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
힐통령 367화
113. 신세계(2)
카이는 뻥 뚫린 바닥을 잠시 쳐다보더니, 망설임 없이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카, 카이 님!”
귀를 막고 있던 유하린이 깜짝 놀라 그의 뒤를 따랐다.
“중력장.”
중력장을 사용해 낙하 속도를 늦춘 카이는 마치 계단을 밟는 것처럼 허공을 걸어 내려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거대한 공동을 빠르게 훑었다.
‘무언가…… 실험하는 장소 같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로 가득 찬 유리관이나, 각종 몬스터의 사체들.
그리고 고대어가 빼곡히 적혀 있는 종이들이 가득한 장소였다.
“혼자 가시면 어떡해요.”
카이의 뒤를 따라 안전하게 착지한 유하린이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닌 듯하네요.”
“숨어서 뭔가를 꾸미는 녀석들이 다 그렇죠.”
카이는 무너진 천장의 잔해들을 밟으며 걸어 나갔다.
그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잔뜩 당황한 스팅이었다.
“역시. 바늘 가는데 실이 안 따라갈 리가 없지.”
“스팅, 그도 여기 있었네요.”
“이 괴물 새끼들…… 진짜 와버리다니.”
스팅은 자신을 발견하곤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카이와 유하린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뒤쪽을 향해 있었다.
‘젠장. 악마 소환진은 제대로 작동되었을 텐데? 역시 제물의 수가 모자란 것이 문제였나?’
지옥문은 분명 열리긴 열렸지만, 딱 손가락 하나가 나올 정도만 열렸다.
저래서야 그 어떤 악마도 나올 수 없을 터.
‘제물이 더 필요한데…….’
하지만 더 이상 제물로 쓸 만한 이들은 남아나질 않았다.
스팅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 카이의 시선이 지옥문에 고정되었다.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옥문이 뿜어내는 존재감 때문이었다.
“으음.”
동시에 카이가 경계심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힘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골리앗을 상대할 때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그가 긴장한 것이었다.
‘저건 대체 뭐지?’
아주 살짝 열려 있는 지옥문에선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불쾌해질 정도의 불순하고 끈적한 기운.
뒤늦게 이를 발견한 유하린의 눈빛 또한 흔들렸다.
“카이 님. 아무래도 저건…….”
“예, 위험하네요. 그것도 굉장히.”
스팅은 두 괴물조차 긴장하게 만든 지옥문을 쳐다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저 녀석들이 저 정도로 반응하는 것을 보면…… 분명 문이 열리기만 하면 최소 대악마가 소환될 느낌인데.’
발만 동동 구르던 그에게 카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시작부터 성의를 차려입고, 손에는 성검을 든 상태였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널 쓰러트리고 뒤에 있는 지옥문도 파괴하겠다.
차림새만 봐도 그러한 생각이 엿보이는 듯했다.
“너와 골리앗이 대체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을 파괴해야 한다는 건 알겠네.”
“젠장…….”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옥문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스팅이 마기를 일으켰다.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그의 손이 곧장 카이를 향했다.
타겟팅 스킬의 대상을 지정하기 위함이었지만, 그가 손을 뻗었을 때 이미 카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빠르다……!’
아무리 자신이 마법사라고 하지만, 움직임을 놓칠 정도의 빠르기라니?
‘이 괴물 녀석은 저 정도의 속도에 적응했다는 건가?!’
미드 온라인에서 힘 스탯을 올려 신체 능력이 아무리 향상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존재한다.
바로 사고력이다.
100미터를 3초 만에 주파하는 신체를 지니고 있다해도, 사고력이 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카이는 거의 완성된 플레이어였다.
각각이 수천에 다다르는 스탯들을 다룬 것도 벌써 몇 달.
뛰어난 성능의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최적화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화아아악!
뒤쪽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예기에 스팅은 주저없이 스킬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흩어진 그의 신형이 저 멀리서 나타났다.
“이건…… 익숙한 기술이네.”
애꿎은 허공을 벤 카이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저 기운과 기술은 지르칸의 것이다.
“골리앗은 뮬딘 교였고…… 넌 마왕 추종자 쪽이랑 연관되어있구나.”
그렇다면 차라리 상대하기는 편하다.
‘스팅 녀석의 마법 이해도는 높지만, 지르칸보다는 아닐 테니까.’
이미 그의 상위 호환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자를 쓰러트려본 적이 있다.
때문에 카이는 그가 어떤 기술을 쓸 것인지도 대강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실제로 스팅이 쏟아내는 스킬들은 다 어디선가 한 번씩 보던 것들뿐이었다.
‘지르칸 스킬의 하위 버전인가? 범위도, 데미지도 모두 부족해.’
파악이 끝난 카이는 더 이상 승부를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덮쳐오는 마기의 파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절대 영도.”
쩌저저적!
순식간에 얼어버린 파도의 끝은 스팅의 왼쪽 팔과 연결되어 있었다.
‘끝났다.’
이미 검을 든 유하린이 스팅의 배후를 점한 상태.
푸욱!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이 열리며 대검 한 자루가 앞으로 빠져나왔다.
“끄윽…… 마, 말도 안…….”
스팅이 말을 잇기도 전에, 대검을 거칠게 뽑아낸 유하린이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칼 라샤교의 신성력이 담긴 대검은 그의 목을 두부 가르듯 매끄럽게 긋고 지나갔다.
그것으로 전투는 종료.
“생각보다 시시했네요.”
“예. 하지만 상성 자체도 저희가 좋았습니다. 둘 다 신화 등급 직업에, 근접 전투력까지 뛰어나니까요.”
골리앗 때와는 달리 그 어떠한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죽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듯, 폴리곤만이 남아 있을 뿐.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하린이 말했다.
“그럼 이제 다시 영혼함이라는걸 찾으면 되죠?”
“네. 하지만 그 전에…….”
카이가 지옥문을 향해 걸어갔다.
꽉 쥔 성검은 문으로 다가갈 때마다 공명하듯 부르르 떨렸다.
마치 위험하다고 경고를 날리는 것처럼.
이에 한층 더 긴장감을 끌어올린 카이는 지옥문의 앞에 섰다.
멀리서 볼 때도 느낀 거지만, 사람의 뼈를 이용해 만들어진 이 문을 쳐다보는건 괴롭다.
‘영화 같은데서 보면 꼭 이런 거 앞에서 늑장부리다가 일 터지더라. 서두르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카이는 주저없이 지옥문을 내리쳤다.
쩌저적!
문의 두개골이 그대로 박살나고, 뼈들이 산산조각나며 문지방이 뒤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은 전체적으로 멀쩡하다.
‘내구도가 상당히 높아.’
하지만 그래봤자 사물 오브젝트.
콰앙! 콰앙!
성검이 계속해서 문을 가격할 수록, 뼈가 박살나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헌데 이를 쳐다보던 유하린이 다가오며 카이를 말렸다.
“저…… 카이 님. 이거 정말 부셔도 되는 거 맞을까요?”
“무슨 뜻입니까?”
“음. 이런 식으로 계속 공격하면 오히려 안쪽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는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건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처음에는 열린 공간이 이것보다 좁지 않았나요?”
그 말을 듣고 문을 쳐다보니, 확실히 문이 조금 더 열린 것 같다.
‘아까는…… 손가락 하나 정도 드나들 정도의 공간이었지?’
지금은 그것보다 아주 살짝 더 열린 상태였다.
손가락 두 개를 겹쳐도 여유롭게 드나들 정도.
“확실히 하린 씨 말이 맞는 것 같…….”
카이가 말을 잇던 순간, 두 사람의 고개가 뒤쪽을 향했다.
그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 있기는 했다.
“저건…… 폴리곤?”
“스팅이 죽으면서 남긴 폴리곤이예요.”
바닥을 하얗게 반짝이던 폴리곤들이 도르륵 도르륵 굴러왔다.
카이와 유하린이 그 기묘한 현상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우우우웅!
“……!”
“카, 카이 님!”
그들이 서있던 공동의 바닥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마법진?”
“스팅이 마지막에 무슨 짓을 한게 틀림없어요!”
그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현재 떠오르고 있는 마법진은 스팅이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발동시켰던 것이었으니까.
제물이 모자라 완성되지 못한 마법진은, 아이러니하게도 시전자의 시체를 먹어치운 뒤에야 완성되었다.
드드드드드.
그들이 서있는 사원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벽과 기둥이 붕괴되고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유하린의 허리에 손을 두른 카이가 두 눈을 번뜩였다.
초인에 가까운 신체 능력,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사고력.
그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한 카이는 아오사 레이드 때의 기적을 다시 한 번 이루어냈다.
아니, 오히려 난이도는 그 때보다 더 쉬웠다.
중력장이 쓰러지는 천장과 기둥들을 위쪽으로 올려 보내주었으니까.
고오오오.
하지만 흡족한 식사를 마친 마법진은 밥값을 하고싶어했다.
눈앞의 먹잇감들을 놓치기 싫어한다는 뜻이었다.
끼익, 끼이익.
카이가 엉망진창으로 부셔놓은 지옥문이 덜컹거리며 몇 번이나 흔들렸다.
“카이 님. 문이 막 흔들려요!”
“젠장…… 꽉 잡으세요!”
마나를 더 퍼부어 중력장의 효과를 높인 카이의 몸이 총알처럼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허나 그보다 한 발 먼저, 지옥문이 개방되었다.
끼이익.
그나마 카이가 거대한 지옥문을 부셔놓았기 때문인지, 온전히 열리지는 않았다.
“다, 다행이다. 안쪽에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밖으로는 못 나오네요. 문이 다 안 열려서.”
유하린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행이 아닌 불행이었다.
화아아아아악!
지옥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존재는, 화풀이를 하듯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으니까.
“크윽……?!”
기세 좋게 위쪽으로 솟구치던 카이의 몸에 막대한 부하가 걸렸다.
처음에는 우뚝 멈춰서더니, 마치 늪에 빠지듯 아래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
유하린이 지원을 시작했다.
천장의 잔해와 기둥들이 뭉쳐 지옥문으로 날려보낸 것이다.
허나 그것은 마치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가던 도중 소멸해버렸다.
“마, 말도 안 돼.”
뮬딘 교가 생물의 죽음을 관장하는 짙은 사기(死氣)라면, 마기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마치 싸우지 못해 안달난 것 자의 투기(鬪氣)와 비슷하다.
죽음과는 별개로, 상대를 무조건 짓밟겠다는 강한 원념이 실린 기운이다.
“크윽, 업그레이드! 신성 사슬! 중력장!”
카이는 신성력과 마나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무수한 신성 사슬이 거미줄처럼 튀어나가며 사원의 기둥을 휘감았다.
동시에 중력장을 통해 자신의 몸을 위쪽으로 우겨밀었다.
드드드드득.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점점 가라앉았다.
‘말도 안 되는 흡력……!’
결국 버티다못한 신성사슬이 끊어졌고, 카이와 유하린은 빠르게 추락했다.
***
바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건 반쯤 열린 지옥문이었다.
안쪽의 무언가는 미처 나오지 못했지만, 인간 두 명이 통과하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카이는 추락할 때 유하린을 제 품에 끌어안아 그녀의 충격을 최소화시켰다.
콰드드드득!
지옥문을 통과한 카이는 곧장 바닥인지, 벽인지 모를 딱딱한 것과 부딪쳤다.
“크윽!”
몸을 몇 바퀴 굴린 카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하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해서,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마치 용암 지대에서나 볼 법한 검붉은 바닥.
그리고 생기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풍경과 잿빛의 하늘뿐.
“여긴…… 대체 어딜까요.”
카이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유하린이 아닌, 시스템 메시지였다.
띠링!
[마계에 입장하셨습니다.]
[플레이어 중 최초로 마계를 발견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스탯 포인트를 35개 획득했습니다.]
[파티장인 카이가 스페셜 칭호, ‘마계를 발견한 자’를 획득했습니다.]
[파티원인 유하린이 스페셜 칭호, ‘마계 탐사대원’을 획득했습니다.]
[마계는 나약한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살고 싶다면 강해지십시오.]
[세 달 동안 획득하는 경험치가 세 배, 드랍률이 두 배 증가합니다.]
[중간계와의 연결이 끊깁니다.]
왜일까? 문득, 귀여운 여신님이 해주셨던 말이 떠오른다.
-악마족들이 거주하는 지옥의 땅 마계.
-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지독한 공간이다. 싸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싸움으로 하루를 마치는 이상한 세계지.
-절대, 절대로 그쪽 동네에는 관심을 갖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