 있는 장소까지 걸어갈 필요는 없었다.
와이번 폼의 미믹은 할리를 제외한 그 어떤 이동 수단보다 빨랐으니까.
‘그나마 할리보다는 미믹 쪽이 덜 주목 받겠지.’
미믹을 타고 순식간에 초원을 주파한 카이는 저 밑에서 손을 흔들고있는 유하린을 발견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돌덩이들로 S.O.S 사인을 만들어 구조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여기요~ 여기!”
“큭.”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카이는 미믹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려가자.”
후우웅.
순식간에 지상에 착지한 미믹을 잘 주차(?)한 뒤, 그녀에게 다가가 안부를 건넸다.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네요.”
“죄송해요. 제가 퀘스트한다고 봉사 활동 시간도 바뀌어서…….”
“아뇨,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앞으로는 시간 맞춰서 잘 나갈 수 있어요. 아뇨, 꼭 나갈게요.”
“다행이네요.”
가벼운 대화를 마치자 유하린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으…… 그런데 갑자기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고개를 살짝 내리깔고, 고양이처럼 카이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별처럼 반짝였다.
그 아름다움 외모에 잠시 넋놓고 그녀를 바라보던 카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사실 제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칼 라샤 님이 하린 씨를 보고 싶어 하셔서 온 거예요.”
“아…… 그렇구나.”
시종일관 기분이 좋아보이던 그녀가 돌연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원래 올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심부름 때문에 오신 거네요?”
“음? 그렇죠 뭐.”
카이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하린이 매정하게 그를 스쳐지나갔다.
“가요. 한정우 씨.”
“아, 예…….”
갑자기 차가워진 태도에 딱딱한 호칭에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분명히 같이 봉사 활동도 다니고, 밥도 먹으러 다니면서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럼…… 출발할게요.”
미믹을 역소환시킨 뒤, 그녀의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신출귀몰.”
천상의 정원으로 돌아온 그들을 반기고 있던 건 역시 두 명의 소녀 신이었다.
“하린 님!”
“아, 칼 라샤 님.”
유하린은 다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이쪽 분에게.”
“네. 제가 불렀…….”
카이와 유하린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라샤가 돌연 아하. 알 수 없는 탄성을 터트렸다.
그녀는 이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더니, 유하린의 손을 끌며 정원의 구석으로 가버렸다.
낙동강 오리알처럼 붕 떠버린 카이에게는 헬릭이 다가왔다.
“쯧쯔쯔. 어리석구만.”
혀를 끌끌 차고, 노인네처럼 뒷짐을 진 상태다.
심지어 걸음마저 팔자걸음이다. 실버타운 Swag 무엇.
“카이여. 오늘보니 그대는 아직도 멀었느니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대는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그러면 안 되는 것이야. 앞으로는 잘하거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그녀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라샤와 유하린 쪽으로 방방 뛰어갔다.
“언제 처음 만났어요?”
“어머, 그럼 매주 데이트를…….”
“음음. 카이가 은근히 눈치가 없느니라.”
셋이서 즐겁게 수다를 떤다.
뭔가 재미있어 보여서 슬쩍 다가가려고 하자.
휙, 휙, 휙!
세 쌍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쏘아봤다.
“한정우 씨, 죄송한데 잠시 저 쪽에 좀 가 있으시겠어요?”
“미안하니라.”
“지금은 걸즈 토크예요. 카이 님.”
무리에서 배척당한 카이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그녀들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다 끝나셨습니까?”
카이가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화답한 것은 놀랍게도 유하린이었다.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오랫동안 수다를 떨었죠?”
그녀는 언제 뚱했냐는 듯,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카이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죠.”
“그것보다 카이여. 들어보거라.”
밑에서 헬릭이 번쩍번쩍 손을 들며 카이의 시선을 끌었다.
“뭔가요?”
“라샤의 교단이 뮬딘 교에게 점령당했다는 것, 기억하느냐?”
“물론이죠. 그런데 하린 씨가 이제는 없다고 한 것 같은데요.”
“네. 그런데 녀석들과 싸우면서 꽤 중요한 정보를 입수한 것 같아요.”
“중요한 정보요?”
카이가 눈을 빛내자 유하린이 고개를 시원하게 끄덕였다.
“혹시 암흑 지대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암흑 지대라면…….”
분명히 오곤 제국과 칼데란 제국의 위쪽.
그러니까 대륙의 북쪽 지대를 의미한다.
아직까지 유저나 NPC의 발걸음을 거부한 미지의 대륙.
때문에 그곳은 현재 최상위 랭커들의 메인 무대가 되고 있었다.
그곳을 탐험하면서 만든 지도만 팔아도 꽤 쏠쏠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지.’
최소 400레벨의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잘 압니다. 그런데 그곳은 왜요?”
“잊혀진 옛 신전을 거점으로 삼고 있던 뮬딘 교. 그들이 가디언 역할로 두고 있던 몬스터들은 모두 키메라였어요. 그리고 그 키메라들의 원형이 되는 것들은…….”
“암흑 지대. 그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었습니까?”
“맞아요. 게다가 독자적으로 조사를 해본 결과, 뮬딘 교 녀석들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몬스터들을 주기적으로 공급받고 있었어요.”
“……즉. 암흑 지대에는 뮬딘 교의 본단, 혹은 거점이 최소 하나 이상 존재한다.”
명쾌한 해답을 내린 카이가 유하린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어둠 추적자 쪽에 보고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만.”
“네. 안 그래도 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나요?”
“부탁이요?”
카이의 질문에 침을 꿀꺽 삼킨 유하린이 입을 열었다.
“가, 같이…… 같이 가실래요? 암흑 지대…….”
“음.”
카이가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뮬딘 교의 거점이 하나 이상 존재한다면 가는 게 맞아. 하린 씨를 혼자 보내는 것도 위험해보이고. 무엇보다…….’
운이 좋다면 그곳에 아트록스의 영혼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에 관해선 어둠 추적자의 수장 타르달이 자료를 조사해놨을 터.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이 조금 있습니다.”
“급한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준비 기간은 일주일 정도로 잡으면 될까요? 저도 전직을 금방 마쳤기 때문에 신전에 가서 스킬도 좀 배우고, 장비도 새로 맞춰야 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이제 그녀는 성기사 장비 착용은 물론, 전용 스킬까지 배울 수 있다.
‘나도 두 분 입학시키고 나면 신전에 한 번 들려야겠어.’
태양의 사제가 새롭게 배울 수 있는 스킬이 있는지 확인을 할 요량이었다.
이른바 출정 전의 준비라는 소리.
“그럼 혹시 저 수도 쪽에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장비 구하기는 그쪽이 편해서…….”
“물론입니다.”
유하린을 라시온의 수도, 레이아크에 데려다 준 카이는 일주일 뒤의 만남을 약속했다.
“그 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연락 기다릴게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를 지은 그녀는 은발을 찰랑거리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바빠지겠어.’
다시 천상의 정원으로 이동한 카이는 두 소녀를 데리고 아르칸 아카데미로 향했다.
“아니, 카이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대뜸 교장실을 방문하자 알버트 교황이 쓰고 있던 돋보기안경을 내리며 그를 반겼다.
“하하, 교황님 잘 지내셨어요?”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찌 교직 생활이 교황직보다 더 힘든 것 같긴 하지만요.”
농담을 건넨 알버트는 자리를 권하고, 차를 내왔다.
헬릭과 라샤의 몫으로는 상큼한 오렌지 쥬스를 내오는 센스를 가감 없이 발휘했다.
“오늘은 귀여운 소녀 분들과 함께 오셨군요.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애들아. 자기 소개해야지?”
귀여운 두 신을 데리고 인간계에 내려오면 좋은 점 한 가지.
바로 자연스럽게 말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기한 점은 헬릭도 그렇고 라샤까지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라샤라고 합니다.”
“허허, 반갑습니다. 태양의 순례자인 알버트라고 합니다.”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그래도 되겠니?”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은 그는 오렌지 쥬스를 맛있게 마시는 두 소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럼 옆에는…….”
“제, 제 이름은 그…… 헤, 헬릿!”
혀를 깨물었는지 헬릭의 발음이 새버렸다.
“응? 헬릭……?”
알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헬릭이 울먹거리며 카이를 쳐다보자, 그가 재빨리 나섰다.
“혀 깨물었나 보네요. 헬리자베스. 그녀의 이름은 헬리자베스입니다.”
“아아…… 부모님이 태양교를 믿으시나 봅니다. 보통 딸 아이의 이름으로 많이들 짓지요. 허허.”
“그렇죠 뭐.”
능청스럽게 말을 끝내자 알버트는 두 소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감탄했다.
“오오오. 그런데 두 분의 기운이 굉장히 정심하십니다. 게다가 헬리자베스 님은…….”
그녀를 바라보는 알버트의 두 눈동자가 이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매우 친근한 듯한 기분이…… 아, 물론 제 착각일 뿐이겠지만요.”
“히끅!”
간이 콩알만한 헬릭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시전하였다.
표정 가득 두려움이 가득한 것이, 정체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모양이다.
이에 바빠진 것은 카이였다.
“하하, 당연히 교황님이 만났을 일은 없었을 겁니다. 몸이 약해서 평생 집에만 있었거든요.”
“저런…… 태양신 헬릭의 축복이 너의 몸을 치유하기를 내 직접 기도해주마.”
실제로 알버트가 눈을 꼭 감은 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헬릭을 위해 헬릭에게 기도하는 이 기묘한 상황 무엇.
그 틈에 카이는 헬릭에게 오렌지 쥬스를 빠르게 삼키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래야 딸꾹질이 멈추니까.
꿀꺽, 꿀꺽!
단번에 음료를 들이킨 헬릭은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 딸꾹질을 하지않았다.
기도를 끝낸 알버트는 그녀들을 위해 특별히 과자까지 꺼낸 뒤, 카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아카데미에 두 사람을 입학시키고 싶습니다.”
“……이 두 사람을 말입니까?”
한 눈에 봐도 어려보이는 그녀들의 신장에 알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두 분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어…… 그러니까 헬릭…… 자베스하고 라샤 둘 다 14살입니다.”
“아하, 또래에 비해 몸집이 조금 작으신 거군요.”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희는 아직 신입생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카데미를 다니려면 기존의 학생들과 같은 수업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엔 진도 차이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이는 마치 열성적인 학부모라도 된 듯, 그녀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희 애들이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해요.”
“아…… 그, 그렇군요.”
아주 어색한 미소를 지은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