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
힐통령 383화
117. One Way(2)
“어흠.”
가벼운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정우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책임을 저에게 묻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은 없었다.
눈앞에서 멸망해가는 NPC들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제가 딱히 버그성 플레이를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 부분은 마르코와 짐 박사도 인정하는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 문제로 정우 님에게 딱히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딱히 악랄한 버그성 플레이를 하신 적은 없…… 아, 딱 한 번 있긴 하군요.”
마법의 소라고둥.
5초짜리 불사 스킬을 무려 일주일짜리 지속형 버프로 만들어주었던 희대의 사기템.
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정우의 입이 합죽이처럼 다물어졌다.
다른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처음부터 노리고 한 것이었으니까.
마르코 사장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물론 그런 부분은 저희가 막아놓았으니까 크게 문제될 건 없겠죠.”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이군요.”
“하지만 만약 두 분이서 다른 대공들에게까지 손을 대신다면…… 게임의 후반부 컨텐츠가 너무 부실해집니다.”
마르코가 절박한 표정으로 정우를 쳐다봤다.
“제발 저희 좀 살려주십시오. 안 그래도 요즘 유저들의 콘텐츠 소모 속도와 레벨 업 속도가 상상을 뛰어넘어서 회사 전체에 비상이 걸린 상태입니다. 계속해서 증축시킨 개발/시나리오 팀만 각각 20팀이 넘어갑니다. 그들은 토요일 휴무까지 반납해가면서 퀘스트 시나리오를 짜는 중입니다.”
“크흠…….”
이렇게까지 말하니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가.
정우는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정확히 원하시는 게 뭔가요, 마계에서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겁니까?”
상대가 거래를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마르코의 눈이 반짝였다.
“허가만 해주신다면, 저희가 두 분에게 버프를 걸어드릴 생각입니다.”
“버프라니요?”
유하린이 물었다.
“남아있는 세 명의 대공과 한 명의 마왕을 서로 죽일 수 없는 버프입니다. 한마디로 두 분은 그들을 죽일 수 없고, 그들 또한 두 분을 죽일 수 없게 되지요.”
“흠. 죽음을 원천 차단하겠다, 이 말씀이군요.”
“예. 두 분의 실력이라면 대공 급이 아닌 이상 죽기도 쉽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신출귀몰 스킬의 쿨타임이 10일가량 남은 걸로 아는데, 마계를 마음껏 여행하시다가 아무때나 중간계로 복귀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라, 다른 악마들은 손대도 괜찮다는 뜻인가요?”
“물론이지요. 대공 급 악마가 아닌 이상, 악마들이 넘쳐나는 것이 마계이니 그건 괜찮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런데…… 저희가 마계 활동을 중지하는 것으로 얻는 이득은 뭡니까.”
가장 중요한 협상의 시간이 왔다.
여기서 두 사람이 만족할 만한 미끼를 던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
때문에 마르코는 그 어떤 때보다 긴장된 표정을 하며 짐 박사를 쳐다봤다.
“그 부분은 짐 박사가 설명해줄 겁니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은 짐 박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양에는 업(業)이라는 단어가 있더군.”
“카르마라고도 하죠.”
“……그래, 업에는 실체라는 것이 없네. 한 인간이 쌓아올린 사소한 행동들이 언젠가 멈출 수 없는 태풍이 되어 되돌아오기도 하는 법이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정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짐 박사를 쳐다보았다.
“서두가 깁니다만.”
“그렇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헬릭의 목숨.”
“……뭐라고요?”
“자네들이 마계 활동을 중지하는 것으로 얻는 이득은 다름아닌 헬릭의 목숨이라네.”
정우의 얼굴이 딱딱해진 것은 물론, 그녀와 친분이 있는 유하린의 미간 또한 찡그려졌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협상을 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마치 협박을 당하는 기분입니다만.”
날카롭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정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니, 아닙니다. 크나큰 오해입니다. 릴랙스!”
당황한 마르코가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끼어들었다.
“짐 박사가 말 주변이 없어서 그런거니 이해해 주십시오. 절대 협박 따위가 아닙니다.”
“그럼 헬릭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게임의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르코가 제발 좀 부탁한다는 표정으로 짐 박사를 쳐다봤고,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다. 시나리오에 다르면 헬릭은 죽는다.”
“태양신인 그녀가 죽는다니요. 대체 누구한테 말입니까?”
“누구겠나. 미드 온라인에서 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은 ‘동등한 격’을 지닌 존재뿐이다.”
“동등한 격이라면 신이겠고…… 설마 뮬딘?”
그것이 정답이라는 듯, 짐 박사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맞다. 뮬딘은 어둠과 파괴의 신. 호시탐탐 헬릭을 죽이고 싶어하는 녀석이지.”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제가 뮬딘 교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 놨습니다.”
“후우. 자그마치 신들의 싸움이다. 신도의 수를 없앤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이야기가 시작된 뒤로, 짐 박사의 얼굴 위에 처음으로 감정이란 것이 떠올랐다.
바로 씁쓸함이라는 감정이었다.
“헬릭이 뮬딘의 손에 의해 죽고, 인간계는 크나큰 혼란에 빠진다. 그것은 미드 온라인의 최종장이자 메인 스트림인 ‘아포칼립스’의 주된 내용이지.”
“무슨 그런 막장 스토리가…… 마계가 떠오르는 것은 그 다음입니까?”
“타임 라인으로 보자면 아포칼립스의 중반부 쯤 되겠군.”
“그럼 잘됐군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 시나리오를 수정해 주시죠.”
짐 박사가 무리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게임은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났네. 자잘한 오류나 밸런스 문제는 어느 정도 손댈 수 있지만, 시나리오는 이미 게임 상에서 정해진 미래이자 운명. 그것을 강제적으로 바꿀 권한은 우리에게 없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정우의 호흡이 저도 모르게 거칠어졌다.
꼬옥.
그런 그의 손을 옆에 있던 유하린이 부드럽게 붙잡았다.
“……후우우.”
덕분에 호흡을 안정시킨 정우는 그녀에게 감사의 눈인사를 보냈다.
“좋습니다. 이해는 했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는건 해결책도 있다는 소리겠지요? 설마 마음의 준비나 하라고 꺼낸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핵심을 찌르는 정우의 질문에 짐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게임의 시나리오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녀를 지키는 방법은 말해줄 수 있지. 물론 그 결과를 비트는 것은 전적으로 자네에게 달려있지만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정우는 마르코와 짐 박사의 제안을 두어 번 정도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협상의 기본이었으니까.
하지만 헬릭이 연관되어 있는 이상, 그런 식의 협상은 무의미했다.
“좋습니다. 헬릭에 대한 정보를 모두 말씀해주신다면 마계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겠습니다.”
“저도 정우님이랑 같은 의견이에요.”
유하린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정우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음, 빙빙 돌려서 말하는 성격은 못 되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짐 박사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헬릭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가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뿐이네.”
“……무슨 뜻입니까?”
“음, 그렇군. 칼 라샤를 예로 들면 좋겠어.”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짐 박사가 마땅한 예시를 찾았는지 말을 이었다.
“자네라면 알지도 모르겠군. 혹시 칼 라샤가 스스로를 봉인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신들의 연회에서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라샤 님은 헬릭을 도와주기 위해 뮬딘 교에게 대항하는 것을 선택했었지.’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신도들을 잃었고.
스스로의 무능함을 탓하며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했다.
“신이 스스로를 봉인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잊혀진다는 뜻이다.”
“존재가 잊혀지면 어떻게 됩니까?”
“달라지는건 없네.”
짐 박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만 해도 인간들은 헬릭을 중후한 남성의 모습으로 알고 있고, 그를 믿고 있네. 헬릭이 스스로의 존재를 봉인하고 칩거에 들어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저 세상과의 교류를 못할 뿐이네. 누구를 공격할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공격을 받을 수도 없지.”
충격적인 발언에 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하군요. 전 분명 헬릭 님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 같은데요.”
“믿기지 않겠지만 그것이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네.”
“한 마디로 헬릭 님을 포기해라. 이 말이군요.”
“포기라…… 해석하기에 따라선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군.”
“묻겠습니다. 왜 굳이 그래야만 합니까? 뮬딘과 싸운다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요.”
“헬릭은 뮬딘을 이길 수 없으니까.”
짐 박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과거도 몇 번 이겼던 상대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태양교는 물딘교를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헬릭은 절대로 뮬딘을 이길 수 없다. 그건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실이야. 가끔씩 그녀가 보이는 불안증세도 이와 관련되어 있지.”
‘……불안 증세라.’
정우가 입을 꾹 다물고 그에 대해 생각했다.
확실히 헬릭은 때때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나타낼 때가 있었다.
칼 라샤를 비롯한 다른 신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숙녀의 비밀이라며 그에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로비가 그런 말을 했었지.’
헬릭은 상처가 많은 아이니까 그녀를 잘 보살펴주라고.
“대체 뮬딘은…… 헬릭 님을 왜 그렇게 싫어합니까.”
“으음.”
짐 박사가 슬쩍 마르코의 눈치를 보았다.
이에 마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말해줘도 괜찮을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허락을 받은 짐 박사가 말을 이어나갔다.
“헬릭과 뮬딘은 인간으로 치자면…… 그래. 형제나 자매 같은 관계라고 보면 되겠군.”
“그 둘이요?”
“헬릭은 빛, 뮬딘은 어둠. 명백하게 상극인 존재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그들은 날 때부터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전 헬릭 님을 봉인하는 게 내키지 않는군요. 결국엔 뮬딘, 그 녀석만 사라지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거 아닙니까.”
짐 박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뮬딘은 신일세. 유저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 답은 나왔군요. 그 놈을 봉인시키면 되겠군요. 굳이 헬릭 님이 봉인당해야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
그 질문에 짐 박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스로 봉인을 결정하지 않는 이상, 타인이 신을 봉인시키는 방법은…… 내가 알기로는 없네.”
흐으음.
카이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각종 인터뷰나 뉴스를 보면서 늘 생각한 건데, 박사님은 참 똑똑하신 분 같습니다.”
마치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 말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한 박사가 되물었다.
“무슨 뜻인가?”
“말씀하시는 걸 듣다보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분 같지 않습니까.”
“그럴 의도는 없었네. 나는 그저 내가 아는 선에서…….”
“네. 딱 거기까지죠. 박사님이 아는 선에서 말씀하시는 것.”
정우의 목소리는 살짝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웠다.
“그건 박사님이 아는 선 그 이상의 부분은 모른다는 말이잖습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단정 짓지 마십시오.”
톡톡, 정우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저는 그 이상의 부분을 헤매며 답을 찾아낼 겁니다. 늘 그래왔듯이.”
그것의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더 이상 자신을 자극하지 말라는, 부드러운 경고.
짐 박사나 마르코 정도 수준의 인물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네.”
“아닙니다. 아무튼 전 헬릭 님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뮬딘. 그 녀석을 죽이거나 봉인시키는 방법을 찾아봐야겠군요.”
“만약 우리도 그 방법을 찾게 되면 반드시 말해주겠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네요.”
“그리고…….”
머뭇거리던 짐 박사가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빛이 강렬해질수록 어둠 또한 짙어지는 법일세. 빛과 어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야. 한쪽만 뜯어내는건 불가능하지. 이 부분을 항상 유념하게나.”
“명심하죠.”
“시간을 내주어서 고맙습니다. 잠수함 패치에 대한 보상 문제는 빚으로 달아두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마르코가 깔끔한 디자인의 명함을 한 장씩 건네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모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