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65화 (365/441)

# 365

힐통령 365화

112. 파멸의 기사(4)

물론 카이도 NPC들이 페가수스 사에서 개발한 가상인격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 사이의 갭은 상상이상으로 거대했다.

실제로 카이의 주위에는 유저보다는 NPC가 훨씬 더 많았다.

우선 그의 영지민부터가 그러하다.

인어족, 엘프족, 드워프와 조인족은 물론.

태양교의 성혈단과 아르칸 아카데미의 교수진들.

마지막으로 소환수와 귀여운 신들까지.

사실 그의 게임 라이프에서 NPC를 빼면 사람 자체가 몇 남지 않는다.

확실히 이것은 유저들끼리만 뭉쳐 다니는 다른 플레이어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NPC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하며 스스로 감정까지 느낀다.

때문에 골리앗의 말은, 자신의 게임 플레이 스타일 모두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주민들을 죽이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갈까? 아니면 네가 올래.”

카이는 아직 그 어떤 버프 스킬조차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순정 상태.

그 모습을 쳐다보던 골리앗이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와라. 그리고…… 그 상태로 괜찮겠나? 보아하니 아직 버프를 걸지 않은 것 같은데.”

“버프?”

“난 뒷말이 나오는 것을 싫어한다. 괜히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처음부터 전력으로 덤벼라.”

“…….”

골리앗의 요구에 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력을 다하는 것이 네 소원이라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네 개의 신성마법진이 회전하며 그의 몸에 끝없는 축복을 걸었다.

“호오. 확실히 이제야 좀 상대할 맛이 나는군.”

카이의 전신을 휘감은 황금빛 신성력을 보며 골리앗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의 전력을 나의 전력으로 부셔주마.’

골리앗은 마치 미래가 보이는 듯 했다.

자신의 발치에 무릎 꿇은 채 허망한 표정을 짓는 카이.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자신.

그때의 희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 분명했다.

‘아아…….’

골리앗은 당장이라도 상대를 찢어버리고 싶어 부르르 떨리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마음 같아선 체통을 지키고 싶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스스로도 자신이 없다.

이 욕망을 참을 자신이.

‘지금 당장 놈을 찢어죽이고 싶다.’

강렬한 살의가 빚어낸 ‘의지’는 곧 ‘현상’으로 이어졌다.

파스스스슥.

뮬딘은 어둠과 악, 죽음을 다루는 신.

당연히 그의 신성력이 지나간 장소는 죽음만이 남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골리앗이 신성력을 극성까지 끌어올리자, 주변의 나무와 잡초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빛은 두 사람을 비추지 못했다.

오히려 일대를 가득 메운 골리앗의 신성력 때문에 이전보다도 더 어두워진 상태.

골리앗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현상에 굉장한 성취감을 느꼈다.

“놀랍지 않나? 그저 기운을 발산한 것만으로도 게임의 지도를 바뀌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게.”

물론 카이가 그 말을 받아줄 리는 없었다.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에는 천하의 골리앗조차 긴장했다.

‘나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는 하나, 상대도 신화 등급의 클래스인 카이다.’

엄청난 공격이 곧 쏟아질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싸움으로, 암흑 지대라는 곳 자체가 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골리앗이 끓어오르는 고양감과 긴장감을 느끼기를 잠시.

카이는 차갑기 그지없던 두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며 검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것이 네가 무의미한 학살을 일삼으며 쌓아올렸던 모래성의 실체다.”

‘……음?’

그 말을 끝으로 카이는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다.

‘미친놈! 갑자기 어딜 도망치는 것이냐!’

어처구니가 없어진 골리앗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하나 시야의 어디에도 자신의 손은 보이지 않았고, 입 밖으로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한껏 당황한 골리앗의 귓가로 무거운 알림만이 울렸다.

띠링!

[사망하셨습니다.]

[숙적인 태양의 사제에게 패배하셨습니다.]

[뮬딘 교도의 전체 사기가 대폭 하락합니다(30일)]

[어둠의 신 뮬딘이 당신에게 굉장한 실망감을 드러냅니다.]

[직업, ‘파멸의 기사’를 박탈당합니다.]

[고유 스탯, ‘악행’이 사라집니다.]

[직업이 ‘초보자’로 바뀌었습니다.]

‘이, 이게 무슨……!’

아까와 마찬가지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카이는 딱 일검을 휘두른 뒤, 쿨하게 등을 돌렸다.

골리앗이 자신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리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후, 괜히 도발에 넘어가서 선행 스탯만 날렸어.’

자신은 그의 요구대로 현재 낼 수 있는 ‘전력’을 다했으니까.

-……하늘을 가르는 검을 쓸 정도로 강한 상대였나?

소환된 패트릭이 질문했다.

이에 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패트릭님이 없어도 쉽게 처치할 수 있는 시시한 녀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날 불렀지?

그 질문에 카이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홧김에 열이 받아서 도발에 걸려든 것뿐이다.

어쩌면 오늘 밤 자기 전에 이불을 뻥뻥 차게 될지도 모르지.

“그냥…… 격차란 이런 것이라는 걸 좀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격차라는 것은 확실히 보여줬나?

이번에 카이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고민이 아닌, 확신이었다.

“보여줬습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띠링!

[숙적인 파멸의 기사에게 승리하셨습니다.]

[태양교도의 모든 사기가 대폭 상승합니다(30일)]

[태양신 헬릭이 당신의 승리에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파멸의 기사는 대대로 태양의 사제를 괴롭혀온 숙적이었습니다. 하나 당신은 아주 깔끔하게, 그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이 상대를 압도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결투를 모두 지켜본 태양신 헬릭이 축복을 내립니다.]

[선행 스탯이 +30 증가합니다.]

[태양 목격자의 효과로 선행 스탯이 15만큼 추가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탯 포인트를 10개 획득했습니다.]

-음?

골리앗이 죽은 자리.

그곳에서 폭발하는 기운을 느낀 패트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대가 상대하던 것이 파멸의 기사였나?

“어라, 어떻게 아십니까?”

-모를 수가 없지. 항상 우리 사도들을 방해하며 안 좋게 얽히던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카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주 잘해주었다. 이것으로 당분간 파멸의 기사는 세상에서 볼 수 없겠군.

“모험가라서 또 금세 부활할 겁니다.”

-아무리 모험가라도 이번엔 무리일 것이다. 혹시 파멸의 뜻을 알고있나.

“파괴하여 없애다 아니에요?”

-맞다. 파멸의 기사는 상대를 파멸시킬 때마다 점점 더 강해지는 악독한 직업. 하나 반대로 자신이 패배하게 될 시에는 이뤄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이들이지.

“……그 말씀은?”

-아마 그대가 상대했던 파멸의 기사는 모든 것을 잃고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아마 뮬딘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우르르르르.

예고 없이 솟아올랐던 미로는, 마찬가지로 예고 없이 사라졌다.

황급히 경계 태세로 주변을 살피던 워리어스 길드원들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어……?”

“이게 무슨.”

자신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뮬딘 교의 암흑 기사들.

그들은 모두 차가운 시체가 되어 암흑 지대에 누워 있었다.

촤아아악!

그 일을 행한 존재는 검에 묻어있던 피를 가볍게 털며 등을 돌렸다.

그게 누구인지를 단숨에 알아본 길드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유, 유하린이다.’

‘카이랑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설마 진짜 우리를 도와주러 올 줄이야.’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랭커였지만, 카이나 유하린, 크리스.

이런 슈퍼스타들은 랭커 중의 랭커라고 불린다.

유명 인사의 등장에 몸이 딱딱해진 길드원들 사이로, 발칸이 걸어 나왔다.

그는 아주 깨끗하게 정리된 주변을 돌아보더니 유하린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도움에 감사를.”

“별로. 내 의견도 아니었으니까요.”

시크하게 받아친 유하린의 말에, 발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골리앗! 그러고 보니 아직 골리앗이…….”

“괜찮아요. 카이 님이 끌고 갔으니까.”

“……언노운이?”

발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런! 아무리 카이라도 골리앗을 상대로 방심하면 안 되는데. 그 녀석은…….”

“제가 뭘요?”

뒤쪽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목소리에 발칸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옷매무새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카이가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볼 부근에 혈선이 하나 살짝 나있긴 하다.

그것도 아주 사아알짝.

발칸은 혹시나 싶은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골리앗은……?”

“죽었습니다.”

그 덤덤한 목소리에 발칸은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뭐, 생각해 보니 원래 이런 남자였지.’

남들이 못하거나 안 하는 것을 그냥 해버리는 사람.

그렇기에 인기도 많은 것이리라.

“두 분의 도움에 감사합니다.”

“뭘요. 다친 데는 어떻습니까.”

그 물음에 발칸이 길드원들을 쳐다봤다.

서로를 살핀 이들이 빠르게 보고했다.

“12명 사망, 총 38명 생존입니다.”

“으으음…….”

“생각보다 많이 죽었네요.”

“젠장, 베르스 녀석은 레벨 업이 코앞이었는데…….”

최상위 랭커 12명의 죽음은 길드 입장에서는 배가 아플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발칸은 생각을 달리했다.

‘12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38명이나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카이와 유하린의 존재 덕분이었다.

“그만. 도움을 주신 분들 앞에서 할 얘기가 아니다.”

“엇…….”

“무, 물론 두 분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길드원들의 입을 닫은 발칸은 고개를 돌렸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될지.”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카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 좀 도와주시죠.”

“내용은?”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무슨 부탁이든 막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도 한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었으니까.

툭툭,

카이가 암흑 기사의 시체가 떨어트린 투구를 밟으면서 입을 열었다.

“근처에 뮬딘 교의 거점이 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지금부터 그곳에 갈 생각이구요.”

“지원군이 필요하군.”

역시 척하면 척.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과 대화하면 이런 부분이 좋았다.

구태여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예.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발칸은 대답 대신, 벗어놨던 투구를 다시 고쳐 썼다.

***

“이런 머저리 새끼가…….”

서쪽의 천화 길드를 정리하기 위해 이동하던 스팅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골리앗이 사망과 함께 로그아웃을 당한 것이다.

당연히 그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 촉박하다.’

예정대로였다면 랭커들을 죽이고, 다크 리자드맨 일족을 제물로 바쳐야했다.

그래야만 자신과 골리앗이 계획했던 ‘제물’의 양을 맞추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대로는 턱도 없다.’

카이와 유하린이라는 괴물이 돌아다니는 숲에서 랭커들을 잡는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팅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나 혼자서 워리어스와 천화를 처리하고, 카이와 유하린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우선은 뮬딘 교의 군대를 최대한 불러 모아서 이곳에서 수성을 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자신은 이곳에서 진행 중인 ‘계획’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으니까.

스팅이 옆에 있던 뮬딘 교 신관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외부로 나가있는 이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려라.”

“……예?”

“상황이 바뀌었다. 골리앗이 죽었으니 지금 당장 회군시키는 게 맞아. 서둘러라.”

그의 논리는 정당했지만, 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스팅 님에게 교의 군대를 지휘할 권한은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답이었다.

아무리 동맹군이라고는 하지만, 뮬딘 교가 외부인에게 그 정도의 권력을 줄 일은 없었으니까.

‘젠장. 골리앗 녀석이 이래서 필요하던 거였는데…….’

이럴 때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진작 치워 버렸을 것이다.

멍청한 녀석이 죽어서까지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자 스팅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던 스팅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밖에 없군.’

천천히 눈을 뜬 스팅의 시선이 신관의 뒤통수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뮬딘 교 녀석들을 죽여서 제물의 숫자를 맞출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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