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8
힐통령 388화
118. 지금 만나러 갑니다(4)
독은 예로부터 누군가를 죽일 때 자주 애용되는 무기 중 하나였다.
그 장점은 분명하다.
일단 중독시키기만 하면 이미 그 시점에서 게임은 끝.
독에 대한 내공이 높은 이들일 수록 독은 점점 더 은밀해져갔다.
색이 없고, 향이 없으며, 형태 또한 없다.
독을 다루는 이들이 말하는 환상의 독.
무색, 무취, 무형의 독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네.”
카이가 살짝 놀랐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띠링!
[중독되었습니다.]
[독성이 매우 강력합니다.]
[포이즌 마스터 스킬이 발동합니다.]
[독의 성분을 완벽히 분해할 수는 없지만 효과가 대폭 떨어집니다.]
과연 대공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독성이다.
‘포이즌 마스터 스킬이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하는 독은… 처음 봐.’
예전에 세계수 루테리아를 중독시켰던 뮬딘 교의 레전더리 등급의 독.
아카샤의 심판조차 완벽하게 막아냈던 포이즌 마스터였다.
한데 이번에는 그 독성을 완전히 분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바시온이 사용하는 독도 최소 레전더리 등급이다.’
카이의 입장에서는 흥미가 돋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반면 바시온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중독시킨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호각으로 싸우던 스테론조차 그 독에 정통으로 중독되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그 녀석은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독을 피한다지만…….’
눈앞의 이상한 악마는 독을 피하지 않았다.
독을 다루는 바시온 입장에서는 탐스러운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소리.
한데 멀쩡하다.
아니,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네놈, 어떻게 멀쩡한 거지?”
“멀쩡하다는 소리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개소리! 태연스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멀쩡하다는 소리다.”
본래라면 벌레처럼 온몸을 꿈틀대며 비명을 지르다가 녹아버려야 한다.
“내가 원래 독에 대한 저항력이 좀 강해.”
“호오, 그럼 네놈의 심장을 먹으면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소리로군.”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스테론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바시온의 독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두 사람의 싸움이 길어지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 악마 녀석을 죽이고 심장을 내가 먹는다면?’
악마의 심장을 먹는다는 것은, 그 악마의 마기와 특성을 그대로 흡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저 악마의 심장을 먹으면 독에 대한 저항력을 고스란히 얻을 수 있다.
스테론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벼락처럼 움직였다.
콰르르르릉!
그것은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검은 뇌전의 스테론, 마계에서 두 번째로 재빠른 악마.
마계의 동부 지역을 다스리는 그는 스스로가 번개가 되어 움직일 수 있었다.
우드드득!
“……!”
카이의 고개가 그대로 90도로 돌아갔다.
번개처럼 쇄도한 스테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빨…… 라!’
그의 입장에서는 바시온처럼 독을 사용하는 것보다, 이렇게 극한의 속도를 지닌 쪽이 상대하기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위기감을 느낀 카이의 두 눈동자가 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띠링!
[매의 목격자 효과가 발동합니다.]
카이의 시력이 단숨에 몇 배나 증폭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론의 움직임을 온전히 잡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온전히 잡아내는 것이 불가능할 뿐이다.
콰드드득!
스테론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읽어낸 카이는 이어진 그의 주먹을 막아냈다.
“……막혔다고?”
스테론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바시온의 독이 안 통했을 때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보통 놈이 아닌 건 확실하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바시온이 경계심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드러냈다.
“네놈은 대체 뭐지? 너 같은 악마가 하루아침에 나타날 리가 없을 텐데.”
“그야 난 악마가 아니거든.”
우우우웅!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빛이 번쩍이며 성검이 생성되었다.
“나는 인간이다.”
서걱!
카이의 성검이 스테론의 가슴을 사선으로 길게 베었다.
촤아악!
깔끔한 검격과 함께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왔지만, 스테론의 생명력은 그대로였다.
“피가 나오는데 생명력은 그대로라니, 이 버프 진짜 이상하다니까.”
이미 세르핀과 질릴 때까지 대련을 해보았던 카이였다.
어떤 공격을 하더라도, 생명력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뭐, 이 버프에도 어느 정도 구멍은 있어.’
바로 대상을 베어낼 수 있다는 것.
그 말은, 마음만 먹으면 상대의 신체 일부를 망가트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전력을 다하는 편이 좋을거야.”
망가지는 것이 싫다면.
***
“두 사람의 모습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랭킹에서도 이름을 보이지 않습니다.”
“…….”
부하들의 연이은 보고에, 감겨져 있던 쟈오 린의 눈이 조용히 반개했다.
“약속했던 한 달이 지났군.”
돌다리가 있으면 그것을 두드려본 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질 않아 그것을 부수고 자신이 다리를 새롭게 짓는 남자.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뛰어난 편이고, 나쁘게 말하면 겁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에게 겁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몇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2천만 명의 길드원을 이끄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간 큰 유저는 없었으니까.
“준비는?”
“용주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지금 당장 국경선을 넘을 수 있습니다.”
“좋군.”
그제서야 입 꼬리를 말아올린 쟈오 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선봉에 서지 않는다.”
모난 돌이 가장 먼저 정을 맞는 법이니까.
“오늘 같은 날을 위해 그동안 천문학적인 액수의 뇌물을 바쳐오던 것이었지.”
높은 관직에 앉아있는 자들 중에는 세상의 간단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지.”
차갑게 미소 지은 쟈오 린이 부하들을 시켜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날 예순두 개의 서신이 알데바란 왕국의 귀족들 앞으로 전해졌다.
***
“결국 이렇게 나오는군요.”
커뮤니티의 뉴스를 보고 있던 미네르바가 중얼거렸다.
온갖 커뮤니티에서는 초 단위로 기사가 갱신되는 중이었다.
[흑룡, 알데바란 왕국의 출전에 참가 발표.]
[예고 없이 일어난 침공 이벤트?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알데바란 vs 라시온. 전문가들이 분석한 두 나라의 국력]
[난데없는 선전포고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라시온, 카이는 어디에?]
알데바란 왕국의 뜬금없는 칼을 뽑았다.
그 칼끝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국가, 라시온을 향해 있었다.
“오히려 쟈오 린, 그 녀석답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말을 받은 자는 고스트였다.
방에는 미네르바와 고스트 이외에도, 프레이와 적색여명회의 멤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리버티아와 하베로스, 아르칸 아카데미 등을 돌아다니며 영지의 경계를 강화하는 중이었다.
특히 적색여명회의 회원들은 처음에는 레벨 업 할 시간도 부족한데 무슨 영지 방어냐고 투덜거렸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이를 휴가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이의 영지들은 각자가 확실한 컨셉을 가지고 있어서 구경하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회장,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자리에 앉아있던 크리스가 손을 들며 물었다.
“여명의 편지와 함께 들어온 의뢰다. 우리는 여태까지처럼 카이의 영지를 지킨다.”
“흑룡 놈들이 오면, 놈들이랑도 싸우는 건가?”
“물론이지.”
시원시원한 고스트의 대답에 미네르바가 말을 얹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저희도 함께할 테니까.”
“걱정은 무슨……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 따위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
크리스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문제는 이 전쟁이 언제까지 지속되느냐의 문제겠지. 회장, 정확히 의뢰가 뭐였다고?”
“카이가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그의 영지와 영지민들을 보호할 것.”
“흐음. 근데 진짜 돌아올 수는 있는 건가? 지금 랭킹에도 안 뜨는데.”
그의 목소리는 아주 살짝 불안정해 보였다.
“왜, 안 돌아왔으면 좋겠나 보네? 계속 1위 하게.”
“어부지리로 얻은 자리 따위에 큰 미련은 없어.”
“그럼 다행이고. 아, 참…….”
고스트가 고개를 돌려 미네르바를 쳐다봤다.
“혹시 이번 전쟁에서 태양교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계십니까.”
“태양교라면…….”
그녀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중립을 취할 거예요. 물론 대외적으로 알데바란 왕국을 비판하겠지만…….”
“태양교의 원조를 바랄 수는 없다는 뜻이군요.”
“글쎄요, 확답을 못 드리겠네요.”
미네르바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홀짝였다.
“무슨 뜻입니까?”
“아르칸 아카데미, 아시죠?”
“예…… 아, 설마?”
“그곳에는 교황님이 있어요. 만약 흑룡 놈들이 미쳐서 그곳까지 건드린다면, 태양교에서 뿔이 단단히 날 수도 있겠네요.”
“흐음. 아르칸 아카데미라.”
잠시 턱을 문지르던 고스트가 재차 질문했다.
“그곳에는 대륙에서 모여든 귀족과 왕족, 황족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의 국가에서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습니까.”
“무리일걸요. 사실 알데바란 쪽에서는 아르칸 아카데미를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쪽 나라의 인물들도 제법 들어와 있고, 그곳을 건드리면 큰일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즉 NPC들은 아르칸 아카데미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군요.”
“네. 하지만 멋모르는 유저들은 건드릴 수 있겠죠.”
“과연.”
아르칸 도시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해서는 세간에 공개되지 않았다.
대륙에서 온갖 고귀한 핏줄들이 모이는 것으로 보아, 건드리면 안 될 장소라고 생각만 할 뿐.
“골치 아프군요. 크리스, 아르칸 쪽은 네가 맡아라.”
“나 혼자서?”
“저희 성혈단이 아르칸 아카데미를 함께 수호할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좋군요. 그럼 저를 포함한 나머지를 회원들은 시리스 성채에서 수성하겠습니다.”
작금에 이르러서 카이의 영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동부의 몇 개 도시를 빼고는 모두 그가 다스리고 있었으니까.
그중 시리스는 라시온의 북부와 동부를 가르는 입구 역할을 하는 협곡 성채였다.
실제로 이전에 라시온의 변절자들이 배신을 했을 때도, 그곳을 가장 먼저 점거하려고 했다.
“시리스 성채를 단단히 틀어막으면, 그 협곡의 뒤로는 아무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곳을 무시하고 돌아가려면 엄청난 시간과 군량이 소모되죠. 좋은 생각이에요.”
미네르바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생각이 맞다면 아마 저희를 도와줄 이들이 더 있을 거예요.”
라시온 왕국에 둥지를 트고 있는 것은 카이뿐만이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