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
힐통령 382화
117. One Way(1)
마르코의 입에서 한국어가 나올 줄 몰랐던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한국어도 할 줄 아세요?”
정우의 질문에 마르코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합니다. 사실 할 줄 아는 한국어는 방금 전에 했던 말이 전부라서.”
그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통역 좀 부탁하지.”
자동차에서 한 명의 여인이 더 내렸다.
마르코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젊은 미녀였다.
그녀는 두 사람을 향해 절도있게 인사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마르코 프레드릭 사장을 수행 중인 비서, 플로라입니다.”
다분히 업무적이고 쌀쌀한 목소리였다.
“예,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여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정우와 하린이 마지못해 인사하자, 플로라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겠지만 두 분, 혹시 저희에게 시간을 좀 내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제안에 승낙하자, 세단 한 대가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려와 두 사람을 태웠다.
그렇게 이동한 장소는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천화 호텔이었다.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
그곳으로 안내된 두 사람은 독립된 방으로 들어섰다.
“음?”
“어라.”
안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비단 마르코 프레드릭만이 아니었다.
“……어서오시게.”
가상현실게임 미드 온라인이 존재 가능한 가장 큰 이유.
슈퍼 A.I 라무스를 설계한 짐 박사 또한 마르코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준 두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마르코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정우는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물었다.
“솔직히 갑작스럽군요. 무엇을 위한 자리입니까?”
플로라에게 통역을 전해들은 마르코가 빙그레 웃었다.
“하하, 역시 카이…… 아니 정우 씨 답다고 해야될까요?”
그가 플로라에게 손짓했다.
“플로라. ‘그걸’ 가져와주게.”
“예.”
플로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잠시 후 건장한 사내가 제법 커다란 가방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살짝 긴장한 정우는 그를 경계하며 안쪽에 위치한 유하린을 은근히 보호했다.
허나 사내는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더니 다시 방을 나가 버렸다.
딸깍!
짐 박사가 능숙하게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노트북……?”
가방 안에서 나온 내용을 보던 정우가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우우웅.
노트북처럼 생긴 장치의 전원을 켠 마르코가 말했다.
“노트북이 아닙니다. 일종의 통역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의 유창한 한국어에 정우와 하린이 다시 한 번 놀랐다.
분명히 아까는 누가 들어도 발음이 엉망이었는데, 지금은 완벽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야. 그는 한국어로 말하지 않았어.’
소리는 통역기라고 불린 기계에서 나왔다.
마르코의 목소리를 똑같이 내보내주었기에 착각을 했을 뿐.
그것을 깨달은 두 사람이 통역기라고 불린 장치를 쳐다보았다.
“미드 온라인에서 전세계 유저들이 아무런 장애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짐 박사의 질문에 정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슈퍼 A.I 라무스. 그 녀석이 모든 유저들의 말을 실시간으로 번역해 주기 때문이지.”
톡톡, 그는 손가락으로 통역기를 두드렸다.
“이 장치에도 라무스의 일부분의 담겨있다. 덕분에 우리가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신기하네요. 시장에 내놓으면 대박칠 것 같은데…….”
“아쉽지만 단가가 안 맞는다. 게다가 라무스를 세계에 공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긴.”
무려 라무스의 분신이 담겨있는 장치다.
이번에 시가 총액만 1,000조를 넘긴 페가수스 사의 보물.
당연히 애지중지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우선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마르코 프레드릭일세. 페가수스 사의 사장입니다.”
“짐 루이스. 라무스의 개발자이자 프로젝트 미라클 드림의 총괄 디렉터.”
“하하, 뭘 그리 어려운 말을 쓰나. 라무스의 아버지라고 한마디 하면 될 것을.”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정우입니다.”
“유하린이요.”
“음음, 알지. 잘 알다마다.”
마르코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마계에 있는 두 사람이 중간계로 넘어가면 나란히 랭킹 1위, 2위가 아닙니까. 저희도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영광이네요. 세계적인 기업의 사장님이 항상 쳐다보고 있다니.”
“무슨 말씀을. 저야말로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조금 흥분되는군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마르코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두 사람을 방문한 이유는…… 마계 때문입니다.”
마계.
그 단어에 두 사람의 눈빛이 확 변했다.
세계적인 기업의 사장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주눅 들지 않는 최상위 랭커의 눈빛이었다.
‘역시 눈빛들이 좋군.’
마르코가 쓴웃음을 지으며 정중히 부탁했다.
“사실 마계는 현 시점에서 이 게임의 엔딩 컨텐츠를 맡고 있습니다. 못해도 2년 후에 열렸어야 할 지역이라는 소리죠.”
“저희를 항상 예의주시하고 계셨다면 알고 계실 텐데요. 저희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닙니다.”
“예…… 그건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르코가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골리앗과 스팅. 두 사람의 신화 직업으로 전직한 사실을 아시죠?”
“물론이죠. 저희 손으로 직접 해치우기까지 했는데.”
“……후우.”
한숨을 내쉬며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마르코를 도운 것은 짐 박사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주름 가득한 얼굴을 숙였다.
“미안하다. 사실 회사 차원에서 신화 등급의 전직 난이도를 대폭 줄였다.”
“……!!”
정우의 얼굴 위로 처음에는 황당하다는 표정이, 그 다음으로는 약간의 분노가 떠올랐다.
“제대로 설명해 주셔야겠는데요. 전직 난이도를 대폭 줄였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마르코가 말을 받았다.
“당시 두 사람은 신화 등급 클래스의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린 그들이 독주하는 정우 님의 대항마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신화 등급 클래스의 조건을 완화시키는 잠수함 패치를 해버렸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정우가 불같이 화를 냈다.
그것은 명백한 사기행위였으며, 게임의 밸런스를 무너트리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페가수스에서 미드 온라인을 오픈할 때 했던 공약을 스스로 깨버렸다는 것, 아십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페가수스 사에서는 미드 온라인의 공개 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대규모 온라인 가상현실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딱 한마디만을 남겼다.
[운영진은 게임에 관여하지 않겠다. 모든 것은 유저들이 만들어가는 세계가 될 것.]
자유.
페가수스는 미드 온라인이라는 세계에 자유를 약속했다.
유저들이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세상.
그것이 바로 미드 온라인이라는 게임이 지닌 유일한 정체성이었다.
“……이 이야기가 사회에 퍼진다면 페가수스 사에서는 엄청난 손실일 거예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하린이 말했다.
허나 마르코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수용했다.
“압니다. 알면서도 말을 꺼낸 것입니다.”
그는 사업가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항상 셈에 밝아야 하며, 시장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업가라면…….’
시장을 빠르게 읽고 돈을 정확하게 세기 이전에.
거래 상대의 마음부터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서로 간에 그 어떤 불신과 오해가 일어나지 않게끔 모든 정보를 오픈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코 프레드릭이라는 인간이 생각하는, 사업가의 기본이었다.
‘거래처 한 사람의 마음도 얻지 못하는 사업가가, 세계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리 없지.’
그는 당당하게 자신들의 치부를 공개했고, 당당하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명백한 저희의 실수였으니까요.”
잠시 동안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짐 박사와 마르코는 마치 죄인처럼 두 사람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혹시…….”
유하린이 입을 열었다.
“제가 신화 등급 클래스를 손에 넣은 것도 그 패치와 관련이 있나요?”
“음…….”
마르코가 짐 박사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짐 박사가 당당하게 말했다.
“알고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는 ‘칼 라샤의 이단심판관’. 즉, 영웅 등급의 히든 클래스를 얻어야했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화 등급 클래스를 얻게 되었지.”
“그러니까 그게 패치 때문이다?”
“본래 칼 라샤의 성기사는 전직 조건이 까다롭네. 칼 라샤의 이단심판관이 먼저 교를 부흥시키면, 훗날 열리게 될 메인 에피소드, ‘잊혀진 신들’에서 칼 라샤의 성기사라는 직업을 입수할 수 있었지. 하나…….”
“교단이 부흥하기도 전에 신화 등급 클래스를 얻었다.”
따지고보면 유하린 또한 그들의 잠수함 패치에 의문의 이득을 봤다는 소리다.
물론 그건 정우의 입장에선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이 문제에 대해선 보상을 받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물론 그래야지요. 저희도 이 문제에 관해선 무조건적인 잘못을 인정하며, 정우 님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겠습니다.”
다행히 마르코는 생각보다 배포가 큰 사람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했으니까.
덕분에 어느 정도 화가 풀린 정우는 보상을 받는 것으로 이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마르코는 제법 높은 산을 오른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앞에 보이는 더 높은 산에 살짝 피곤함을 느꼈다.
“마계 컨텐츠. 미드 온라인의 대미를 장식할 중요한 컨텐츠입니다. 이미 대공 하나를 죽이셨더군요. 남쪽의 키네사 말입니다.”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게임 컨텐츠를 생각해서 제가 죽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거야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금 저희 개발팀은 난리가 났습니다.”
마르코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저희 회사 개발팀 직원들은 정우님을 숙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타도 카이를 외치면서 하루 업무를 시작하겠습니까.”
“예? 그 사람들은 절 왜 그렇게 싫어합니까?”
정우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로 묻자, 마르코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겁니까? 여태 정우 님이 파괴한 퀘스트들을 생각해 보시지요.”
“음,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우선은 오리발 내밀기.
하나 마르코는 생각보다 훨씬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러실까 봐 준비했습니다.”
그는 품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것을 읽어 내렸다.
“인어 족 관련 퀘스트 1,524개. 엘프 족 관련 퀘스트 1,712개. 드워프 족 관련 퀘스트 1,859개, 루시퍼의 사망으로 인해 삭제된 퀘스트가 21개, 지르칸의 사망으로 삭제된 건 총 210개, 조인족 관련 퀘스트 2,108개…… 이외 자잘한 것들과 마계까지 포함하면 총 1만 개가 넘는 퀘스트를 혼자서 삭제하셨군요.”
“…….”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할 말이 없는 정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 있던 유하린조차 그를 힐끗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 이건 좀…….”
연인(골수 게이머, 퀘스트 깨는 것을 매우 좋아함)조차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