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87화 (387/441)

# 387

힐통령 387화

118. 지금 만나러 갑니다(3)

“멀리서 볼 때는 잔잔한 호수처럼 보이겠지만, 가까이 와보면 알걸? 이곳이 격동하는 바다라는 것을.”

깨우친 대공이라는 소리를 듣는 세르핀이 남긴 명언이었다.

그것은 마계의 핵심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뼈있는 말이기도 했다.

최상급 악마, 그리고 그 이상의 대공급 악마들.

그들의 수는 늘 유지되고 있고 구성원도 자주 바뀌지 않는다.

때문에 멀리서보면 마계라는 장소는 정체된 호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깊숙이 파고들면 비로소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최하급부터 상급…… 최상급까지.

그들은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강해지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대공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오늘에야말로 끝을 봐야겠군.”

마계의 북부를 다스리는 바시온.

그리고 마계의 동부를 다스리는 스테론.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그들은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잘한 국지전 따위가 아니었다.

“오늘, 동부를 먹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북부에 나의 깃발을 꽂겠다.”

휘하의 악마들을 모조리 국경지대에 집결시킨 대전투.

수 천만 마리의 악마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결전의 날.

두 대공의 신경은 막 날을 세운 검처럼 예민해져있었다.

악마들이 호흡을 뱉어내는 것만으로도 함성이 되는 엄청난 공간 속에서.

양 진영의 대공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로 이 짓도 끝이로군, 바시온.”

“왜, 아쉬운가?”

“미친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스테론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잠깐의 잡담을 끝으로 두 대공이 서서히 힘을 끌어올렸다.

길고도 길었던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다.

***

“흐으흠.”

카이는 세르핀과 작별 인사를 한 뒤, 나흘째 미믹을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가 목표로 향하는 곳은 동부와 북부의 국경선이었다.

“중안 지역은 거쳐 가지 말라고 했지.”

세르핀은 마계의 중앙 상공은 지나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괜히 마왕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귀찮아질 게 뻔하다고.

‘뭐, 어차피 마왕도 만나러 갈 거지만, 넌 조금 더 킵.’

처음부터 끝판 왕을 만나면 재미가 반감되는 법이니까.

카이는 얌전히 세르핀의 충고를 따라 국경선을 위주로 이동 중이었다.

때문에 빙 둘러가는 중이기는 했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쯤이면 시작됐으려나…….”

세르핀은 조만간 동부와 북부 간에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말했다.

그것은 카이가 국경선으로 향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국경선으로 가면, 두 대공을 한 번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세르핀이 그랬으니까.

‘그 머저리들은 한 달 내내 싸워도 결판 안 나. 그러니까 느긋하게 마음먹고 가.’

과연 그 말이 사실일지.

카이는 미믹의 위에 정좌를 한 채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미지 트레이닝.’

대결 상대는 당연히 세르핀이었다.

자신과 붙어봤던 상대 중 가장 강력하기도 했고, 배울 점도 확실했으니까.

‘그녀의 극한지옥은 상대하기 까다로웠지.’

주변을 모두 얼리는 세르핀의 극한지옥은 절대 영도와 효과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녀의 압승.

단순히 사방의 모든 것을 얼리는 카이와는 달리, 그녀는 미세한 컨트롤까지 가능했다.

그리고 현재 카이가 이미지 트레이닝 중인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중력장을 계속 연습한 결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듯이, 절대 영도도 마찬가지야.’

만약 중력장과 절대 영도를 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컨트롤 할 수 있게 된다면?

‘사기잖아.’

시스템의 보정으로 쿼드라플 캐스팅까지 쓸 수 있는 카이다.

중력장과 절대 영도를 동시에 사용하며 힐까지 사용이 가능한 사제.

당연히 적수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런 힘을 지니고도 뮬딘에게 대항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미지수니까.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한다.’

헬릭을 지킬 수만 있다면.

꼭 감겨있는 그의 눈꺼풀이 두 눈의 날카로움을 감추었다.

***

“바시온 대공 전하를 위하여!”

“스테론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북부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

수 천만 마리의 악마들이 한데 모여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전장 이곳저곳에서 피와 살점이 튀기고, 생명이 덧없이 바스라졌다.

이미 두 대공은 둘만의 결판을 내기위해 장소를 옮긴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하의 악마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오? 진짜 전쟁하네.”

펄럭, 펄럭.

까마득히 높은 상공에서 한 마리의 와이번이 천천히 날갯짓을 하며 전장을 맴돌았다.

“뀨우웅?”

“응? 내릴 거냐고? 흐음. 어쩔까…….”

카이의 두 눈이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높은 하늘에서 확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악마들의 수는 많았고 전장은 넓었다.

‘두 대공은 아직도 치고받고 싸우고 있나 보네.’

그들 사이에 결판이 났다면 악마들이 이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좋아. 그럼 잠깐 내려가자.”

카이는 상태창을 흘깃 쳐다보며 미믹의 목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재 그의 레벨은 568.

마계의 최초 방문 보너스로 경험치가 3배나 더 들어오는 시점에서, 막대한 경험치들이 땅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걸 놓치기는 아쉽지.’

게다가 조금 늦게 간다고 대공 중 한 명이 죽어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펄럭, 펄럭!

미믹이 천천히 고도를 낮추자, 허공을 날아다니던 비행형 악마들이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렸다.

“동부의 악마냐!”

“북부의 악마인가!”

“우선 악마가 맞는지부터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닐까?”

대답 대신 날아온 건 공격이었다.

미믹이 부드럽게 허공을 선회하며 공격들을 피해내자, 카이가 손을 뻗었다.

“태양 광자포.”

전후좌우.

카이의 사방을 감싼 네 개의 신성마법진이 동시에 빛의 광선을 토해냈다.

상극이나 다름없는 신성력에 얻어맞은 비행형 악마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땅으로 추락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탯 포인트를 10개 획득하셨습니다.]

땅 짚고 헤엄을 친다는 것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해방군의 환자들은 성심성의껏 치료해준 카이였지만, 지금은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전장에 나왔다는 건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소리.’

그렇다면 그 반대도 성립되어야 한다.

“자신의 목숨이 빼앗길 각오 또한 하고 나왔겠지.”

“뭐, 뭐야 저 괴물은…….”

“잠깐. 마기가 아닌 이상한 기운은 설마?”

“나, 남쪽의 사신!?”

“그 녀석은 여자라고 들었는데!”

‘혹시 하린 씨 이야기인가?’

남쪽의 사신이라니.

그녀도 그 짧은 사이에 제법 거창한 별명을 얻은 듯하다.

‘하긴, 변화의 기사라면 그럴 만하지.’

현재 유하린은 최상급 악마와 비견될 정도의 힘을 갖춘 상태였으니까.

“아쉽게도 난 너희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야.”

악마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쉬울 것이다.

차라리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유하린이었다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제대로 한 번 날뛰어볼까.’

카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강화 소환, 블리자드. 빛의 군단 소환, 할리, 데스몬드!”

순식간에 세 마리의 생명체가 소환되었다.

블리자드는 자연스럽게 미믹의 등 위로 올라섰고, 할리와 데스몬드는 날개를 활짝 펴며 아래를 주시했다.

[킁킁, 이 냄새는……?]

소환을 가장 반긴 것은 다름아닌 데스몬드였다.

두 눈을 크게 뜬 그는 이내 희열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인간, 혹시 이곳은 천국인가!]

“굳이 따지자면 지옥이겠지?”

[그럴 리가 없다! 이토록 마기가 풍부한 곳이거늘!]

“아, 네 입장에선 천국이겠네.”

[날 부른 이유가 뭐지?]

데스몬드는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다는 듯 전의를 내비췄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 전장에서 활개칠 수 없다.

그의 레벨로는 기껏해야 하급에서 중급 정도의 악마들만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이 싸움이 끝났을 때는…….’

어쩌면 상급의 악마와 겨룰 수 있는 레벨에 도달할 지도.

카이는 손을 뻗어 세상을 가득 메운 악마들을 가리켰다.

“왜겠어. 블리자드, 데스몬드, 할리!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악마들을 상대해.”

[재미있군.]

낮은 웃음 소리를 남긴 할리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쫙 벌린 그의 입에서 수압포가 쏟아져 나왔다.

좌아아아악!

일직선으로 그어지며 두 동강 나는 최하급의 악마들.

동시에 소환수들의 경험치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을 소환하면 내 경험치는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이럴 때 키워놓지, 또 언제 키우겠는가.

카이는 그들에게 버프를 걸어주며 자신의 사냥을 속행했다.

“이거 간만에 옛날 생각 좀 나는데?”

소환수들은 중급 악마만 만나도 생명력이 금새 위태로워졌다.

당연히 그 때마다 카이의 힐이 그들을 휘감았다.

‘케어해야하는 소환수는 셋.’

동시에 카이 또한 적들을 잡아나가야 했다.

잠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그 짜릿한 상황이, 카이를 즐겁게 만들었다.

“재미있네.”

미믹의 등에서 내려 땅에 내려온 카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악마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서걱, 서걱!

그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악마들의 수급이 땅을 뒹굴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저런 악마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

“아니, 그것보다 저 녀석은 대체 어디 소속이지?”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카이의 검은 등급을 가리지 않고 대상을 싸늘한 주검으로 만들었다.

마치 공장의 기계가 무뚝뚝하게 상품을 만드는 것처럼.

그의 검도 꾸준히 시체를 만들어갔다.

***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탯 포인트를 5개 획득했습니다.]

사냥에 전념하기를 한참.

카이의 레벨은 마침내 앞자리 6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했다.

‘후우, 역시 좀 피곤하네.’

쉴 새 없는 전투로 피로감이 느껴지며 몸이 물 먹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것은 캐릭터의 상태가 나빠졌다기보다는 멘탈적인 문제.

즉, 현실의 몸이 잠을 못자서 생긴 현상이었다.

‘적당히 빠질 때가 된 것 같아.’

카이는 여유롭게 인벤토리를 확인하며 전리품을 확인했다.

누가봐도 무방비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격하는 간 큰 악마는 없었다.

[카이]

직업 : 태양의 사제

레벨 : 600

칭호 : 신의 대리자

생명력 : 261,200

신성력 : 423,500

힘 : 3,387 체력 : 2,612

지능 : 3,124 민첩 : 1,842

신성 : 4,235 위엄 : 1,654

선행 : 784

남은 스탯 : 325

독 저항력 +30

마법 저항력 +101.5%

자연친화력 +200

신성력을 소모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 +50%

악마/언데드에게 주는 피해 +100%

새삼스럽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지어지는 상태창이었다.

‘자고와서는 두 대공들이다.’

***

주르륵.

검은 액체에 지면이 녹아내리고.

우르르르릉!

하늘이 두 조각나며 검은 뇌전이 줄기줄기 내리쳤다.

고작 두 존재의 싸움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나도 큰 싸움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경 몇 십 킬로미터 이내에는 그 어떤 생물체도 없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고독한 절대자들의 싸움.

헌데 두 대공의 예민한 감각 아래 제3자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불청객?’

‘설마 이 녀석이…….’

당연한 말이지만 바시온과 스테론은 상대를 의심했다.

허나 서로의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바시온이 파놓은 함정은 아니다.’

‘표정을 보니 이 녀석은 아닌데, 그럼 대체……?’

두 대공이 암묵적으로 거리를 벌리고 다가오는 존재를 쳐다봤다.

저벅, 저벅.

백색의 사제복, 손가락 마디마디에 끼워진 고급스러운 반지들.

어깨 위로는 빛을 녹여만든 듯한 검을 대충 걸친 존재가 그들에게 걸어왔다.

그가 두 대공의 얼굴을 차례대로 훑었다.

“어디보자…… 그쪽이 바시온?”

“스테론이다.”

스테론이 굉장히 불쾌하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미안. 그럼 네가 바시온이겠네.”

“넌 뭐지.”

바시온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현재 그들이 서있는 지역은, 대공들의 마기에 의해 다른 생명체가 마음껏 활동할 수 없었다.

최상급의 악마라고 해도 쉽게 돌아다닐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3자의 기운이 느껴졌을 때 경계를 한 것이었고.

이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것은, 대공과 필적할 정도의 강자라는 뜻이었으니까.

“카이. 세르핀한테 소개를 받고 왔는데.”

“……서쪽?”

“그 녀석, 언제 이 정도의 변수를…….”

두 대공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카이는 자신을 한껏 경계하는 대공들을 쳐다보며 성검을 고쳐잡았다.

“자, 그럼 시작하자고.”

마계에 도착한 지, 정확히 25일째 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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