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
힐통령 386화
118. 지금 만나러 갑니다(2)
카이는 세르핀의 발치에 떨어진 얼음 알갱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세르핀, 아프냐?”
“뭐?”
세르핀이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방금 발이 얼어붙었던 거 아팠느냐고 묻는 거다.”
“…나도 참, 얕보인 건가?”
그녀는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쌍 중지를 날렸다.
“나는 깨우친 대공이라는 이명 전에 혹한의 대공이라 불리는 몸. 신체의 일부가 ‘얼어붙는 것’ 정도로는 고통을 논할 수 없다.”
“그런가. 역시 본 게임에 들어가 봐야만 알 수 있나….”
페가수스의 축복 효과를 조금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던 카이가 중얼거렸다.
그는 세르핀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좋아, 그럼 제대로 시작해 보자.”
“…뭘?”
“본 게임, 아니, 대련이라고 해야 하나?”
“대련? 너랑 내가?”
세르핀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만?”
“내가 너한테 생전 처음 하는 이야기니까.”
“미안한데 이해가 전혀 되질 않는데? 지금 너와 내가 다툴 이유는 조금도 없….”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는 것보단.”
카이가 다짜고짜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순식간에 날아간 태양광자포는 그녀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맞혔다.
“그냥 한 번 겪어보는 게 빠를 거야.”
“…너 진심이냐.”
아무리 깨우친 대공이라고 하나, 다짜고짜 위협을 받은 세르핀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서서히 떠올랐다.
“감당할 수 있냐고.”
“하나,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다.”
카이가 세르핀의 시선을 정면에서 받으며 입을 열었다.
“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할 짓을 저질러 버렸다면.”
그의 입꼬리가 조금씩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 후회하지 않는다.”
* * *
“짐 박사.”
본사로 돌아온 마르코 사장은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짐 박사를 호출했다.
“예.”
“카이… 그러니까, 미스터 한 말일세. 이번에 뭔가 너무 쉽지 않았나.”
“흠, 그런 감이 없잖아 있긴 하죠.”
역시 헬릭이라는 존재가 관여되었기 때문일까.
어제의 대화에서 한정우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일단 이것으로 마계 컨텐츠는 아낄 수 있게 되었군.”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제 개발 팀을 최대한 돌려서 시나리오만 메꿔 넣으면 되겠군요.”
“음음, 그 부분은 맡기겠네. 그리고….”
마르코 사장은 통짜 유리로 되어 있는 한쪽 벽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뮬딘 말일세. 정말로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그런 걸 왜 여쭤보시는지?”
“그냥 궁금해서일세. 그리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뮬딘의 봉인에 있어선 최대한 협력하기로.”
“제가 했던 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론 유저가 신을 봉인할 수 있는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시나리오 자체는 예정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간다는 소리로군.”
“큰 이변이 없는 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자네도 계속 방법을 찾아보게. 나보다는 자네가 나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마르코가 짐 박사를 물리려던 순간, 회의실 문을 노크하며 개발 팀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사장님. 협상에 실패하고 오신 겁니까?”
살짝 원망스러운 개발 팀장의 눈빛에 마르코와 짐 박사가 눈만 껌뻑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협상은 아주 퍼펙트하게 끝났네.”
“그런데 왜, 왜 카이가 저런단 말입니까?”
등 뒤로 불안감이란 녀석이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낀 마르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미스터 한, 아니, 카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길래?”
“후우.”
개발 팀장의 깊은 한숨 소리가 사장실을 가득 메웠다.
“오늘 대공 하나 아예 죽일 기세던데요?”
* * *
“오, 아주 좋아.”
“안 좋아, 이 새끼야!”
카이의 중얼거림을 맹렬하게 비난한 세르핀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키네사보다 움직임이 좋잖아?’
앞에 있다고 생각한 순간 신형이 사라지고, 뒤쪽에서 차가운 한기가 몰아쳤다.
덕분에 위치를 알기는 편했다.
온도가 떨어지는 곳만 경계하면 되니까.
‘그리고 페가수스의 축복, 이건 상상 이상으로 쓸 만한 버프야.’
자신에게 몇 대 얻어맞은 세르핀은 코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다만, 생명력만은 여전히 100%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즉, 맞으면 고통은 느껴지고 피해를 입는 건 그대로지만….’
시스템상으로 생명력은 그대로라는 소리.
한마디로 카이가 바라던 실전 같은 대련을 원 없이 펼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좋구만!”
“안 좋다고!”
세르핀의 날카로운 눈매가 한층 더 표독해졌다.
동시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는 온도.
띠링!
[주변의 온도가 너무 낮습니다. 움직임이 20% 느려집니다.]
[작은 공격에도 쉽게 치명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카이는 디버프가 걸린 즉시 스킬을 시전했다.
“햇살의 따스함.”
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뿐.
계속해서 한기가 몰아닥치는 장소에선 디버프를 영구적으로 제거할 수 없었다.
‘이런 방법도 있구나.’
카이가 작게 감탄했다.
지금까지의 적들은 디버프를 거는 것에 어느 정도의 텀이 있었다.
세르핀처럼 초 단위로 무식하게 같은 디버프를 거는 적이 없었다는 소리.
‘독 대미지 같은 것은 그냥 생명력만 깎이는 거였으니 적당히 무시할 수 있었는데….’
움직임이 느려지고, 치명타를 쉽게 유발하는 이런 상태는 상당히 치명적이다.
‘역시 대공은 대공.’
카이는 당연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히죽 웃었다.
키네사 전 때는 실전이었고,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되었다.
‘때문에 실험해 보지 못했던 것이 잔뜩 있어.’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세르핀을 상대로 그때 못 해봤던 모든 것을 실험해 볼 생각이었으니까.
* * *
“미친 인간.”
세르핀이 단 한 단어로 카이라는 존재를 정의했다.
“뭘, 새삼스럽게 칭찬을.”
능글거리며 이를 받아친 카이는 대충 끼니를 때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할까?”
“…체력도 미친 인간.”
“어차피 무료했던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 좋아할 줄 알았는데.”
“후우,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세르핀은 상당히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카이에게 이유도 모른 채 선빵을 맞은 지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싸웠다.
아니, 지금에 와서 보면 싸움이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이용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교활한 인간 같으니라고.’
둘이 싸웠는데 이용당한 것은 자신뿐.
상대방은 누가 보기에도 사흘 전보다 훨씬 더 성장을 한 상태였다.
“넌 남부 전선 쪽으로 안 가나?”
“그쪽에는 하린 씨가 대신 갔으니까 괜찮잖아.”
처음 카이와 세르핀이 싸움을 시작했을 때, 카즈라가 깜짝 놀라서 방 안을 들이닥쳤다.
허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세르핀의 극한지옥과 카이의 절대영도에 몸만 부르르 떠는 것이 그에게 허락된 전부.
결국 오해를 풀기는 했지만, 세르핀이 카이를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뭐, 이쪽이 당연한건가?’
하긴, 가만히 있다가 공격을 얻어맞고 시작했는데 열이 안 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 시작하자. 슬슬 시간 됐으니까.”
“…시간? 무슨 시간.”
세르핀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슬슬 다른 두 놈도 만나러 가 볼까 생각 중이거든.”
“다른 두 놈이라면… 네 녀석, 설마?”
그녀의 눈동자가 화악 커졌다.
“아마 그 설마가 맞을걸. 다른 대공들을 만나볼 생각인데.”
“미쳤어. 대공이 네가 만나고 싶으면 아무 때나 만나주는 한가한 존재인줄 아느냐.”
“…….”
카이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세르핀을 쳐다보자,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그녀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나는 경우가 다르잖아! 경우가!”
“뭐, 그 녀석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걸? 안 나오면 영지 다 때려 부술 건데 지들이 안 나오고 배길까.”
“이 인간은 마계에 얼마나 많은 상급 악마와 최상급 악마가 있는지 생각은 하는 걸까.”
“걔네들이 나오면 나야 땡큐지. 그리고 나오는 족족 때려잡다 보면 결국 나오지 않겠어?”
“…….”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세르핀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다.
“뭐, 내 입장에는 네가 놈들의 전력을 깎아주면 나쁠 건 없지….”
“그러니까 슬슬 말해봐. 나머지 두 대공의 능력은 뭐지?”
세르핀이 얼음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키네사가 환상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듯이 나머지 두 대공도 그럴싸한 능력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동쪽은 번개, 북쪽은 독.”
“오, 생각보다 쉽게 알려주네?”
“이 정도는 시골의 촌뜨기 마족들도 죄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과연, 대공은 대공이다 이건가.”
고개를 끄덕인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시작할까?”
“…진짜로 또 하려고?”
“어, 조금 더 경험을 쌓게 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카이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군단을 소환했다.
50여 마리의 듀라한.
그것도 풀무장과 풀버프를 받은 자랑스러운 카이만의 군대였다.
‘하지만 이 녀석들도 첫날에는 진짜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지.’
기본적으로 듀라한 군대는 A.I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카이가 겪은 바에 의하면 그 A.I라는 것이 썩 뛰어나진 않다.
‘딱 몬스터 듀라한 수준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저가 다루는 몬스터는 일반적인 몬스터보다 강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녀석들은 학습을 할 수 있다.’
갖은 상황을 겪고, 전투를 치르면서 듀라한 개개인의 A.I에 새로운 패턴이 추가된다.
‘지난 사흘 동안 세 번의 전투를 치렀지.’
듀라한의 입장에서는 세 번이나 죽임을 당한 셈이다.
마치 전생하면서 강해지는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이 녀석들도 조금씩 강해지는 중이었다.
“그럼 간다.”
“후우.”
세르핀은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군말 없이 카이와의 대련에 임했다.
파스스스슥!
주변의 온도가 뚝 떨어지고, 듀라한들의 장비 표면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붉은 안광은 꺼지기는커녕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까앙!
현재 듀라한들의 레벨은 카이와 동급.
즉, 568레벨이다.
화아아아악!
더 이상 일개 듀라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전투의 스페셜리스트.
카이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며 확신했다.
‘이제 웬만한 길드들… 아니, 세계 8대 길드를 상대로도 해볼 만해.’
상위 랭커?
물론 그들의 몸놀림은 훌륭하고, 지능은 듀라한에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스펙.’
기본적으로 스펙이 너무나도 차이 난다.
까앙, 까앙, 까앙!
“이 벌레 같은 것들이!”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50마리의 듀라한은 무려 대공을 압박했다.
물론 2초가 지나기 전에 모두 잔해가 되어 부스러져 버렸지만.
‘소득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다짜고짜 달려드는 듀라한이 아니라, 진형을 갖춘 채 강적을 ‘사냥’할 줄 아는 군단.
카이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게다가 이들은 죽어도 노 코스트. 나에겐 아무런 손해가 없다.’
만약 자신이 작정하고 게릴라 전을 감행한다면?
‘세계 8대 길드건 뭐건, 제대로 괴롭혀줄 자신이 있다.’
지난 사흘간의 얻은 소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스킬 숙련도.
안타깝게도 고급 9레벨의 검술 숙련도는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성력을 바탕으로 한 기술들의 숙련도가 매우 빠르게 상승했다.
‘미드 온라인은 기본적으로 혼자서 연습을 할 때보다 강적과 싸울 때 숙련도가 빠르게 오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공과의 대련은 최고의 훈련법 중 하나였다.
“세르핀, 지난 사흘 동안 고생 많았다.”
“꺼져.”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얼음 옥좌에 양반 다리를 한 채 앉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중지를 치켜세우고 있다는 것 정도.
게다가 본인은 애써 감추려고 하지만, 못내 아쉬워 보인다는 부분까지.
“나중에 일이 모두 끝나고 시간이 나면 한 번 더 찾아올게.”
“그러든가 말든가.”
카이가 자리를 완전히 떠났을 때, 언제나처럼 혼자 남게 된 세르핀이 피식 웃었다.
“내가 이 정도면… 다른 두 놈은 조만간 잠은 다 잤네.”
세르핀은 단 한 단어로 카이라는 존재를 정의했다.
“두 번 다시 싸우기 싫은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