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
힐통령 364화
112. 파멸의 기사(3)
발칸을 비롯한 워리어스 길드원들이 알 수 없는 벽의 미로에 갇혀 있던 시각.
골리앗은 잘 훈련된 개가 이끄는 썰매처럼 울퉁불퉁한 바닥을 질주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두 다리가 아닌, 등으로.
“큭, 윽! 어윽!”
등이 바닥과 부딪칠 때마다, 그의 입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음 같아선 일어서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현재 그의 목에는 굵직한 신성 사슬이 휘감긴 상태였으니까.
발칸의 전력이 담긴 일검조차 막아냈던 다크 배리어가, 고작 신성 사슬을 막지 못한 것이다.
“흐음. 이 정도까지 왔으면 된 건가.”
인간 썰매의 주인, 카이는 슬쩍 뒤를 보더니 들고 있던 사슬을 앞으로 휘둘렀다.
짜아아악!
“크헉!”
그러자 끝에 묶여있던 골리앗이 바닥에 나자빠지며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아직까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게 무슨…… 어떻게 된…… 뭐지?’
자신은 어둠의 학살자다.
미드 온라인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신화 클래스의 유저.
카이만 없다면 이 게임의 절대자로써 군림할 수 있는 ‘선택 받은’ 존재다.
그런 자신을 짐짝처럼 다루다니?
‘건방진…….’
카아악, 퉤!
가래침과 함께 입안에 씹히던 텁텁한 모래를 뱉어낸 골리앗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카이를 노려봤다.
“……드디어 만났군.”
“난 쭉 만나고 싶었어. 네가 쥐새끼처럼 도망만 다녀서 여태 못 만난거지.”
“큭, 그랬던가?”
자신을 비하했음에도 불구하고 골리앗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물어봐도 되겠나?”
카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골리앗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사제’ 따위가 그렇게 강한거지?”
한 방 먹였다.
골리앗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은 딱 그러했다.
곧 카이의 안색이 굳을 것을 생각하니, 사이다를 병째 드링킹한 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졌다.
“글쎄?”
하나 기대와는 다르게 카이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직업이 밝혀지던 말든 큰 상관이 없다는 기색이었다.
이에 당황한 것은 골리앗이었다.
“무슨…… 왜 그리 당당하지? 네 놈은 여태까지 본인이 사제라는 것을 숨겨오지 않았나?”
“초반에는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딱히 숨길 필요가 없어서.”
게임 초반에야 그 사실을 숨겼다.
왜냐하면 사제라는 것이 들킬 경우, 게임 플레이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었다.
이제는 자신이 사제라는 걸 알아도 감히 시비를 걸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건, 내 직업이 사제인지, 아닌지 따위가 아니야.”
촤르르륵.
카이는 몸을 숙여 자세를 낮추고, 마치 신발끈을 묶는 것처럼 신성 사슬을 제 발에 감았다.
“나한테 어떻게 도망칠지를 고민해야지.”
“도망이라…… 좋아, 인정하지. 과거에 네 놈을 잠깐 피해 다니던 시기가 있긴 했다.”
“잠깐이라고? 못해도 반년은 된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눈을 번뜩이는 골리앗의 전신에선 뮬딘 교의 신성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불쾌해지는 칙칙한 검은색 기운이었다.
“네놈을 무너트리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며 숨죽여 살아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항상 누군가를 짓밟고 군림해 오던 그가, 비루하고 누추한 곳만 드나들며 힘을 키웠으니까.
하루하루가 자존심에 기스를 내는 것 같은 짜증나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그 대상이 나타나니…… 도저히 못 참겠군.’
스팅은 아직 카이를 잡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했지만, 골리앗의 생각은 달랐다.
‘카이의 클래스는 결국 사제. 게다가 나와는 극상성의 기운을 지닌 녀석이다.’
자신은 태양교의 신성력에 두 배의 피해를 입지만, 그건 카이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뮬딘 교의 신성력에 두 배의 피해를 입으니까.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모든 조건이 같다. 그러니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건…… 바로 스킬의 유무지.’
당연하게도 그것은 사제 같은 지원형 클래스가 아닌, 전투형 클래스인 자신이 우위에 있다.
‘사제의 공격 스킬은 뻔할 수밖에 없어.’
게다가 카이와는 이미 두 번이나 싸운 경험이 있었다.
끼리릭.
‘난 녀석의 스킬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상대방은 자신을 두 번이나 이겼다.
사람인 이상 방심을 하고 있을 터.
그러니 오늘만큼은 다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자신과, 아직 파멸의 기사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카이.
당연히 이 차이는 싸움에 들어서는 순간 눈덩이 굴러가듯 커질 것이다.
‘이 싸움은 내가 최소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싸움.’
그 사실에 자신감에 차오른 골리앗은 카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다리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가속이 붙은 다리는 이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라졌다.
그 속도는 발칸이 전력을 다했을 때의 속도를 가볍게 상회했다.
‘하지만 놈은 반응하겠지.’
골리앗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카이가 강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그는 카이가 자신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움직였다.
‘첫 번째 공격은 페이크!’
화아아악!
거대한 건틀렛이 음속을 돌파하며 튀어나갔다.
하지만 이 엄청난 공격은 허수에 불과했다.
상대방이 맞거나 흘리거나, 혹은 피해버려도 상관없는 미끼라는 소리.
하나 카이는 끝까지 건틀렛을 쳐다보더니, 손을 뻗었다.
‘……이걸 걸린다고?’
카이라면 당연히 허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적당히 공격을 흘릴 줄 알았다.
헌데 그는 예상을 뒤집고 정직하게 팔을 내뻗는 중이다.
‘녀석에 대한 내 기대가 너무 컸나?’
혹시 카이에게 두 번이나 패배하면서, 그를 스스로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실망이군, 카이.’
하지만 실망과는 별개로, 찾아온 기회를 놓칠 골리앗이 아니었다.
“죽어라!”
골리앗은 자신의 건틀렛과 카이의 조그마한 손이 맞닿는 것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겼……!’
기쁨의 비명을 터트리려는 찰나.
골리앗의 세상이 180도로 뒤집어졌다.
우드득!
동시에 시야가 어지러워지고 골이 흔들리더니, 척추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크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할 틈 따윈 없었다.
그런 사소한 의문보다 먼저, 한 가지 생각만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일어나야 한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집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일어나려고 했다.
콰드드득!
신성 사슬을 감아놓은 카이의 발이 아주 깨끗하게 그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그대로 날아간 골리앗의 신형은 나무를 세 개나 부러트린 후에야 멈췄다.
“커…… 으윽…….”
정신이 그대로 날아갈 것 같은 아찔한 고통과 함께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나 골리앗은 눈을 부릅뜨며 뇌가 녹아내릴 것 같은 고통을 참고 견뎌냈다.
‘한 번…… 딱 한 번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 한 번.
자신의 공격을 한 번만 명중시키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다.
그 생각만이 그를 지탱하는 희망이 원천이었다.
발차기 한 번에 절반 가까이 날아간 생명력은 빠른 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파멸의 기사가 지닌 특성 중 하나인 ‘급속 재생’의 효과였다.
이토록 그의 직업은 수많은 패시브가 비호하는 근접형 클래스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에겐 악행 스탯이 있다.’
나쁜 일을 할 때마다 상승하는 파멸의 기사 고유 스탯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이 스탯을 올리기 위해 수천 명의 NPC를 죽였다.’
한창 떠들썩하던 ‘NPC 실종 사건’의 범인이 바로 그였다.
비교적 치안이 안 좋은 시골 마을의 주민들만 골라 죽인 그는 악행 스탯을 착실히 쌓아왔다.
‘태양의 사제도 비슷한 개념의 스탯이 분명 있겠지.’
하지만 단언컨대, 자신의 악행만큼 빠르게 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현재 자신의 모든 스탯은 평균 1,000 정도 수준.
그건 악행으로 쌓을 수 있는 최대 스탯의 값이 1,000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의 스탯창을 놈에게 보여주고 싶군.”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절망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물론 방금 전에는 조금 실수하긴 했지만.’
첫 격돌이어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전력을 다한 것 같군. 내가 움직임을 놓칠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긴장했으면 첫 격돌부터 최선을 다했을까.
“큭, 크큭…….”
그 사실은 골리앗에게 오히려 희열을 안겨주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지금부터 힘을 끌어올릴 생각이었으니까.
“사도화.”
스킬 사용과 동시에 체내에 잠들어 있던 어둠의 신성력이 휘몰아치며 대지를 진동시켰다.
‘크윽, 뜨겁군.’
온몸의 혈관이 녹아 없어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하나 그것은 고통이나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짜릿한 해방감을 안겨줬다.
화르르르륵!
혈관과 피부를 넘어 뿜어져 나온 신성력은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것은 이내 골리앗의 전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하나 고통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아, 이런 기분인가…….’
오히려 그 불꽃이 자신을 덮은 뒤로, 그는 크나큰 안정감을 느꼈다.
전신을 휘감은 어둠의 불꽃이 선사하는 포근함과 자신감.
그것은 바로 압도적인 강함만이 줄 수 있는 강자의 여유였다.
“사용해 보는 건 처음인데…… 제법 괜찮군.”
악행 스탯 50을 소모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사도화’ 스킬.
신성 공격력은 몇 배나 증가하고, 고작 10분이긴 하지만 모든 스탯이 20% 상승한다.
“이런 모습인가.”
팔과 다리를 내려다본 골리앗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몸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인간보다는 오히려 옛 이야기에 나오는 악마의 형상에 가까웠다.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
골리앗은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화르륵, 화르르륵.
그의 걸음걸이마다 바닥이 타오르며 녹아내렸다.
골리앗은 전신에서 용솟음치는 압도적인 힘에 전율했다.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러한 힘을 지니고도 패배한다는 것이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음?”
카이에게 돌아가자, 그는 자신의 바뀐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네 몸. 불타고 있는데.”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니, 이 경우엔 오히려 신경 쓰라고 말해줘야 하나?”
지금부터 사도화로 얻은 이 강력한 힘 모두를 쏟아부을 생각이었으니까.
골리앗은 가볍게 손가락 하나를 튕겼다.
핏!
동시에 카이의 뺨에 혈선이 그어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걸 보니, 자신이 공격 받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 했다.
“큭, 크큭…… 크하하하하!”
이에 골리앗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공격에 반응조차 못하는 그 한심한 작태를 보자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겨우 웃음을 멈춘 골리앗이 입을 열었다.
“아마 지금의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어, 뭐…… 네가 왜 그렇게 웃는지 잘 이해가 되진 않네.”
“내가 고작 반 년만에 이토록 강력한 힘을 얻은 방법. 알려줄까?”
골리앗이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카이가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NPC 실종 사건에 대해서 들어봤나?”
“토스트 먹다가 TV에서 봤지. 이후로 기사로도 몇 번 봤고.”
“나의 작품이다.”
골리앗의 목소리는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안달이 난 듯했다.
하지만 카이는 오히려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질문했다.
“NPC를 실종 사건의 범인이 네놈이라고?”
“그렇다.”
“실종된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 질문에 골리앗은 톡톡,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두드렸다.
“나의 스탯이 되었다. 그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죽음일 테지.”
“……죽였다고?”
“그렇다고 말했다만.”
“내가 들은 실종자 수만 천 명이 넘는데?”
“정확히 세지는 않았지만, 아마 2천 명 가까이는 될 거다.”
“……허.”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카이가 헛웃음을 뱉어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골리앗을 쳐다봤다.
“내가 진짜 웬만해선 욕을 잘 안 하는데…… 넌 진짜 개새끼다.”
“그깟 데이터 쪼가리 좀 없앴다고 욕을 하는 건가?”
“그럼 넌 그깟 데이터 숫자 몇 개를 올리기 위해 사람을 죽인 거냐?”
“어차피 진짜 사람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지? 너, 나, 그리고 모든 유저는 데이터 쪼가리인 몬스터를 잡고 레벨을 올린다. 생김새만 다를 뿐, NPC나 몬스터는 다 같은 데이터에 불과하지.”
“……사이코패스 새끼.”
“내가 살기 위해 적을 죽인다. 강해지기 위해 약자를 짓밟는다. 그것은 원시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 ‘인간’의 본성이자 사회의 기초적인 룰이지. 난 그 룰에 충실했을 뿐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다.”
허공에 생성된 성검을 낚아챈 카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강자에게 짓밟히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은 없어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