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
힐통령 363화
112. 파멸의 기사(2)
발칸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리벤지 길드.’
물 밑에서 조용히 활동하던 그들은 카이에 의해 수면 위로 드러난 집단이다.
구성원은 전원 검은 벌과 타이탄 길드의 잔당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런 녀석이 암흑 지대는 왜…….’
두 가지 의문이 발칸의 머리를 채웠다.
첫째. 어째서 골리앗이 이곳에 있는가.
그리고 둘째, 어째서 골리앗이 자신들을 공격했는가.
하지만 그러한 의문들은 떠오른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이유야 어쨌든…….’
일단 뺨을 얻어맞았다.
게다가 길드원들 중 몇 명은 놈의 손에 의해 로그아웃까지 당한 상태.
발칸은 이런 상황에서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대답하는 남자였다.
후우우웅!
발칸의 몸에서 넘실넘실, 희미한 푸른색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3차 전직을 마친 전사가 배울 수 있는 ‘배틀 포스’였다.
효과는 힘과 체력, 민첩 스탯을 대폭 상승시켜주며 상태 이상과 마법 저항력이 증가한다.
“큭, 배틀 포스인가? 그래…… 너와는 꼭 한 번 승부를 겨뤄보고 싶었지.”
골리앗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발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랬나? 마주치는 족족 자리를 피하길래 날 두려워하는 줄 알았는데.”
“……개소리. 시나리오 쓰는 수준 하나는 제법이군.”
짜증이 난 듯 잔뜩 인상을 구긴 골리앗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전의를 다졌다.
“뭐,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관심 없다. 중요한건 지금이지.”
이에 발칸은 한 손으로 대검을 들어올리며, 검극을 골리앗에게 겨누었다.
“동의한다. 그러니 전력으로 와라.”
“전력? 큭…… 크흑. 크하하!”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터트린 골리앗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옛정을 생각해서 가주지. 전력으로.”
동시에 골리앗이 왼손을 대각선 위로 긁었다.
파아악!
암흑 지대의 바닥에 깔린, 오염된 흙들이 비산하며 발칸에게 날아들었다.
동시에 골리앗의 신형이 튕기듯 앞으로 날아갔다.
발칸은 자신의 시야를 덮은 흙더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흙은 속임수.’
저것을 쳐낸다고 대검을 휘두르면, 그 뒤에 있을 골리앗의 후속타를 피할 방도가 없다.
남들이라면 뒤나 옆으로 크게 물러서서 공격을 한 번 피하겠지만, 발칸은 그러질 않았다.
‘무도가에게 거리와 흐름을 내주면 골치 아파진다.’
특히 골리앗 같은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주도권을 내주면 더더욱 피곤해진다.
때문에 발칸은 오히려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워리어의 전용 스킬, 대쉬였다.
‘흙을 통과할 땐 눈을 보호한다.’
왼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발칸이 흙더미를 빠져나왔다.
“오, 그 짧은 시간에 파훼법을 생각하다니 제법이군.”
흙더미의 뒤에는 예상했던 대로 골리앗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장비한 거대한 건틀렛에 박혀 있던 날카로운 송곳니가 한 차례 빛났다.
“하지만 이번엔 선택을 잘못했어.”
골리앗이 입꼬리를 올렸다.
“도망쳤어야지.”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대포알처럼 튀어나갔다.
발칸은 들고 있던 대검을 그대로 내리며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까드드드드득!
건틀렛의 송곳니가 대검의 검면을 그대로 강타했다.
“읍?!”
발칸은 골리앗의 패턴을 모두 파악했지만 단 한 가지.
그 공격에 실린 힘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무슨 힘이…….’
덩치라면 어디서도 딸리지 않는 발칸의 몸은 방어 자세 그대로 허공에 붕 떴다.
이에 당황한 발칸이 황급히 검을 휘둘러 골리앗의 접근을 차단하려던 순간.
“이런, 내 공격 아직 안 끝났는데. 벌써 검을 내리면 어떡하나.”
이를 드러내며 웃은 골리앗이 왼손을 쏘아냈다.
콰드드드득!
“크윽!”
건틀렛은 그대로 발칸의 옆구리에 박혔다.
그 충격으로 10미터나 날아간 발칸은 거대한 나무에 부딪치고는 땅에 떨어졌다.
“흠. 역시 스폰서가 많아서 그런지 장비도 좋은걸 입었군. 손맛 좋은데?”
골리앗이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그를 아주 오랜만에 흥분시켰다.
“그래, 전투라면 응당 이래야지. 발버둥치고 꿈틀거리는 맛이 있어야 더 짓밟을 맛이 나니까.”
“여전히…… 양아치 근성은 못 버렸군.”
대검을 지팡이 삼아 땅을 짚고 일어선 발칸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양아치? 웃기는군. 설마 게임에서 페어플레이라도 강조하고 싶은 거냐?”
“그게 옳으니까.”
“옳은 거 너나 많이 해라. 신사인 척, 관대한 척하면서 유저들한테 사랑 많이 받고…….”
골리앗이 다시 한 번 주먹으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달려들었다.
“나한텐 좀 뒤지게 맞자.”
다가오는 골리앗을 보는 발칸의 눈은 착 가라앉아있었다.
‘시간을 끈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단 한 번의 공방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골리앗은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것은 게임의 부조리함 중 하나였다.
장비, 레벨, 스킬, 직업.
골리앗이 얻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하나가 이 엄청난 격차를 발생시켰다.
‘다음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것을 담는다.’
전력이 드러나는 것을 걱정하면서 기술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무너지면 후방의 길드원들도 몰살될 것이 뻔했으니까.
때문에 워리어스 길드의 마스터는, 부하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아낌없이 개방했다.
“용맹의 함성, 기사도, 폭풍 칼날, 파괴본능!”
상위 전사가 사용할 수 있는 고급 버프와 유니크 스킬들이 순차적으로 그를 휘감았다.
‘지속 시간은 짧지만, 이것으로 내 다음 공격은…….’
각오를 다진 발칸이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내츄럴 그립.”
손에 착 감겨오는 검은 마치 자신의 신체 일부인 것처럼 편안했다.
동시에 공격력이 다시 한 번 더 상승했다.
그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나의 전력이다.’
본인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와 가장 강한 파괴력.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발칸이 옅은 숨을 내쉬며 두 발을 살짝 구른 순간.
퍼어어엉!
바닥에선 폭발물이라도 터진 것처럼 굉음이 터져 나왔다.
골리앗이 저도 모르게 하늘로 비산한 흙더미를 올려다보는 순간.
“참수!”
발칸의 대검은 이미 공기를 찢어발기며 그의 정수리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
골리앗은 코앞까지 도달한 발칸의 대검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나의 공백 기간 동안 스스로의 단점을 극복한 건가.’
파괴력이 강한 대검 전사가 지닌 유일한 옥의 티는 다름아닌 속도였다.
그 어떤 강력한 공격이라 해도, 상대를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법이니까.
‘……대단하군.’
물론 단점을 극복한 이 공격은 일회성일 확률이 다분히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리앗은 순수히 발칸의 노력에 감탄했다.
그는 자신이 한 때는 열등감을 느꼈을 정도로 재미없고, 고지식하며 유능한 사나이다.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 노력만큼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정말 대단하다.’
때문에 골리앗은 진한 슬픔과 함께 분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나에게 시간이 충분했다면…… 분명히 나의 힘만으로도 뛰어넘을 수 있었을 텐데.’
나름 라이벌이라 느끼던 상대를.
이렇게 쉽게.
그것도 압도적인 힘으로 무너트려야 하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하나 현실은 냉정했다.
까아아앙!
자신은 뮬딘의 힘을 계승한 신화 직업. ‘파멸의 기사’로 전직했다.
“……유감이군.”
골리앗은 편안한 자세로, 자신의 몸을 두른 얇은 막 너머에 있는 발칸을 쳐다보았다.
주인이 위험에 빠지자, 반응형 스킬인 ‘다크 배리어’가 자동 시전된 것이었다.
그것은 발칸의 모든 힘이 담긴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인을 보호했다.
스윽.
골리앗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발칸의 검면을 툭 밀었다.
“크윽!”
그 단순한 행동에 담긴 미중유의 힘에 검을 놓친 발칸은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골절된 손목이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 공격은 정말 의외였다. 이 직업이 아니었다면 당했을 수도…….”
쓴웃음을 지은 골리앗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상체만큼 거대한 건틀렛이 발칸을 드리웠다.
“너와는 조금 더 즐기고 싶었지만, 정말 유감이다.”
골리앗은 그대로 발칸의 몸을 쥐었다.
거대한 건틀렛에 사로잡힌 발칸의 전신이 비명을 내질렀다.
우드드드득.
“크아…… 윽……!”
이빨을 꽉 깨문 발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스터!”
“발칸 형님! 이 새끼가……!”
목숨을 걸고 암흑 기사들을 저지하던 워리어스 길드원들은 그 비명을 듣곤 눈이 뒤집혔다.
그들은 상대하던 암흑 기사들을 등진 채, 자신들의 마스터에게 달려갔다.
당연히 뒤쪽에서 날아온 공격들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골리앗,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누굴 건드리는 거냐!”
“죽여주마!”
분노로 눈이 뒤집힌 이들에게 화면이 붉어지고, 생명력이 떨어지는 일 따위는 사소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오지마라…… 멍청이들…….’
골리앗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발칸은 점점 흐릿해지는 시선으로 길드원들을 돌아봤다.
몸 상태를 보니 이제 곧 로그아웃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존경을 받는다는 점도 나름 부럽군.”
타이탄 길드가 몰락했을 때,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길드원들이 떠오른 골리앗이 중얼거렸다.
하나 그는 상념을 지워냈다.
“뭐, 덕분에 나는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으니까.”
그는 다가오는 워리어스 길드원들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콰아아아아아!
“크아아악!”
“이, 이건 무슨……!”
광범위한 어둠의 신성력이 넓게 퍼지며 다가오는 적들을 그대로 밀어냈다.
“버텨!”
“이까짓…… 거…….”
이를 악물고 버티는 워리어스 길드원들의 생명력과 장비 내구도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멍청한 녀석들.’
자신을 구하겠다고 달려드는 부나방 같은 부하들을 보며, 발칸은 끝내 미소를 지었다.
‘로그아웃이 되면…… 오늘은 저 녀석들을 불러서 술이나 한잔 기울여야겠군.’
그가 곧 다가올 로그아웃을 대비하며 눈을 감는 순간.
쿠르르르르르릉!
‘……?!’
이상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을 조이고 있던 힘이 사라져버렸다.
“크윽…….”
자연스럽게 땅에 엉덩방아를 찍은 발칸은 황급히 앞을 쳐다보았다.
흐릿해졌던 시야는 초가 지날수록 점차 선명해졌다.
‘골리앗이 없다?’
시야의 어디에서도 골리앗의 신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둡던 암흑 대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벽들이 세워진 상태였다.
“이 벽은 대체…….”
발칸이 중얼거릴 때, 길드원들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그러게 누가 멍청하게 혼자 싸우래요.”
“예전에는 골리앗 이긴다고 하더니, 꼴이 뭡니까 이게.”
“……시끄럽다.”
술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 발칸은 평소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 질문에 길드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나 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저희도 잘…… 갑자기 땅에서 벽들이 솟아오르던데요?”
“제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하얀 사슬이 날아오더니 골리앗이 휙 하고 끌려가던 겁니다.”
“이 벽들이 갑자기 솟아올랐다고?”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발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부르르르.
길드원 하나가 돌연 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지역 채널 채팅을 진동 설정으로 바꿔놔서…….”
“맞다. 그 채팅창 좀 봐봐. 지원 온다던 새끼들이 왜 이렇게 늦어?”
“온다고 한 놈이 몇인데, 여태까지 너무 조용한데?”
“그럼 잠깐만.”
빠르게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채팅창을 살피던 길드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 모습을 쳐다본 발칸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설마 온다던 이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핼쑥한 표정을 지은 길드원은, 아무 말 없이 채팅창을 돌렸다.
단번에 모두의 시선은 5분 전에 떠오른 두 개의 메시지에 고정되었다.
[저희 파티가 갑니다.]
[거의 다 도착했어요. 아, 참고로 추가 지원은 필요 없어요.]
발신인은 각각 카이와 유하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