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
힐통령 368화
113. 신세계(3)
“진짜 징하네요, 징해.”
부하의 혀 차는 소리에, 페가수스 사 한국 지부장 강민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징하군.”
단체 야근이 확정된 사무실에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카이와 유하린.
두 사람은 고작 여덟 시간 만에 암흑 지대를 중앙 부근까지 돌파하는 기염을 토해냈으니까.
그것이 최소 2년 뒤에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컨텐츠 개발 부서는 어떻지?”
“아, 그렇지 않아도 미국 본사의 동료랑 연락을 해봤는데, 거기도 말만 자유의 나라지. 단체 야근 확정이라던데요?”
“후우…….”
이번에도 ‘징크스’는 어김없이 발동했다.
카이가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페가수스 사는 뒷수습을 해야 하는 징크스.
때문에 회사에선 카이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항상 초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스팅은 뭘 하고 있지?”
“그 미친 새끼. 기어코 지옥문 열려고 하고있습니다.”
카이보다 더 한 놈이 두 명이나 미친 척하고 미친 짓을 벌이는 중이었으니까.
지옥문.
그것은 유저들의 메인 퀘스트 진행률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등장시킬 계획이었다.
‘뮬딘 대 인간 대 마족.’
마치 옛 삼국지의 위, 촉, 오처럼 멋진 삼파전을 일으킬 비중있는 메인 시나리오였다.
허나 그것이 틀어져버렸다.
‘따지고보면 이것도 카이 때문이긴 하지.’
태양의 사제로 전직한 카이는 번번히 뮬딘 교의 행사를 방해하면서, 그들이 힘을 회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뮬딘 교의 아트록 추기경이 마왕 추종자가 손을 잡는 말도 안 되는 일로 이어졌다.
“그것 때문에 추후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랑 대사들 싹 다 고치는 것만 해도 머리 아픈데…….”
이번에는 무려 지옥문이다.
저게 열리면 그때는 단순히 퀘스트 좀 고치고, 대사들 뜯어고치는 것으로는 수습이 안 된다.
“제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번만큼은 본사 결정이 틀린 것 같네요. 그러게 신화 등급 클래스 조건을 왜 하향시켜 줬답니까?”
“……그러게 말이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막대한 힘이 주어지자, 그들은 그 권리를 일으켜 패악을 일삼았다.
‘악행 스탯과 마기 스탯을 올리기 위해 대학살을 일으키는 쓰레기들이라니.’
그들은 게임사의 입장에서 봐도 그렇지만, 일개 유저의 눈으로 봤을 때도 변함없는 쓰레기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 그중 한 놈이 명을 달리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제 골리앗이 끝났다는 것이겠네요.”
골리앗.
그가 카이에게 1초 컷을 당하면서 무대에서 퇴장했다.
“골리앗은 확실히 끝났다.”
강민구가 부하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일반적인 유저였다면 초보자가 되어도 새로 전직을 해서 정상적인 플레이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골리앗, 네놈은 너무 설쳤어.’
문제는 그가 페가수스 사를 상대로 빅엿을 제대로 먹였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NPC 대학살이라는 최악의 문제로 말이다.
“아마 게임 속에서 한평생 쫓기면서 살아가게 되겠죠?”
“그렇겠지.”
현재 그의 악명은 높을 대로 높아진 상태여서 각 제국과 왕국에 수배가 내려진 상황이다.
그 빡센 추격은 절대 전직도 못한 초보자가 뿌리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다.
‘인벤토리에 있는 골드와 값비싼 장비들을 현금화하지도 못하고 평생 감옥에서 썩겠어.’
당연한 말이지만, 페가수스에서는 그를 철저히 모니터링해서 십 원짜리 한 장조차 현실로 가져가지 못하게 할 셈이었다.
말 그대로 실패한 악당에게 걸맞는 최후다.
“오늘만큼은 카이가 미워 보이지 않네요. 아니, 야근을 하니까 그래도 미워해야 하나?”
그것이 오늘 페가수스 직원들이 그들을 번번이 물 먹였던 카이를 응원하는 이유였다.
사실 페가수스 입장에서는 셋 다 게임의 근본을 무너트리는 놈들이었지만, 적어도 카이는 눈살 찌푸려지는 짓을 하는 악당은 아니었으니까.
“사장님도 좀 드시면서 모니터링 하시죠?”
“난 괜찮아.”
강민구의 정중한 거절에 부하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햄버거의 포장지를 벗겼다.
그리고 그것을 크게 한입 베어 먹으려던 순간, 사건이 터졌다.
“어, 어어! 코드명 Hell Door! 지옥문 열렸습니다!”
“뭐?”
강민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모니터를 노려봤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대악마가 소환하는 마법진은 발동하지 않았다.
“제물이…… 조금 부족한 것 같습니다.”
“휴우. 다행이네요.”
“와, 게임 망하는 줄 알았네요.”
“하아…….”
정말 다행이다.
만약 대악마가 소환되었다면, 일반 유저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악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회사 입장에서도 끔찍한 일이었겠지.’
대악마의 힘은 일반적인 유저나 NPC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만약 녀석이 작정하고 게릴라전을 펼친다면, 엄청난 피해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뜻.
‘그렇게 되면 죽임을 당한 유저들이 욕을 하면서 게임을 접어도 할 말이 없어.’
오히려 페가수스 사에서 막대한 피해보상을 토해내야 했을 터.
모니터링을 하던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얼싸안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 때였다.
“어? 카이가 사원에 진입했습니다!”
“뭐? 벌써?”
“이 녀석 진짜 괴물은 괴물이네. 뮬딘 교 병력 싹 다 뚫고 들어왔어.”
부하들의 잡담에 강민구가 팔짱을 끼며 물어봤다.
“카이와 유하린이 스팅과 조우하기 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
“글쎄요. 아무리 두 사람이어도 이건 시간이 좀 걸릴 걸요? 애초에 암흑 지대의 사원 자체가 거대한 던전처럼 모델링 된 공간이라서…….”
“흠. 사원 내부의 모든 뮬딘교 군은 스팅이 제물로 바치긴 했는데, 그걸 감안해도 42종의 함정을 뚫으려면, 아무리 저 두 사람이라도 함정 해제 스킬이 없는 이상…….”
콰르르르르릉!
안타깝게도 카이는 뒤가 없는 남자였다.
바닥을 그대로 뚫어버린 그의 과감함과 비상식적인 행동에 직원들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동시에 강민구가 지시했다.
“변수 파악해. 스팅이 이겼을 경우와 카이가 이겼을 경우. 어떤 경우가 우리에게 이득이지?”
“어…….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스팅이 이길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합니다.”
“그리고 현재 입장만 보면 카이가 이기는 편이 낫죠. 스팅이 미친 척하고 밖으로 나가서 제물을 더 끌어오면 대악마가 진짜 소환되어 버릴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강민구가 한시름을 놓았지만, 그는 ‘카이 징크스’를 너무 얕보았다.
“어? 이, 이런 미친!”
“스팅이 제물이 되서…… 지옥문 열립니다!”
“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 정도만 열렸어요.”
“제물이 여전히 부족합니다! 대악마가 밖으로 나오지는 못해요!”
모니터링에 온갖 숫자가 떠오르고, 붉은 빛이 번쩍거렸다.
지금 수준에서는 절대 열리지 말았어야 할 코드들이 대량으로 풀려났다는 뜻이었다.
그 잠깐의 태풍이 지나간 후.
사무실의 직원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직 상황 파악이 끝나지 않은 강민구만이 입을 열었다.
“지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카이와 유하린은?”
“끄, 끌려갔습니다.”
“뭐?”
“마계에 끌려갔어요.”
“덕분에 지옥문이 닫히기는 했는데…….”
직원들이 강민구를 쳐다보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사장님. 혹시……. 혹시 말입니다. 카이랑 유하린이 마계의 추후 콘텐츠를 싹 다 독식해 버리면 어떡하죠?”
“재, 재수없느 소리!”
강민구가 일갈을 내질렀으나, 그의 등도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상태였다.
‘저 두 사람이라면 정말 저질러 버릴지도 모르는데…….’
다급해진 강민구가 정보를 요구했다.
“마계에 대한 정보를 싹 다 모아. 현 시점에서 유저가 마계에 진입할 시 어떤 일이 일어나지?”
“어……. 우선 스페셜 칭호, 마계를 발견한 자를 얻을 겁니다.”
“그리고 레벨도 오를 거예요. 아마 카이 기준에서는 5레벨은 오르지 않을까요?”
“아! 게다가 능력들도 조금 봉인될 겁니다.”
“아마 바로 인간계로 넘어오지는 못할 거예요.”
“그리고 인간의 냄새를 맡은 악마들이 그들을 방문할 겁니다.”
부하들의 연이은 보고를 듣던 강민구가 고개를 휙 돌리며 질문했다.
“잠깐. 인간계로 바로 넘어오지 못한다니? 그 녀석에겐 신출귀몰이 있다.”
신출귀몰.
헬릭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대리자에게 제멋대로 만들고 유포해 버린 최악의 스킬.
한 번 방문한 장소라면 어디든 재방문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닌 스킬이다.
“아, 그게요. 마계는 우선 신성력과 마나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게다가 유저들이 마계 대륙 방문하는 시기가 플랜 상으로는 못해도 3년 뒤로 잡혀 있어요.”
“마계에 진입하면 각종 스킬과 능력들이 봉인되고, 페널티를 받거든요.”
“그 말은…… 신출귀몰도 페널티를 받아서, 카이와 유하린이 당분간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인가?”
“예. 어쩌면 거기서 죽을 수도 있죠.”
직원들의 보고를 듣던 강민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우리의 손을 떠난 일이니 어쩔 수 없군. 그리고 본사 직원들에게 싹 다 메일 보내.”
“무슨 내용으로 뿌릴까요?”
“각종 매체와 기자, 유저들이 두 사람의 행방을 물어도 절대.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
[충격! ‘카이와 유하린’ 랭킹표에서 사라져.]
[페가수스 사 입장 표명. ‘그저 오류가 아니라는 것만 말할 수 있어’]
[사상 초유의 사태! 과연 두 사람의 행방은?]
커뮤니티에선 난리가 났다.
전체 랭킹 1위와 3위.
최상급 랭커 두 사람이 한날한시에 랭킹표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저들의 의견 또한 분분했다.
-내가 아는 형한테 들었다니까? 둘이서 캐삭빵 뜨다가 무승부 떠서 동시에 삭제한 거라던데.
└네 다음 카더라 통신.
-위엣 분 허풍이 심하시네. 제 친구의 친구가 페가수스 직원인데, 둘이서 눈 맞아서 같이 사랑의 도피 한 거래요. 캐릭터도 삭제하고.
-아니, 댓글창 수준 무엇? 신춘문예판인 줄.
-흠. 소문은 무성한데 그 끝은 거의 다 비슷하네. 결국 두 사람이 캐릭터를 삭제했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갑자기 랭킹에서 사라질 리가 없지.
└이게 신빙성이 있는 게, 전체 랭킹은 비공개도 안 되거든. 목록에서 없으면 그냥 그 캐릭터가 없는 경우밖에 없지.
-저희 언노운님이 캐릭터를 삭제하실 리가 없습니다ㅠㅠ
지금 이 상황은 호사가들에겐 그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현재 상황을 추리하고 있는 한 편.
이 일을 통해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크리스였다.
“어라……. 자고 일어나니까 랭킹 1위네.”
크리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랭킹표를 수십 번이나 스크린 샷으로 찍었다.
혹시라도 이게 단순한 오류라면, 자신이 다시 2위로 내려갈 테니까.
“흠.”
잔뜩 신난 크리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자칼, 아니 고스트가 침음을 삼켰다.
‘카이님이 캐릭터를 삭제했다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투기장에서 한 달 남짓 관찰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렇게 무책임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지금 카이님이 캐릭터를 삭제하면 그가 다스리는 라시온의 동부 지역은 물론, 수많은 아인종들이 허공에 붕 떠버린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버리고 캐릭터를 삭제했다?
고스트는 다시 한 번 그럴 리 없다는 쪽으로 무게 추를 기울였다.
동시에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군.’
랭킹 1위와 3위가 사라졌다.
그중에서 카이는 게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펼치던 사람이다.
당연히 그의 빈 자리를 노리는 이들도 하나둘 나타날 것이다.
‘카이님이 지닌 권력과 땅을 원하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고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망토를 걸쳤다.
“이 시간부로 회원들에게 전부 대기 발령 내려.”
“예? 그게 무슨…….”
초유의 사태에 부 회장이 깜짝 놀라 묻자, 고스트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 감이 맞다면, 당분간 바빠질 거다.”
그때 누군가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네르바 :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세계 8대 길드 중 하나인 프레이 길드의 마스터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굳이 상대해줄 필요는 없겠지.’
고스트가 손을 휘저어 메시지창을 닫으려는 순간, 추가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네르바 : 카이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어요. 약속 지키라고 하시던데요.]
그 순간 움직임을 멈춘 고스트는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의 예상대로, 바쁜 일이 생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