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
힐통령 370화
114. 광산(1)
“그, 그런데 갈수록 많아지네요?”
유하린이 사방을 둘러보며 살짝 위축된 목소리를 뱉어냈다.
아닌 게 아니라, 마계에서 보기 드문(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는) 인간의 등장에 주변의 악마란 악마는 죄다 몰려온 듯한 기분이다.
그 수가 무려 이백을 넘어섰는데, 우습게도 동일한 개체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이건……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이제 와서요?!”
유하린이 발을 동동 구르자 카이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웃었다.
“농담이죠. 질 자신이 없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입고 있던 옷을 성의 니케로 바꾸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트 : 사도의 길]
사도의 성물 세 개를 모두 장착할 시 효과 적용.
모든 스탯 +100 상승.
신성력을 소모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 +30%.
모든 스킬의 신성력 소모량 -30%.
모든 스탯의 상승과 신성력 스킬의 소모량 감소, 효과 대폭 증가.
게다가 세 개의 성물에 달려 있는 악마/언데드 공격 시 추가 데미지를 모두 합하면 50%.
‘그리고 여기에 마계를 발견한 자의 칭호까지.’
마계에서의 모든 능력치가 50% 상승한다.
이것으로 끝이냐고?
천만에.
‘그리고 기본적으로 신성력을 쓰는 직업군은 뮬딘 교나 악마, 언데드에게 50%의 추가 데미지를 입힐 수 있어.’
안 그래도 스탯이 괴물 반열에 접어든 카이였다.
하지만 인간계에서의 강력함은, 그가 마계에서 선보일 수 있는 힘의 반절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카이는 가볍게 걸음을 내딛었다.
괴물 같은 스탯을 한 몸에 우겨넣은 몸 치고는 굉장히 가뿐한 발걸음이었다.
“크를르르르!”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눈이 달랑 하나 달려 있는 집채만한 괴물이었다.
녀석이 달려들자 다른 악마들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녀석인가?’
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광휘의 검.”
마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태양의 기운이 성검을 물들였다.
그 검은 곧장 코뿔소처럼 달려드는 악마를 향해 드리워졌다.
“횡 베기.”
문자 그래도, 좌에서 우로 그어지는 정직한 검격.
그 공격 한 번에 외눈박이 괴물의 다리 여덟 개가 모두 잘려나갔다.
“키에에에엑?!”
먹잇감이라고 생각했던 존재의 힘이 상상이상으로 강력하다.
다리를 잃고 무게 중심이 흐트러진 악마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콰드드드드득!
녀석의 거대한 몸은 정확히 뒤쪽에 있던 유하린의 앞에 멈춰 섰다.
“마무리 좀 해주세요.”
“네…… 아, 네!”
허둥지둥 검을 뽑은 유하린이 에잇! 괴물의 외눈을 찔러 마무리를 했다.
“캬아아아아아악!”
외눈박이 괴물이 죽기 전 내지를 단말마, 그것은 일종의 신호가 되었다.
“…….”
“…….”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몰려들던 악마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 그들 중 일부는 미련이 없다는 듯 아예 자리를 떠났다.
단 일격으로 이 자리의 포식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준 카이는 스윽. 주변을 둘러봤다.
그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악마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그렇구나. 외눈박이 녀석이 가장 강했던 게 아니야.’
녀석은 일종의 총알받이였던 것이다.
외눈박이의 죽음으로 자신의 실력이 드러나자, 머리가 있는 녀석들은 죄다 자리를 떠났다.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이도저도 못하는 조금 덜 떨어진 녀석들뿐.
‘애초에 마계란 이런 곳이라고 했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빈틈을 보여주면 미친듯이 달려드는 악마들이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반대로 절대적인 힘을 보여주면 누구도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한다.
‘지금 남아있는 녀석들의 평균 레벨은 660정도인가.’
이 녀석들이 마계의 정예일 리는 없다.
오히려 외눈박이가 죽자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난 악마들이 진짜 강자들일 터.
“뭐, 사냥하다 보면 녀석들과도 만나게 되겠지.”
카이는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여유롭게 걸음을 내딛었다.
“……!”
“크, 크르륵?”
움직이는 악마들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움직일 수 있는 악마들이 없었다.
“중력장은 여덟 배 정도면 충분한가.”
푸른빛이 일렁이는 카이의 눈동자는 새로운 경험치들을 탐스럽게 훑었다.
***
“와, 경험치가 이렇게 잘 올라도 괜찮은 걸까요?”
유하린이 국자를 휘휘 저으며 잔뜩 신난 목소리로 묻자, 카이가 대꾸했다.
“뭐, 그건 개발자들이 생각할 문제죠.”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은 정확히 악마 23마리를 사냥하고 각각 3레벨 씩 올랐다.
그것은 적들의 레벨이 높은 이유도 있었지만, 마계 최초 발견자 버프 덕분에 세 배의 경험치를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보글보글.
유하린은 보라색 기포가 터져 나오는 수프를 저으며 해맑게 웃었다.
“시장하시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밥 해드릴게요.”
“아니…… 그런데 그거 먹어도 되는 거 맞습니까?”
현재 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것은 방금 전 그들이 사냥한 악마들 중, 소 모양을 하고 있던 녀석의 고기였다.
“괜찮을 거예요. 소고기잖아요.”
눈이 열두 개 달려 있고, 뿔이 여섯 개 나있다는 점에서 이미 일반적인 소는 아닐 텐데.
“그리고 저 요리 스킬 중급 4레벨이에요. 전 정말 자신 있어요.”
제가 자신이 없습니다. 그걸 먹을 자신이.
하지만 카이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열심히 사냥했다고 음식을 해주겠다는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게다가 자신에게는 포이즌 마스터 스킬도 있으니 먹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음! 맛있네요.”
국자에 담긴 수프를 살짝 맛보던 유하린이 활짝 웃었다.
그녀는 이내 인벤토리에서 그릇을 꺼내 수프를 담더니, 숟가락과 함께 내밀었다.
“드셔보세요.”
“……평소에 식기까지 일일이 챙겨 다니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솔플하는 사람이니까요. 한 번 사냥하러 나가면 최소 열흘은 마을에 못 돌아가잖아요? 결국 자급자족하는 수밖에 없죠 뭐.”
카이는 항상 돈으로 음식을 빵빵하게 준비하던 과거를 반성했다.
‘그러고 보니 하린 씨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지.’
예전에 타락의 성지를 함께 공략하면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온갖 스킬을 둘둘 배우고 있다는 것을.
재봉, 요리, 제련, 수리, 약초학과 연금술…….
남들이라면 한 번에 하나 이상 배우지 않는 것들을 그녀는 가리지 않고 터득한 상태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카이는 그릇을 받으며 피식 웃었다.
“왠지 하린 씨는 망치랑 못만 드리면 집도 만드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음…… 현실에서는 못하지만 게임에서는 할 수 있어요. 저 건축 스킬 초급 9레벨이거든요.”
“……아니, 건축 스킬은 또 왜 배우셨습니까?”
“야영을 하다보니까, 침낭에서 자는 것보다는 간단한 거처가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아서…….”
네, 제가 졌습니다.
카이는 그녀답다는 생각을 하며 보라색 수프를 한입 크게 퍼먹었다.
“음……?!”
한 입을 먹어보던 카이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연거푸 세 숟가락을 입 안에 쑤셔넣었다.
“마, 맛이 어떠세요?”
유하린은 마치 마스터셰프 코리아에 출전한 참가자라도 되는 양 잔뜩 긴장해서 물었다.
이에 카이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얘기했다.
“맛있네요. 아니, 그것보다 이거 설렁탕 맛 나는데요?”
“그쵸? 맛있다니까요.”
“솔직히 색깔이 너무 보라색이라서 뭔가 독 같이 느껴졌는데, 먹어보니까 맛있네요.”
밥이랑 김치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은데.
카이가 아쉬운 마음을 삼키자, 유하린이 인벤토리를 슬쩍 열면서 물었다.
“혹시 밥이랑 김치는 필요 없으세요? 있는데…….”
“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시시 웃은 그녀는 밥 한 공기와 먹음직스러운 김치를 꺼내놓았다.
“요즘 수도에는 한국 반찬집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가끔 사먹어요.”
“최고로 맛있습니다.”
보라색 설렁탕과 흰 쌀밥, 그 위에 얹은 아삭아삭한 김치까지.
카이와 유하린은 황홀한 식사를 마쳤다.
***
“동쪽과 북쪽이 심상치 않습니다.”
“천박한 것들. 허구한 날 싸움질이라니, 대악마의 기본 소양조차 겸비하지 못했구나.”
고블린 악마의 보고를 듣던 미남자가 와인잔을 우아하게 흔들며 말했다.
“뭐, 그래봐야 이번에도 어깨에 힘만 잔뜩 주고는 스리슬쩍 없던 일로 만들겠지.”
“그게…… 이번에는 다른 것 같습니다. 두 대공 모두 휘하의 군단장들을 전선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 말에 백옥의 피부를 지닌 미남자가 눈을 반짝였다.
“호오? 진짜 전쟁이라도 치룰 셈인가?”
“현재 상황만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겁쟁이들이 웬일로…… 그렇다면 서쪽의 반응은 어떻지?”
“저희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았으니 우선 지켜보자는 생각 같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중앙의 그년은?”
그 질문에 고블린 악마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그, 그분께서는 미동조차 없으십니다. 언제나 그렇듯, 중앙의 고성에 칩거해 계십니다.”
“쯧. 이래서 감정기복이 심한 노처녀는……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도 까는 법.
미남자는 중앙의 대악마를 떠올리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되었다. 당분간 북쪽과 동쪽, 서쪽의 감시 체계를 강화해라.”
“알겠습니다.”
“곧 수확의 시기인데, 광산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대부분의 광산들은 수확량을 맞출 것 같습니다. 다만…….”
고블린 악마가 미남자의 눈치를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몇몇 광산에 해방군이 또…….”
“뭐?”
미남자의 고운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 미친놈들은 시대가 어느 때인데…….”
“죄, 죄송합니다. 최대한 신속히 배제하겠습니다.”
“자네가 미안할 게 무엇이 있나. 모두 우매한 그놈들의 잘못이지. 안 그러나?”
반달처럼 곱게 휘어진 눈을 마주한 고블린 악마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저 눈웃음이 기분이 좋아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 제가 관리를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
“하하하. 그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빙그레 웃은 미남자가 고블린 악마를 격려했다.
“실수해도 좋아. 실수해. 살다보면 실수도 하고 그래야 또 악마미가 느껴지는 거 아니겠나.”
“예, 예에…….”
“그런데.”
미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웃음 사이로 엿보이는 눈동자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도 아는 녀석이 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그건 무능한 거겠지?”
“무, 물론입니다.”
“그래그래. 나 말은 안 해도 자넬 항상 믿고 있어.”
미남자는 웃는 낯으로 부하를 응원했지만, 고블린 악마는 그를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와인잔에 담겨있는 붉은 액체는, 불과 이틀 전에 목이 달아난 선임의 피였으니까.
“그, 그리고 또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흠? 뭔가.”
“인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말에 미남자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간? 내가 아는 그 인간이 맞는 건가?”
“예. 중간계에 거주하는 그 인간들이 맞다고 합니다.”
“그건…… 놀랍군. 어떻게 인간이 마계에 올 수 있는 거지?”
“자세한 사항은 모르겠으나, 상당한 실력자들이라고 합니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입니다.”
“그래봐야 아랫것들 수준에서 상당한 실력이겠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당장 끌고 오겠습니다.”
“으음, 아니야아니야. 우선 놔둬라.”
미남자는 와인잔을 한 입에 마시고는 입술을 혀로 닦았다.
그의 얼굴 위로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재미있는 게 생각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