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1
힐통령 381화
116. 마계 화타(3)
유하린은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 잘 부탁한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와 자신이 오늘부터 새로운 관계에 돌입했다는 것을 뜻했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다.
“아, 그리고 사실 저는 성기사가 아니고 사제입니다.”
“네?”
“직업 말이에요. 하린 씨니까 특별히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제시라구요?”
“예.”
유하린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님이라면 그러실 수도 있지.’
워낙 유능하신 분이니까.
동시에 유하린은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그래도 이제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되어서 저런 비밀도 말씀해 주시는구나.’
뭔가 조금 전과 크게 바뀐 것은 없다.
그저 카이님과 자신의 관계가 더 깊어졌을 뿐.
하지만 괜히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그럼 저도 카이님이 만든 독 나눠주러 가볼게요.”
“네. 그럼 나중에 뵐게요.”
“네에…… 나중에…….”
유하린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 나갔다.
***
“흠.”
카이는 행복해 보이는 유하린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업을 말씀드린 게 저렇게도 기쁘신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청 행복해 보인다.
‘뭐, 하린 씨가 기분이 좋다면 좋은 일이겠지. 역시 말씀드리길 잘했네.’
뿌듯한 표정을 지은 카이는 악마들이 치료되는 것을 제법 오래 지켜보았다.
“내가 만들었지만 효과 한 번 기가 막히다니까.”
악마들을 괴롭히던 악성 독감을 단번에 죽여 버리는 강력한 독이다.
심지어 몸의 면역력을 높이고, 고통까지 잠재워주는 만능 독!
‘대상이 악마족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깝긴 하네.’
만약 복용자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장기가 모두 녹아내려 죽었을 테니까.
“정말 고맙다, 카이.”
환자들의 치료가 얼추 다 끝나자, 카즈라가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 그 말 참 자주 듣네.”
“몇 번을 말해도 이 마음이 옅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고마우니까.”
“그럼 이제 해방군을 속 썩이던 문제는 끝난 건가?”
“가장 큰 문제는 사라진 셈이지. 눈을 감아봐라.”
카즈라가 자신의 눈을 감으며 말했다.
카이가 눈을 감자,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무슨 소리가 들리나?”
“……조용한데?”
마계는 원래 조용한 곳이다.
때문에 카이는 천천히 눈을 뜨며 물었다.
“마계는 원래 조용한 곳이잖아.”
그 질문에 카즈라는 악마답지 않게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마계의 모든 지역이 조용해도, 엘리시온만큼은 아니었다. 꿈과 희망의 땅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눈만 감으면 환자들의 신음과 비명이 귓가를 울리던 곳이었지.”
“아…….”
카이는 자신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시끄럽던 분위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네가 바꿔주었다. 해방군의 일원으로써 그대에게 경의와 감사를 다시 한 번 표한다.”
카즈라가 다시 한 번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
“…….”
길을 오고가던 악마들이 그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러기를 잠시, 그들은 카즈라와 마찬가지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하나둘 고개를 숙였다.
본인들의 자존심이자 생 그 자체인 뿔의 위치를 낮추고, 카이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아, 이 분위기는 마치…….’
카이가 옆머리를 긁적거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위대한 업적! 마계의 해방군 단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신성력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사제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허나 성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새로운 방법을 찾더라도 환자를 치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당신은 출신과 성분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공명정대하게 치료하였습니다.]
[헬릭이 종족을 뛰어넘은 당신의 박애주의에 박수를 보냅니다.]
[선행 스탯이 50만큼 증가합니다.]
[태양 목격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선행 스탯이 추가로 25만큼 증가합니다.]
[스페셜 칭호, ‘마계 화타’를 획득했습니다.]
무려 75의 선행 스탯 증가.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르네.’
악마들을 치료해서 명예와 태양교 공헌도가 낮아질 각오까지 하고 있던 카이였다.
종아리를 맞을 줄 알았는데 상을 받게 되자 솔직히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마계 화타는 또 뭐야.’
도감을 펼쳐 이를 확인했다.
[마계 화타]
등급 : 스페셜
내용 : 마계에서 뛰어난 의원으로 이름을 날린 자에게 주는 칭호.
효과 : 모든 치료 스킬의 효과 1.5배 증가(이 효과는 칭호를 장비하지 않아도 적용됩니다.)
‘호오?’
모든 치료 스킬의 효능 증가.
이것은 힐러에게는 최고의 포상이나 다름없었다.
***
“악! 악!”
“퇴근…… 퇴근하고 싶다…….”
놀랍게도 이 비명이 터져 나오는 곳은 페가수스 본사의 개발팀이었다.
카이와 유하린이 마계에서 아주 멋지게 날뛰어준 덕에, 그들은 지옥 같은 나날들을 보내는 중이었다.
“젠장, 대공 키네사가 죽었다면 남부 쪽 퀘스트는 모두 어떻게 되지?”
“사실 대공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퀘스트는 몇 개 없으니까 그건 문제가 안 되는데…… 남부라는 세력 자체가 무너진게 너무 대형 사고야. 그것 때문에 퀘스트만 수천 개가 증발했으니까.”
“후. 그럼 마계 쪽 메인 퀘스트인 ‘악의 대공들’도 깨지는 건가?”
“그건 우리의 슈퍼 A.I 라무스 님이 수정해 놨겠지.”
“후, 마계의 4대공이 3대공으로 바뀐 거니…… 파장이 없을 수는 없겠어.”
“두려운건 카이가 또 무슨 미친 짓을 할 지 모른다는 거겠지. 대공을 한 번 죽였으면, 다른 대공도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끄응…….”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윗선에 우는 소리를 했다.
물론 엄살 따위가 아니었다.
기껏 짜놓은 시나리오의 일부분이 뭉텅 사라져 버렸는데 어느 개발자가 이를 반길까.
결국 상황을 보다 못한 마르코 사장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거 상황이 아주 골치아프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
페가수스 사의 개발팀장들과 이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 박사, 마계 쪽 컨텐츠는 원래 2년 후. 그러니까 유저들의 평균 레벨이 700을 넘기면 열리게 되어있지요?”
“예. 마계가 중간계를 침공하면서 차원이 합쳐지도록 설정해 놨죠. 중간계에 온 악마족들의 힘이 60% 가량 감소된다는 설정으로 말입니다.”
“후. 지금 엔딩 컨텐츠나 다름없는 대공 중 하나가 죽었습니다. 심지어 60% 너프를 받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모두 저희가 자초한 일입니다.”
짐 박사의 얼굴 위로 그득한 후회의 감정이 떠올랐다.
“일전에 카이를 견제하고자 신화 등급 전직 퀘스트를 하던 골리앗과 스팅을 도와준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랬죠.”
“저희가 그때 손을 쓰지 않았다면, 마계가 열리는 일도 없었겠지요.”
“끄응.”
한 마디로 종두득두(種豆得豆).
뿌린대로 거둔다는 소리였다.
“우울한 소리는 집어넣고. 대책이나 강구해봅시다. 카이를 어떻게든 설득시켜야 하니까.”
“결국 물질 만능주의 세상 아니겠습니까.”
이사 하나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살면서 돈 싫다는 사람 못 봤습니다. 카이의 손에 엄청난 돈을 쥐어주면 어떻겠습니까.”
마르코 사장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네 카이의 재산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나?”
“……예?”
“그의 인벤토리에 잠들어있는 골드의 가치만 수억 달러다. 한국의 강 사장이 사정사정을 해서 겨우 환전을 막아놓은 상태지. 그가 마음만 먹으면 수억 달러의 재벌이 되는 것과 동시에, 게임의 경제 밸런스를 망가트릴 수 있어. 그런 사람을 돈으로 매수하자? 제정신인가?”
“죄, 죄송합니다.”
이사가 본전도 못 찾고 꼬리를 말자, 너도나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연 것은 마르코였다.
“젠장, 결국 카이가 이렇게 나올 수 있는게 모두 목격자 칭호 때문 아닌가?”
“맞습니다. 그거 한 번에 밸런스가 확 무너졌지요. 본래 태양의 사제는 후반부로 갈수록 선행 스탯을 올리기가 까다롭기에, 전형적인 서포터로써 활동하도록 설정된 직업입니다.”
“그 부분을 조정할 순 없겠지?”
“저라도 거절할 겁니다. 억만금을 쥐어주더라도 안 받아들이겠지요.”
“미치겠군.”
결국 긴 회의 끝에 나온 결론은 간단했다.
“……일단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해 봐야겠군. 통역사 한 명 구해주게.”
직접 찾아가서 우는 소리를 해보자고.
***
“얘들아, 감사히 잘 먹었다고 인사해야지?”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진짜 맛있었어요!”
하루동안 잘 놀고, 맛있는 식사까지 마친 보육원 아이들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항상 헤어질 시간이 되면 꼭 느끼는 감정이 있다.
우물쭈물.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제 소매만 만지작거리는 아이들.
그 사소한 행동에서 정우와 하린은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두 사람은 억지로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음에 또 올테니까, 그때까지 원장님 말씀 잘 듣고 있어야 된다?”
“……진짜 또 오실거예요?”
“아구구, 물론이지. 원장님한테 전화 드려서 여쭤보고, 말 잘 듣고 있으면 또 올 거야.”
유하린이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 달려드는 아이들을 토닥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정우는 보육원 원장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정말 뜻깊고 좋은 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저희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그리고 원장님만 한가요 뭐.”
서울 근교의 보육원을 돌며 후원을 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주는 일.
듣기엔 쉬워보이지만 꾸준히 하기 위해선 봉사 정신이 강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도 뜻 깊은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날이 어둑어둑해진 뒤에야 보육원을 나섰다.
“후우. 올해는 진짜 덥네요.”
뉴스에 의하면 역대급 폭염이란다.
정우는 괜히 고개를 돌려 보육원을 쳐다보았다.
“……애들이 더위 먹으면 안 될 텐데.”
“후원금으로 에어컨 빵빵하게 트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언덕길을 내려가는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주제는 정해져있지 않았다.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거나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게 전부였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재미있지 않으세요?”
“뭐가요?”
“몇 시간 전만 해도 엘리시온에서 같이 짐 정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또 현실에서 이렇게 만나고 있잖아요.”
“음, 재미라기보다는…… 요즘 하린 씨랑 너무 붙어 다녀서 그런가? 같이 있는게 당연한 것 같은데요. 없으면 허전할 것 같기도 하고요.”
“아으…….”
유하린은 뭐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다 하냐는 듯 정우의 팔을 콩 때렸다.
‘난 몰라!’
이렇게 심장이 간질간질해지는 말을 잘 하는 남자였나?
하린은 괜히 손가락을 배배 꼬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두 사람의 앞으로 고급스러운 흑색 세단이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선글라스와 정장을 입은, 누가 봐도 경호원인 사람이 뒷좌석을 열자.
백색 정장을 입고 있는 인물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유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정우 씨. 이 사람…….”
“……맞죠? 마르코 프레드릭.”
미드 온라인을 만든 굴지의 소프트웨어 사, 페가수스를 지휘하는 젊은 사장.
그는 격식 있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안뉘엉하세효. 초움 뱁껬습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