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
힐통령 385화
118. 지금 만나러 갑니다(1)
거대한 얼음 저택의 내부는 바깥 쪽보다 한층 더 추웠다.
카이는 높은 마법 내성 덕분에 버틸 만 했지만, 유하린은 아니었다.
오들오들, 와들와들.
“많이 추워요?”
“조, 조, 조금요.”
어깨 위에 올려놓은 오거 가죽을 꽉 껴안은 유하린이 유독 안쓰러워 보였다.
카이는 고개를 돌려 카즈라에게 물었다.
“이 집은 난방 안 되나?”
“난방? 그게 뭐지?”
“……아니, 됐어.”
마계에 그런게 있을 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카이는 유하린을 묵묵히 응원하며 카즈라를 따라나섰다.
웬만한 성에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저택을 30분 정도 이동하자, 거대한 두 개의 문이 나왔다.
“이 너머에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들어가 봐라.”
“너는?”
“난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쪽의 인간도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겠군.”
카즈라의 지목을 받은 유하린이 코를 훔치며 물었다.
“크읍, 저는 왜요?”
“안쪽은 복도보다 몇 배는 더 추우니까. 나도 못 버틴다.”
“아…….”
유하린도 그건 무리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떡하죠? 아무래도 전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그럼 차라리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계실래요? 추운 데 있지 말고.”
“……그래도 돼요?”
“그럼요.”
잠시 고민을 하던 유하린은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카즈라와 유하린을 뒤로한 카이는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문이 하나 더 있어?’
5미터 정도 앞에는 거대한 문이 두 개 더 있었다.
‘그렇군. 이거 완전히…….’
보스 룸의 구조를 빼다박았다.
‘생각해보니 이 저택 자체가 그래. 던전의 구조와 흡사해.’
만약 카즈라의 안내를 받지 않고 유하린과 둘이서만 들어왔다면, 온갖 함정이나 몬스터들을 마주쳤을 것이다.
일단은 이곳도 대공의 던전이었으니까.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200평 남짓한 거대한 사각형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쩌저적.
카이의 의류에 빠른 속도로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허나 이를 무시한 그는 앞만 쳐다보았다.
앞쪽의 화려하게 조각된 얼음의 의자 위에는 한 악마가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저것이 세르핀?’
옅은 하늘빛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있었고, 속눈썹이 굉장히 긴 편이었다.
보통 속눈썹이 길면 눈매가 부드러워야 정상인데, 그녀의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운 눈매로 카이를 살피던 세르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워. 정말로 인간 맞나?”
“보다시피.”
카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제법이네. 어지간한 상급 악마 놈들도 내 저택에서는 함부로 활동하기 힘든데.”
“난 어지간한 상급 악마들 수준이 아니니까.”
빠드득.
카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어붙은 바닥이 부서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세르핀이 아. 작게 탄성했다.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이 키네사를 죽였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아니, 뭐. 혹시라도 고작 키네사를 죽였다고 그렇게 당당한거라면, 얻어맞고 엉엉 울기 전에 처신 잘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
세르핀이 아름다운 얼굴로 생긋 웃으며 독설을 퍼부었다.
물론 그 정도의 경고에 위축될 카이가 아니었다.
“네 말대로 고작 키네사를 죽인 일로 당당할 이유는 없지.”
카이가 항상 믿고 있는 것은 자신의 실력뿐이다.
누구를 잡았느니, 누구를 이겼느니.
그것은 결국 허울 좋은 상대평가일 뿐.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으로 자신이 있는 자는 그런 허울에 기대지 않는다.
“잡설은 치우자고. 날 보고 싶어 한다고 들었는데, 용건은?”
“내가 중간계로 나가서 인간을 본 적은 있어도, 마계에서 돌아다니는 인간은 처음이거든.”
세르핀은 양반다리를 한 채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궁금했어. 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무슨 생각을 가지고 대공을 죽였을까.”
“별다른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내가 죽기는 싫으니까 먼저 죽였다. 그게 끝.”
“오호라, 터프한데?”
피식 웃음을 터트린 세르핀이 입을 열었다.
“엘리시온의 마족들을 치료해줬다고 들었어. 그건 왜 그랬지?”
연이어 받게 된 질문에 카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이상하네. 난 이 자리가 감사를 받는 자리인줄 알았는데, 왜 취조 받는 기분이 들지?”
“그래? 생각보다 내 마음이 급했나보네.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
세르핀이 한쪽 손을 들며 쿨하게 사과했다.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랬어. 넌 인간이잖아? 대부분의 인간들은 악마족에게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껴.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멸살의 대상으로 삼지.”
“흐음.”
카이는 말없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려 그 위에 신성한 빛을 띄웠다.
“그 기운은…… 신성력인가?”
“잘 아네.”
“이래봬도 머나먼 옛날 중간계로 유학까지 갔던 유학파라니까.”
왠지 모르게 뿌듯해보이는 세르핀을 무시한 카이가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모시는 신의 이름은 헬릭. 빛과 선, 자비를 대표하는 분이시지. 난 그분의 대리자로서 환자를 치료했을 뿐이야.”
“이제 보니 독실한 신자셨네.”
이해를 마친 세르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너에 대한 궁금증은 여기서 끝. 그럼 이제 일 얘기를 해볼까?”
“일 얘기?”
“카즈라에게 못 들었어? 남부 전선 통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는데.”
“아, 그거라면 듣긴 들었지. 아직 한다고는 안 했지만.”
“흐으응?”
카이가 경우에 따라서는 손을 거들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추자, 세르핀이 콧소리를 냈다.
“정말로 건방진 인간이야. 와! 나도 성격 진짜 많이 죽었다. 예전의 나였으면 벌써 두 번 죽이고 시작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세르핀의 말을 짧게 일축한 카이가 물었다.
“일 얘기를 하기 전에 나도 묻고 싶은 게 몇 개 있다.”
“후우. 참자 세르핀, 너 성격 많이 죽었잖아. 굿 걸.”
혼자서 중얼거리던 세르핀이 불순한 표정으로 삐딱하게 물었다.
“뭔데.”
“천계의 신들에 대해서 알고 있나?”
“신들?”
예상외의 질문이었을까, 세르핀이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뭐, 모르지는 않지…… 그런데 그건 왜?”
“마계에는 한 명의 마왕과 그 밑으로 네 명…… 아니지. 이제 세 명의 대공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너나 다른 대공들, 혹은 마왕이라면 신을 죽일 수 있을까?”
“흐으음.”
세르핀이 턱을 괴며 진지하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는 안 되고……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고…… 그년이라면…… 쓰읍, 되나? 안 되나? 아, 모르겠네.”
잠깐의 고민 후, 머리를 벅벅 긁은 세르핀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버렸다.
“아몰라. 지들이 붙어봐야 알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너는 어떻지?”
“나? 나는 안 되지.”
세상 모두의 위에 군림할 것 같던 당당한 세르핀이 단박에 못을 박았다.
“너, 진짜 키네사 죽인 녀석 맞냐?”
“그 얘기가 또 왜 나오는데.”
“아니,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왜 ‘격’에 대해서 모르나 싶어서.”
“격?”
낯익은 단어의 출현에 카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고 보니…….’
문득 짐 박사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미드 온라인에서 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은 ‘동등한 격’을 지닌 존재뿐이다.]
그 또한 격을 운운했었다.
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은 동등한 격을 갖춘 자 뿐이라고.
‘찾았다.’
단서를 찾아낸 카이가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물었다.
“격이 뭔데?”
“대부분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뜻 그대로야. 품격, 수준, Class.”
세르핀이 제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개인이 아무리 강력해도 신의 위(位)에 앉은 자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어. 그건 마치…… 그래, 인간들을 예로 들어보자고. 마을의 거지가 왕에게 도전할 수 있어? 없지? 그런 거야.”
“그럼 격을 높이면 된다는 소리지?”
“여보세요, 너 뭐 들었니? 거지가 노력한다고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꿈 깨.”
“그건 안 돼.”
카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꼭 처치해야 할 신이 있어서.”
“오케이. 쟤도 정상은 아니구나.”
세르핀이 깨우침을 얻은 사람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흐음. 대공도 모른다라…… 그럼 역시 마왕에게 물어봐야하나.”
카이가 혼자서 중얼거림을 엿들은 세르핀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봐요, 인간놈 씨.”
“…….”
왜 부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너 머리 괜찮아? 마왕이라고, 마왕. 마주치는 순간 그런거 묻기도 전에 살해당할걸.”
“내가? 아니면 마왕이?”
“당연히 너지!”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빼액 소리를 지른 세르핀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좋게좋게 얘기해주니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마왕은 나랑 차원이 다르거든?”
“그러니까 물어보러 간다는 거 아니야. 너랑 차원이 다르면 하나라도 더 알겠지.”
“하, 이 인간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세르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져나갔다.
“좋아, 그럼 어디 그 건방진 입에 걸맞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볼까.”
쿠웅.
세르핀이 얼음 옥좌에서 내려오며 가볍게 발을 구르자, 내부의 온도가 가파르게 내려갔다.
동시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바닥을 얼리며 카이에게 쇄도했다.
“후우…….”
가볍게 입김을 불자 퍼져나오는 새하얀 숨결을 쳐다보며, 카이는 중얼거렸다.
“절대영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실내 온도가 한 번 더 크게 떨어졌다.
쩌저저적!
카이를 향해 돌진하던 세르핀의 얼음 파도가 제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곳은 이미 방이라고는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퍼져나간 얼음의 꽃들로 가득했다.
“……호오?”
설마하니 자신의 공격을, 같은 얼음으로 막아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세르핀의 눈동자에 놀랐다는 감정이 어렸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진짜 막을 줄을 몰랐네. 일단 하반신부터 얼려놓고 훈계하려고 했는데…….”
“너처럼?”
“으잉?”
카이가 턱끝을 까딱거리자, 세르핀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얼음으로 꽁꽁 뒤덮여있는 자신의 발목이었다.
“어우씨, 이거 뭐야!”
깜짝 놀란 세르핀이 그대로 발을 들어 얼음들을 깨버렸다.
그녀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 자신을 쳐다보는 인간을 향해 천천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건…… 내가 원래 추운 걸 좋아해서. 가끔씩 내 발도 얼음으로 얼려놓고 그래.”
“그런 것 치고는 엄청 놀라던데.”
“그건…… 에이씨.”
이미 추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뒷머리를 벅벅 긁은 그녀가 얼음 옥좌에 털썩 주저앉으며 양손 중지를 날렸다.
“너 잘났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이제 막지 않는 건가?”
“또 뭘!”
“마왕을 만나러 가는거.”
“내가 네 엄마도 아닌데 그걸 말릴 이유는 없지. 그래도 개죽음이 될 것 같으면 적당히 패서 말리려고 했는데…….”
슬쩍.
다시 한 번 살얼음이 껴있는 제 발 부근을 탁탁 털어낸 세르핀이 히죽 웃었다.
“어디가서 맞고 다닐 놈 같지는 않으니까 별 말 안 하려고.”
“생각보다 오픈 마인드네.”
“나 깨우친 대공, 세르핀이야.”
“와. 너 성격 정말 좋구나. 잘됐다.”
“응? 뭐가?”
세르핀은 활짝 웃는 카이의 얼굴을 보며, 영문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의 눈동자는 이미 눈앞의 대공을 먹잇감처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금쪽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마르코 사장이 자신과 유하린에게 걸어놓은 페가수스의 축복. 이것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굴레가 아닌, 축복 그 자체였다.
‘수준 높은 대공들과 마왕을 노페널티로, 그것도 몇 번이고 상대하면서 실력을 키울 수 있어.’
만약 이 버프가 없었다면 아무리 카이라고 해도, 마왕을 직접 만나러 갈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터.
하나 지금은 또 이야기가 달랐다.
‘다행히 버프의 지속시간은…….’
카이가 마계를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