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
힐통령 389화
118. 지금 만나러 갑니다(5)
“호반 백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오지라 남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파로스 자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알데바란 왕궁으로 수십의 귀족들이 들어섰다.
저마다 작위는 달랐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막강한 사병을 지닌 군벌 귀족이라는 것.
“쟈오 린 자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쟈오 린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곧장 작전 회의실로 향했다.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오긴 하는군.’
라시온 침공군 결성.
흑룡 길드를 결성하던 게임의 초창기 때부터 노리던 원대한 숙원 중 하나였다.
물론, 침공하려는 목표 자체는 조금 달라졌다.
‘그게 벌써 1년 반 전인가…… 그때는 참 재미있었지.’
당시의 미드 온라인은 단 한 단어로 설명이 가능했다.
격전지.
수억의 유저들.
수백, 수천 개의 길드가 저마다 깃발을 내세우고 포부를 드러냈다.
그 중 선두에서 달리던 10개의 길드는 세계 10대 길드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부여받았다.
‘라시온 왕국은…… 황금의 땅이나 다름 없었지.’
내륙 지방인 알데바란, 하란 왕국과는 다르다.
라시온 왕국은 산과 바다, 들판과 강까지.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세계 10대 길드 중 다섯 길드가 라시온 왕국에 둥지를 트고 있었다.
검은 벌과 타이탄, 천화, 워리어스, 프레이까지.
그들과 끝없이 경쟁하고, 길드의 몸집을 키우며 사냥터를 통제하기까지.
문득 지난 일 년 반을 되돌아보니 참 열심히 달려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슬슬 끝을 볼 시기지.’
같이 선두를 달리던 경쟁자들 중 절반 가량이 갖은 이유로 탈락했다.
상향 평준화되는 유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멸하거나, 누군가를 잘못 건드리거나.
‘카이.’
10대 길드 중 두 곳을 먹어치운 괴물.
쟈오 린이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했으며, 가장 깊게 관찰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더라도 없는 자리에서 빛나진 못하는 법.’
그가 돌아올 수 있는 것인지, 만약 돌아올 수 있다면 언제 돌아올 것인지.
쟈오 린을 아무것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부수를 던졌다.
‘보름, 딱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라시온의 북부를 시작으로 동부까지 일직선으로 밀어버리는데 소요되는 시간.
스스로의 계산에 따르면 딱 보름이 걸린다.
천화? 워리어스? 프레이?
제 아무리 놈들이 똘똘 뭉쳐도 달라질 건 없다.
‘지금 당장 가용할 수 있는 길드 병력만 800만.’
물론 그들 중 랭커는 한줌 밖에 안 된다.
애초에 흑룡 길드에 소속된 2천만 길드원들 중 대다수는 유령 길드원이니까.
머릿수만 대책없이 늘려놓았기에 흑룡은 날 빠진 검, 오합지졸이라고 불려도 할 말은 없다.
허나 처음부터 상대를 방심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카이가 있어도 이길 확률이 높은데 놈까지 자리를 비웠다.’
이미 상대방의 수준은 뮬딘 교를 통해 충분히 검증을 한 상태였다.
스팅, 골리앗과 손을 잡고 어울려준 이유도 라시온 쪽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조만간 바빠지겠군.’
전쟁은 승리하는 것보다, 끝난 뒤 늘어난 영토를 안정화시킬 때가 바쁜 법이니까.
***
카이가 마계에 도착한 지 정확히 30일이 되는 날.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제 신출귀몰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
기다리던 메시지였다.
이제 원할 때면 언제든지 중간계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럼 이제 슬슬 메인 디쉬를 노리러 가볼까.’
카이가 고개를 돌려 두 대공을 바라봤다.
그들을 상대로 뽑을 만한 건 이미 다 뽑아낸 후였다.
‘재미있는 것들을 배웠어.’
검은 뇌전의 스테론.
개인적으로 그에게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번개를 다룰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있었네.’
본인조차 까먹었던 효과였다.
바로 자탄의 중력 장갑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 장갑에는 중력장을 생성 시 일정 확률로 속성을 부여하는 효과가 깃들어있다.
만약 운 좋게 전격 속성이라도 부여받게 된다면.
‘스테론의 움직임을 어설프게나마 따라할 수 있어.’
물론 그것은 대공 급 강자에게는 통하지 않을 잔기술이다.
허나 유저들을 상대할 때는 그보다 유용한 것이 없을 터.
“배운 거 잘 써먹을게,”
“지독한 인간. 제발 꺼져라. 제발…….”
바시온이 구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듣는 이의 힘이 쭉 빠지게 만드는 맥 없는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갈 생각이었어. 너희들은 이제 어쩔거지?”
카이의 질문에 바시온과 스테론이 서로를 쳐다봤다.
잔뜩 지친 표정의 두 대공은 힘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난 성으로 돌아가겠다.”
“바시온. 네 놈의 목은…… 당분간 보관하고 있어라.”
영지에 돌아가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 뒤 늘어지게 자고 싶다.
그것이 두 대공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유일한 사고였다.
“그럼 알아서들 하고. 나중에 또 보자고.”
“미친 소리하지 마라.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거다.”
“카이라고 했나? 반드시 기억해두지.”
두 대공은 카이에게 완전히 질린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때려도 피해를 입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싸움을 피할 수도 없는 이유는, 기어코 쫓아와서 자신들을 두들겨 팬다.
결국 두 대공은 울면서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대련에 어울려 줄 수밖에 없다는 소리.
“강화 소환, 미믹.”
펄럭!
늠름한 와이번을 소환한 카이가 그 위에 올라탔다.
“가자.”
천계의 신들마저 만나기를 꺼려한다는 마계의 왕.
앙골모아를 만나러.
***
카이는 네 명의 대공과 모두 손을 섞어봤다.
그러면서 한 가지 생각이 확실하게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혔다.
‘대공들은 안 돼.’
그들은 자신의 전력을 받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왕이라면 어떨까.’
빛살처럼 움직이는 스테론보다 빠르고, 바시온의 극독보다 지독한 마기를 뿜어내며.
온갖 속성의 마법을 다룬다는 마왕 앙골모아.
카이는 그녀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했다.
펄럭, 펄럭.
순식간에 마계 대륙을 주파한 미믹이 마왕의 영역에 들어섰다.
띠링!
메시지가 도착한 것도 그때였다.
[유하린 : 카이님, 어디세요?]
[카이 : 저 지금 마왕 만나러 가고 있어요.]
[유하린 : 아하, 신출귀몰은 어떻게 됐어요?]
[카이 : 다행히 사용가능해요. 마왕이랑 대련 끝나면 같이 이동하면 될 것 같네요.]
[유하린 : 그런데 괜찮으세요? 아침에 커뮤니티 잠깐 봤더니 전쟁 일어난다던데…….]
[카이 : 괜찮아요ㅎㅎ 라시온 왕국군은 물론이고, 프레이 길드랑 성혈단. 적색여명회까지 영지를 보호해 줄 거예요. 게다가 천화랑 워리어스도 자기 땅 지키려면 별 수 있나요? 죽기 살기로 싸워야죠.]
설마 그들 전부가 흑룡 길드와 알데바란 왕국에게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하린 :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마왕이랑은 며칠 정도 대련할 생각이세요?]
[카이 : 음. 해봐야 알 것 같은데요. 물어볼 것도 좀 있구요.]
[유하린 : 뮬딘에 대한 건이죠?]
[카이 : 네.]
[유하린 : 알겠어요. 아무리 버프를 받았다지만 공격 받으면 통각은 있으니 조심하시구요.]
[카이 : 하린 씨도 조심하세요.]
[유하린 :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흠.”
메시지를 보고 있던 카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요즘 들어 부쩍 하린 씨와 거리가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이게 여행의 힘이겠지.’
타지에서 남녀가 함께 생활하며 서로에게 의지하니, 사이가 좋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끼루룩!”
잘 날아가던 미믹이 돌연 구슬픈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왜?”
카이가 미믹의 목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켰지만, 미믹은 힘없는 날갯짓과 함께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갔다.
‘왜 이러지?’
그에 대한 의문은 금새 해소되었다.
[미믹의 만복도가 15%로 떨어졌습니다.]
[미믹의 상태가 ‘굶주림’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카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환수를 거둔 뒤로, 단 한 번도 이런 메시지가 떠오른 적은 없었다.
‘그야 내 새끼들은 늘 잘 먹여왔으니까.’
돈도 많겠다.
카이는 자신의 소환수들이 먹는 것에는 크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마계에서는 그게 마음대로 되지않았다.
‘돈으로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곳도 없고…… 생각해보니 하린 씨가 요리해 줬던 게 마지막 식사였네.’
그 이후로는 모든 소환수들이 쫄쫄 굶고 있는 상태.
물론 빛의 전사들은 기본적으로 영혼인 상태라서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블리자드와 미믹, 그리고 카이 같은 경우에는 달랐다.
‘사실 미믹도 슬라임 형태에서는 포만도가 무한인데 말이지.’
슬라임 형태.
그러니까 아무런 변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미믹은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다.
하나 와이번 형태나 킹 샌드웜 등등.
다른 생물로 변신을 했을 때는 주기적으로 음식을 넣어줘야 했다.
문제는 미믹이 먹이를 가린다는 점이었다.
와이번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도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슬라임이기 때문인지, 녀석은 주로 액체 형태의 음식을 먹어왔다.
‘한동안 푸른 역병을 꾸역꾸역 잘 먹더니. 요즘은 그것도 잘 안 먹던데.’
카이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푸른 역병을 살짝 뿜어냈다.
“미믹, 배고프지? 이것 좀 먹어볼래?”
“뀨룽.”
그거 싫어요라고 말하는 듯 고개를 휙 돌리는 미믹.
머쓱해진 카이는 하는 수 없이 인벤토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정리 정돈을 하도 안해서 여기도 난리네.’
온갖 종류의 아이템들이 무분별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건 먹을 수 있어? 캔 참치인데. 국물도 있단다.”
도리도리.
“그럼 이건? 헬릭 님이 너무 많이 드시길래 압수했다가 까먹고 못 돌려준 초콜릿인데.”
도리도리.
“하, 미치겠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어쩌면 미믹은 헬릭님보다도 편식이 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먹을 건 이게 전부인데. 다 싫으면 대체 뭘 먹여야…… 음?’
가방을 정리하던 카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방 청소를 하던 중, 침대 밑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발견할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건?”
그것은 동그랗고 새카만 구슬이었다.
[자탄의 핵]
등급 : 유니크
한 때 자탄의 에너지 부분을 담당하던 핵입니다.
신성력을 부여하면 재가동합니다.
‘자탄의 핵…….’
자탄을 물리치고 얻었던 보상 중 하나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제서야 발견했다.
‘미믹 때랑은 설명이 조금 다르네.’
미믹 같은 경우는 아오사를 잡고 나온 불완전한 핵에서 깨어났다.
당시에는 설명이 ‘신성력을 부여하면 깨어납니다’였다.
“뀨룽?”
자탄의 핵을 꺼내자 미믹이 휙 고개를 돌려 관심을 드러냈다.
와이번의 올망졸망한 눈이 반짝거리며 자탄의 핵을 빤히 쳐다봤다.
“잠깐 기다려 봐. 재가동부터 시켜보게.”
신성력을 주입하자 핵이 떨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마치 오래된 쇠에 붙어있던 녹이 떨어져나가듯.
새카만 부분들이 바스라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영롱하게 빛나는 자탄의 핵.
마치 심장을 쥐고있는 것처럼 크게 펌프질을 반복했다.
“뀨루루루룽!”
미믹이 밀쳐 날뛰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평소에는 애교라고는 일절 없는 녀석이 주변을 맴돌고, 배를 까뒤집으며 다리를 흔들어댔다.
“이거 먹고 싶어?”
끄덕끄덕!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믹을 바라보며, 카이는 생각에 잠겼다.
‘애한테 불량 식품 먹이면 안 되는데…… 이거 괜찮겠지?’
우선 레이드 보스 몬스터에게서 나왔던 것이고, 미믹이 이토록 먹고 싶어하는건 처음이다.
“좋아. 그럼 한 번 먹어봐.”
카이가 핵을 내밀자, 미믹이 와이번 폼을 취소하고 슬라임 형태로 돌아왔다.
“응? 잠깐만. 네가 슬라임 형태로 무언가를 먹는 걸 본 적은 없…… 아, 한 번 있구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카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럼 설마…… 이번에도?”
아니나다를까, 과거와 똑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미믹이 자탄의 핵을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흡수가 완료되면 미믹이 중력장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진행률 1.2%……]
[진행률 2.3%……]